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대비(4)
지호가 썩은 얼굴로 이원을 노려보고 있을 때, 오르가가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오르가 님.”
“안녕하십니까. 다름이 아니라… 나실리타 님이 잠깐 뵙자고 하는데 시간 괜찮으시겠습니까?”
뜻밖의 부탁이었다. 티항크로 돌아온 이후 나실리타는 휴식을 취하며 자잘한 일을 처리했다. 둘 다 도시를 지킨다는 목적은 같지만, 역할이 겹치지는 않아서 딱히 마주할 일은 없었다.
그런 나실리타가 대체 무슨 일일까. 지호는 이원과 눈짓하고 나실리타의 방으로 향했다.
당연히 따라 들어올 줄 알았던 오르가는 방 밖에서 대기한 채 얌전히 문을 닫았다. 훈훈하다 못해 조금 답답하게 느껴지는 방 안에서 나실리타는 푹신한 소파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어서 오세요, 신지호 님.”
“안녕하세요, 나실리타 님. 부르셨다고 들었는데,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요?”
나실리타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아무 문제도 없다기에는 지나치게 어두운 얼굴이었다.
“염치불구하게도… 제가 신지호 님께 부탁을 하나 드리려고 합니다.”
“부탁이요?”
“이것을 받아 주십시오.”
나실리타가 내민 것은 천으로 만든 작은 주머니였다. 낡은 주머니를 대수롭지 않게 받았으나… 안에서 나온 건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디자인의 화려한 반지였다.
“왕실의 인장입니다.”
“……제가 받을 물건이 아닌데요.”
당황한 지호는 주머니를 도로 닫아 나실리타에게 돌려주었다. 갑자기 떠맡을 만큼 가벼운 물건도 아닐 뿐더러, 지호는 이 반지를 받아 이 세계를 지킬 수도 없었다.
지호가 거절하자 나실리타가 애원하듯 몸을 깊이 숙였다.
“부탁드립니다. 제발 받아 주십시오. 저는 자격이 없습니다.”
“자격이 없다면 제가 더 없을 것 같은데요. 게다가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계신데…….”
“아뇨, 아닙니다.”
나실리타는 참을 수 없다는 듯 격렬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절망어린 목소리로 애써 입을 열었다.
“……저는 이곳을 버리고 도망쳤으니까요.”
“…….”
“짐작하고 계셨던 모양이군요.”
지호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일반인이 몬스터와 대치해 살아남는 건 아주 약한 놈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하다. 아무 능력이 없는 나실리타가 몬스터의 습격을 피해 간신히 도망쳤다는 쪽보다는 스스로 도망갔다는 쪽이 더 그럴싸하다.
“네. 그리고 저만 짐작한 게 아니겠죠. 그러면서도 다들 나실리타를 따르는 거예요.”
지호의 말에 나실리타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이 도시를 담당하는 오르가 님이 저를 따르고 있으니 다들 묵인하고 있는 거겠죠. 게다가 저보다는 제 뱃속의 아이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물론 저도 그렇게 생각하지만요.”
나실리타는 문 쪽을 바라보았다. 문 앞을 지키고 선 사람은 나실리타를 지키는 것보다는… 감시하는 느낌이 강했다. 그녀가 섣불리 이곳을 떠나지 못하도록.
“사실 게시를 받을 때 들었습니다. 당신은… 다른 세계의 관리자이시라고.”
나실리타가 목소리를 잔뜩 낮춘 채 은밀하게 속삭였다. 그녀의 눈빛은 몹시 절실했다.
“이곳에 오래 계실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잠깐이라도 이곳을 이끌어 주십시오.”
“그건 나실리타의 일이잖아요.”
“한 번 도망쳤던 비겁자로서 이제 제 일은… 아이를 무사히 낳는 것뿐입니다. 왕국의 후계자로서의 대우는 과분합니다. 제게는 아무런 자격도 없는데.”
“과분할지도 모르죠.”
“…….”
“하지만 자격이 없다는 건 그만둘 이유가 못 돼요.”
자조하는 나실리타에게 지호가 단호하게 말했다.
“한 번 도망쳤으니까 더더욱 해야 하는 거예요. 할 수 있는지를 따지는 게 아니라 어떻게든 해야죠. 저를 믿을 바에야… 본인을 믿어요.”
지호는 나실리타의 고민이 마냥 남의 것처럼 들리지 않았다. 스스로에게 믿음이 없었던 건 지호 역시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제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저도 제 세계에서는 실패한 관리자예요.”
“네?”
“아, 물론 완전히 실패한 건 아니지만요. 개인적으로 조금 문제가 있어서 제 힘을 다 발휘하지 못하거든요. 그래서 고생이 많았어요. 한때 다 놓아 버리려고 했을 정도로. 멋대로 생각해서 다 말아먹을 뻔한 적도 있었고…….”
새삼 생각해 보면 매번 너무 막무가내였다. 하지만 지나 온 선택에 아쉬움이 남을지언정, 여기까지 달려온 걸 후회하지는 않는다.
“놓아 버리면 지금의 저는 될 수 없었겠죠. 나실리타 님이 저를 괜찮은 사람으로 볼 수 있는 건 제가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나실리타 님도 포기하지 말고 해요. 생각하지 말고 하다 보면… 나아질 거예요. 지금은 아예 희망 없는 상황도 아니잖아요?”
“…….”
“안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지 마세요. 나실리타 님의 가치는 아이가 아니라 자신에게 있어요. 다시 한번 더 얻은 기회를 놓치지 마요.”
던전에서 이제 마지막이라고 생각한 순간 지호가 힘을 얻은 것처럼, 나실리타에게도 몬스터와 대항할 만한 수단이 생겼다.
“계속 도와줄 수는 없겠지만… 가능한 만큼 도와줄게요. 그러니까 당장은 할 수 있는 만큼의 일을 해요.”
“…….”
앙상한 손에 힘을 바짝 준 채, 나실리타가 의연히 고개를 들었다. 조금 전까지 그녀에게 서렸던 체념을 말끔히 털어 낸 채로.
나실리타는 지호에게 깊이 허리를 숙였다. 이전처럼 모든 걸 체념한 애원이 아닌,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인사였다.
* * *
깊은 밤. 잠들어 있던 지호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기척에 눈을 떴다. 잠옷 차림으로 몰래 방에 찾아온 사람은 다름 아닌 니어트였다.
“니어트? 여긴 무슨 일로…….”
“신지호, 빨리 도망쳐야 해.”
“뭐?”
급하게 침대로 다가온 니어트가 잔뜩 목소리를 낮췄다.
“지호를 잡으려고 해. 다른 곳으로 가게 해서는 안 된다면서.”
“무슨…….”
“나실리타 님과 한 이야기를 조금 엿들었나 봐. 떠난다면서? 못 떠나게 막으려는 속셈이야. 이 도시에… 신지호가 필요하니까.”
지호의 얼굴이 어두워졌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뭐가 괜찮아!”
“당장 날 붙잡을 방법도 없을 거야.”
“그건 그렇지. 어떻게 잡겠어.”
이원이 옆에서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제야 니어트는 두 사람이 이 도시에서 가장 강하다는 걸 깨달은 듯, 맥이 빠져 주저앉았다. 지호가 침대에서 내려와 부축하기 전에 이원이 니어트를 잡아 일으켰다.
간신히 자리에 선 니어트는 어두운 얼굴이었다.
“신지호. 미안해…….”
“뭐가 미안해.”
“괜히 여기로 데려와서… 다들 나쁜 사람은 아니야. 그냥…….”
“알아. 다들 필사적이겠지.”
간신히 도시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단순히 잘 사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이 걸린 일이다. 누구도 지호를 놓고 싶진 않을 것이다. 다시 죽을지도 모르니까.
지호는 니어트를 달래 그녀의 방까지 바래다주었다. 방에 돌아오니 이원이 잠이 다 깬 얼굴로 지호를 못마땅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몸 던지는 건 막아 뒀더니 여전히 호구네.”
“이건 딱히 몸을 던지는 것도 아니잖아. 우리도 여기서 사는 게 편하고, 잡으려고 해 봤자… 얼마든지 여유 있잖아. 그러니까 일단은 남는 게…….”
“알았어.”
“응?”
“지호 뜻대로 하자고.”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최소한 몇 마디는 더 얹으면서 투덜거릴 줄 알았더니, 이원은 생각보다 흔쾌히 수락했다. 지호는 믿기지 않는 얼굴로 이원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딱히 열은 없는데…….
“나 멀쩡해, 자기야.”
“아니, 믿기지가 않아서. 넘어가 주는 거야?”
“자기도 나를 이해하려고 애쓰니까. 게다가 지금은 어느 정도 내 힘이 돌아오기도 했고, 어지간한 상황은 대처할 수 있어.”
“응, 그렇지.”
“하지만 약속해. 위험이 닥치면 나실리타만 데리고 튀는 거야.”
진지한 얼굴에 지호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원이 심각해질 만큼 위험한 일에 대해서는 떠오르는 게 전혀 없었다. 지호와 이원을 따로 떼고 봐도 각자 이 도시에서는 가장 강한 전력이니까.
“뭔가 위협적인 게 있어?”
“관리자의 수호성. 이건 이플리스에서 부르는 명칭인데……. 이게 그러니까, 서리 같은 존재를 말하는 거야.”
“아…….”
서리도 꽤 셌다. 몬스터를 한 방에 쓰러트릴 정도는 됐으니까. 게다가 서리의 강점은 무력에만 있지 않았다.
시스템에 개입하는 힘.
“아직 이쪽 세상의 시스템이 다 개방된 건 아니지만, 지구보다는 더 개방되어 있지. 게다가 수호성은 그 자체로도 꽤 강해. 네 그건 반쪽도 안 되니까 약한 거고, 제대로 된 놈은 더 세겠지.”
“서리 욕하지 마.”
“네에네에.”
지호는 일부러 얄밉게 대답하는 이원에게 눈을 흘겼다.
“대답은 짧게 해.”
“하지만 자기가 차가워서 서러운걸……. 그리고 혹시 몰라서 말하긴 했지만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어. 수호성에게 다른 관리자는 다 도둑놈으로 보인다고.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니 협력은 하겠지만, 우릴 빨리 쫓아내고 싶을걸?”
“아, 그러게.”
서리도 이원만 보면 펄쩍펄쩍 뛰면서 쫓아내고 싶어 안달이었지. 이플리스에서 만난 나사르의 수호성 역시 지호를 잔뜩 경계했고.
게다가 지호를 가짜 몸에 붙들어 두려 했던 녹스도… 방향이 매우 삐뚤어졌지만 나름 지호를 위한답시고 한 행동이었다. 게다가 녹스 쪽은 주이원을 거의 증오하는 듯 보였으니까.
관리자를 끔찍이도 아끼는 수호성을 생각하다가… 문득 지호의 생각이 다른 곳에 미쳤다.
관리자였던 이원에게도 분명 서리와 같은 존재가 있었을 텐데. 이원의 수호성에 대해서는 전혀 들은 적이 없었다. 어디로 갔는지 종종 궁금했지만 직접 물을 생각은 없었다.
이원은 그런 지호의 생각을 모두 읽는 것처럼 씩 웃었다.
“왜. 내 수호성이 어떻게 됐는지 궁금해?”
“아니…….”
“죽었지. 내가 지구로 쫓겨날 적에.”
예상한 대로의 답변이었다. 이원이 저렇게 말하는 걸 보기 싫어서 묻지 않은 건데.
지호의 기분이 완전히 가라앉기 전에 이원이 손을 뻗어 지호의 눈가를 문질렀다.
“슬퍼하지 마. 나는 전혀 기억도 안 나.”
바로 그, 슬프지도 않고 기억도 안 난다는 점이 안쓰러운 건데. 그리 작지 않은 상처조차 아무것도 아닐 만큼 이원의 삶이 고통으로 점철되었던 것 같아서.
지호는 잠깐 망설이다가 양팔을 벌렸다.
“그래도 이리 와.”
“내가 이런 건 안 놓치지.”
이원은 씩 웃으며 지호의 품을 파고들었다. 체격 차이 때문에 그다지 든든하게 품에 안아 줄 수는 없었지만… 지호는 이원의 등을 부드럽게 도닥였다.
“이플리스에서의 일은 너무 신경 쓰지 마. 나는 지구인이야, 지호야.”
위로하려던 건 지호인데, 오히려 이원이 지호를 위로하고 있었다. 무리하지 말라고 하려던 찰나, 이원이 지호의 품으로 더욱 파고들며 작게 속삭였다.
“내 부모님은 나를 기꺼이 입양해 주신 그 두 분이야.”
“…….”
이원이 제 입으로 부모님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건 몹시 드물었다. 그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기일에 매번 부모님을 모신 곳에 가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지호조차 따라오는 걸 원하지 않아서 늘 혼자 보냈었는데.
이원을 지구에서 거둬 준 양부모님은 정말 좋은 사람들이었다. 정체도 알 수 없는 아이를 구해 주고 진심으로 아꼈다. 갑자기 사고로 돌아가시지만 않았다면, 이원의 존재를 지탱해 주는 게 지호 혼자만은 아니었을지도 몰랐다.
이원은 어두워진 지호의 얼굴을 보며 가볍게 미소 지었다.
“슬퍼하지 마, 지호야. 난 더 이상 슬프지 않으니까. 슬퍼하기엔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났지. 지금은 그냥… 감사할 뿐이야.”
이원이 지호의 품에서 몸을 일으켰다. 지금까지 저를 안아 주던 지호의 손을 모아 감싼 채, 이원이 그 위로 머리를 맞대었다. 오직 하나의 신을 모시는 사제처럼 절실한 모습에서,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원이 무엇을 감사하고 있는지 충분히 느껴졌다.
죽을 뻔했던 이원을 살려주고 키워 준 것. 그리고 지호를 만나게 해 준 것.
주이원의 부모는 이원에게 태어난 것보다 더 큰 기회를 준 사람이었다.
“다음엔 같이 가. 네… 부모님께 갈 때.”
지호의 말에 이원이 장난스레 씩 웃었다.
“결혼할 사람만 데리러 갈 건데. 지구로 돌아가면 결혼할래?”
지호는 더 이상 휘말리지 않기 위해 입을 꾹 다물었다.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는 지호의 모습이 뭐가 그리 유쾌한지 이원이 크게 웃었다. 그리고 곧장 지호를 답답할 정도로 세게 꽉 끌어안았다.
“지구에 돌아가면 찾아가 보자. 일단은 그래, 귀환을 보고할 겸.”
“……좋아.”
“응. 그럼 돌아갈 때까지 조금만 조심하는 거야. 너무 걱정은 하지 말고. 알았지?”
지호는 이원의 말에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니어트가 미리 경고도 해 줬겠다, 앞으로 발생할 일은 모두 해결 가능한 선에서 이루어질 거라고 여겨서.
그러나 생각보다 일은 빠르게, 그리고 큰 규모로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