25. 이세계(3)
지호가 방을 나오자 그 앞을 기다리고 서 있는 여자가 있었다. 이 도시를 지키고 있는 각성자, 오르가였다.
도시를 지키고 있다 해도, 지호가 보기에 그녀는 C급 정도에 불과했다. 아마 더 높은 등급의 각성자들이 죽어 나간 후 결국 그녀에게 돌아온 자리일 것이다.
“니어트를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갑자기 사라져서 찾고 있었는데…….”
“음, 니어트의 가족이신가요?”
이 도시는 누구 하나 사라진다고 해서 찾을 여력이 없어 보였다. 혹시 몰라서 던진 질문에 오르가는 난처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지만… 돌아가신 관리자님께 지켜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관리자님의 유일한 혈육이… 니어트입니다.”
“아…….”
“혹시 니어트를 어디서 찾으셨습니까?”
“……저랑 같이 납치되고 있었는데요.”
“네?”
놀라서 눈을 크게 뜬 오르가에게 지호는 약간의 거짓을 섞어 설명했다.
지호가 눈을 떠보니 큰 부상을 입고 독에 당한 채 마차에 실려 있었고, 그 옆에 니어트가 있었다. 이상한 도시로 끌려가기 전 지호는 어떻게든 납치범을 쓰러트렸고 니어트가 도와줬다. 여차저차해서 기억이 지호는 니어트를 따라오게 되었다…….
꽤 조악한 설명이라 의심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오르가는 생각보다 순순히 믿는 눈치였다. 워낙 세상이 막장으로 굴러가서 그런 걸까.
“저, 신지호 님.”
“네?”
“혹시… 다른 목적지가 있으십니까? 여기 머무르시겠다면 얼마나 머무실 건지…….”
오르가는 지호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갑자기 나타난 지호를 조금 경계하면서도, 균열을 무사히 처리한 지호를 잡고 싶은 눈치였다.
어차피 지호로서도 여기서 쫓겨나면 갈 곳이 없다. 저 끔찍한 침식 사이에서 불안하게 잠들고 싶진 않았다.
“허락해 주신다면 여기 조금 머물고 싶습니다만…….”
“네, 물론 환영합니다. 원하시는 만큼 편히 머무실 수 있도록 방을 준비하겠습니다.”
오르가는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재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씻고 나온 지호는 자신의 방을 둘러보았다. 이곳 주민 대부분이 천막에서 지내지만 지호는 특별히 작은 집으로 안내되었다. F급의 각성자가 끓여 준 물로 목욕하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이곳의 문명은 지구로 치면 20세기 초반쯤 되는 것 같다. 물론 많은 게 박살 나서 제대로 돌아가는 건 없지만 말이다.
듣기로는 이곳 관리자가 죽은 건 한 달 전의 일이다. 원래도 버티기 아슬아슬했으나, 관리자가 죽은 이후 균열이 급격히 늘어나 간신히 버티던 게 순식간에 무너졌다.
도시가 무너지고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지금 남은 사람들은 어떻게든 아등바등 살아남고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소용없는 짓이다. 아무리 노력해 봤자 관리자가 없는 이상 균열은 점점 늘어난다. 세계의 붕괴는 가속화되고 예정된 멸망은 피할 수 없다. 언젠가 이곳은 던전의 침식만으로 가득 찬 별이 될 것이다.
‘머리 아파…….’
지호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오늘은 도시를 지켰지만, 내일 더 강한 균열이 온다면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다. 어떻게든 계획을 세워 이뤄 나가던 때와 달리 지금은 막막했다. 이 세계를 구할 수도 없고 지구로 귀환하는 것조차 방법도 모르겠으니까.
“하아…….”
지호는 침대에 털썩 누웠다. 새카만 천장을 바라보던 지호는 왼손을 들었다. 그곳에는 여전히 이원이 억지로 끼워준 반지가 반짝이고 있었다.
조금 전 전투에서 니어트를 곧장 구하러 가지 못한 건, 순간적으로 떠오른 목소리가 발을 잡아챘기 때문이었다.
‘그러고도 남지. 넌 언제나 내가 먼저가 아니잖아.’
이원이 지호의 죽음을 대신 가져가는 스킬, 이플리스의 수호. 이원은 그 스킬의 존재를 알게 된 지호가 여전히 타인을 위해 몸을 날릴 거라고 자신했다.
이원은 틀렸다. 누군가를 구하려던 순간 원망하던 이원의 목소리가 생각나 저도 모르게 발을 멈췄으니까.
‘넌 주이원 같은 건, ‘내가 잘하면 되겠지’라고 쉽게 생각하잖아.’
“아니거든, 이 멍청아…….”
이제는 확실하게 대답해 줄 수 있었지만, 그토록 서러운 분노를 토해 내던 이원은 곁에 없다. 지호는 이원에게 확신을 주지 못한 채 헤어진 걸 뼈저리게 후회했다. 어쩌면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르는데.
“아니, 약한 생각하지 말자.”
어떻게든 지구로 돌아갈 방법을 찾자. 뭘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눈앞의 일을 해결하면서.
일단 이 무너져 가는 도시를 어떻게든 해야겠다. 도시 외부에서 열린 균열은 잠시나마 막아 낼 수 있도록. 천막이 죄다 불타 버렸으니 잘 곳이 부족할 텐데 그것도 해결하고, 균열이나 던전이 나오면 가능한 선에서 처리하고…….
‘충분히 가능한 선에서만.’
늘 최선을 다하다 못해 제 한계까지 몸을 던지던 지호에게는 어려운 일이지만, 이제는 냉철하게 행동할 때였다.
지호는 조금 전 니어트에게 들은 말을 떠올렸다.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전력이 되는 사람은 몸을 아껴야 해. 네가 다치기라도 했으면 이 도시는 전멸이었어.’
그녀의 말이 옳다. 관리자가 죽은 후 이 세계는 빠르게 붕괴했다. 강한 각성자가 거의 죽어 버린 지금, 지호는 대체할 수 없는 인력이었다. 스킬 레벨이 낮은 검사라고 해도 여기서는 강한 축에 속할 테니까.
[별의 축언]이라도 걸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하지만 관리자의 스킬은 아무래도 제약이 많다. 이원의 물을 조종하는 능력이 이플리스에만 한정되듯, 지호의 [별의 축언] 역시 지구의 마력이 진하게 섞인 이원을 제외하고는 이계인에게 적용되지 않았다.
그럼 하다못해 [이해]스킬이나 인벤토리라도 불러올 수 있다면 좋을 텐데…….
“…….”
생각하자마자 너무도 자연스럽게 지호의 눈앞에 아이템이 차곡차곡 쌓인 창이 떠올랐다. 지구에서는 오직 지호에게만 개방되어 있던 인벤토리였다.
믿기지 않아 지호는 눈만 깜박였다. 아니, 당연히 안 될 줄 알고 안 열어 봤지. 이플리스에서는 사용할 수 없었으니까…….
생각해 보니, 이플리스에서는 이계인이 시스템창에 접근할 수 없도록 설정을 막아 뒀다고 했다. 하지만 균열이 발생한 지 고작 반년이 지난 이 세계에서는 세세한 설정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진작 좋은 무기와 포션을 꺼내서 쓰면 됐을 텐데. 이제라도 알아서 다행이었다.
“설마 다른 것도 열리려나?”
아무리 그래도 관리자창까진 안 보이겠지. 거기까진 바라지도 않는다만…….
“…….”
시스템 관리
■■(잠김) | 관리자 | 개 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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