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세계의 종착지(1)
세이크리스 해방군이 열일곱 번째 도시를 해방한 다음 날. 파멸을 불러일으키리라곤 짐작할 수 없을 만큼 소리 없이, 그것이 나타났다.
대던전.
이 세계를 집어삼키려 찾아온, 별이 맞을 수 있는 가장 큰 재앙.
기분 나쁠 정도로 고요하게 강림한 대던전은 여타의 던전처럼 요란하게 몬스터를 쏟아 내지도, 지나가는 사람을 끌어들이지도 않았다.
그저 존재한 채 서서히 제 영역을 벌리고 있을 뿐.
대던전은 이미 존재 자체로 파멸이다. 일반적인 던전의 침식은 세계에 뿌리를 내려 일부를 제 영역으로 바꿀 뿐이다. 그러나 대던전은 세계를 탐식하여 먹어 치웠다.
대던전이 원하는 건 강탈 따위가 아니다. 그저 파멸이다. 대던전에 휩쓸린 영역은 산산이 부서져 조각나다가 작은 티끌 하나 남기지 못한 채 사라졌다. 하늘은 일그러지고 바닥은 무너진다. 대던전이 휩쓸고 간 자리에 남는 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공백이었다.
“빨리 들어가야겠습니다.”
“준비는 하고 들어가야지. 여기에 먹히면 우리고 이 세상이고 끝인데.”
이원의 충고에 태용은 반박하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이내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보니 절대 만만한 상대가 아님을 깨달은 탓이다.
“준비야 금방 끝나니까, 조금만 대기했다가 가죠.”
이 순간을 대비하며 지난 한 달을 준비했다. 이원이 예상했던 최대 시점보다는 빠르지만, 그럭저럭 상대할 만큼의 전력은 준비되었다. 이원도 상당히 회복되었고…….
세계의 초반에 나타나는 대던전이다. 이만한 각성자를 모아 뒀다면 대던전 안에서 최악의 상황이 닥쳐도 공략할 수 있을 것이다.
만에 하나를 대비해 아이템을 점검하고, 그간 해방한 도시에 연락을 전해 둔다. 아무리 대던전을 공략한다고 해도 그동안 세계 바깥이 무너진다면 지금까지 한 일이 소용없게 되니까.
크사냑이 열심히 연락하고 이원이 명령을 내리는 사이, 지호는 무기를 손질하는 태용에게 다가갔다.
태용이 지닌 검은 온통 검은색인데 날이 뭉툭했다. 검을 주로 쓰지 않으니 아마 마법을 강화하는 류의 아이템일 것이다. 던전에서 얻은 게 아니라 오랜 역사를 타고 내려온 무기라는 티가 팍팍 났다.
“이건 제가 황룡 님께 잠시 받아온 보물입니다. 그러고 보니 황룡 님께서… 지호 님이 지구로 돌아오시면 꼭 한번 뵙고 싶다고 하더군요.”
“아. 황룡 님이라면 그…….”
지구의 SSS급 각성자. 이원이 EX급의 각성자라는 걸 알아낸, 미르 길드의 배후에 있는 자. 그리고 차원을 넘는데 많은 도움을 준 강대한 마력을 지닌 마법사.
“만나서 서로에 대해 알아보며 좋은 시간을 갖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음… 네.”
황룡의 말이 꼭, 아저씨가 작업 부리는 멘트처럼 들리는데 착각이겠지. 대충 들은 이야기로는 분명 엄청난 능력자처럼 느껴졌는데… 생각해 보니 정작 능력을 떼놓고 본 황룡이 어떤 자인지는 들은 적이 없다.
“그 황룡 님이라는 분은 어떤 분이세요?”
지호의 질문에 태용의 눈이 반짝였다.
“아주 강하신 분입니다. 여유로우시고… 누구보다 속 깊으신 분입니다. 만인에게 사랑받는 분이기도 하십니다.”
열광적인 태용의 목소리에서 황룡을 향한 깊은 존경심이 느껴졌다. 그 말만 들어보면 굉장히 이상적인 인물인데. 김태용이 딱히 자신과 가까운 이를 험담할 성격은 아니라, 직접 봐야 알 것 같았다.
조금 더 물어보려던 지호는 태용의 손이 희미하게 떨리는 걸 발견했다. 떨리는 손을 잡아 주려다가… 저기 있는 이원이 난리를 칠 게 뻔해서 그냥 등을 토닥이고 쓸어 주었다.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손이 떨리는데요.”
“그게… 조금 긴장한 것 같습니다…….”
이제 보니 조금 긴장한 게 아닌 것 같은데. 겉보기에는 티가 안 났지만 슬쩍 손으로 쓸어본 목은 상당히 차가웠다. 인간이 아니라서 그런지 온기가 사라져 체온이 내려간 피부가 거의 시체처럼 느껴졌다.
“왜 그렇게 긴장해요?”
“비명이 들립니다. 식물들이 비명을 지르고 있습니다.”
지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상당히 황폐해졌지만 그나마 식물은 꽤 남아 있었다. 하지만 조금씩 크기를 넓히는 대던전에 닿을 때마다 가루조차 남기지 못한 채 사라진다.
이전엔 화초 따위에 말을 거는 기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의 정체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식물의 소리가 들린다’는 말을 그저 농담으로 치부할 수는 없을 것처럼 태용의 지금 표정은 참담했다.
“안 들을 수는 없는 건가요?”
“억지로 안 들을 수는 있지만… 외면하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똑똑히 알려 주는 소리이니.”
태용이 손에 든 검을 꾹 쥐었다. 다른 사람이 무언가 해주지 않아도 태용 스스로 두려움을 천천히 극복했다. 하지만 비장한 얼굴에 스민 긴장은 여전했다.
“사실, 제가 이런 일에 나서는 게 처음이라…….”
“처음이요? 처음은 아니지 않아요?”
미르의 길드장으로서 지금까지 해 온 행보가 있는데. 수많은 던전을 공략하고 몬스터를 죽인 그가 이제 와서 처음이라고 하면…….
“대던전은 처음입니다.”
“그건 보통 다 처음일 거예요…….”
지금 상대가 지나치게 규격 외의 존재라서 그렇지. 보통은 이게 처음일 거다. 지호는 보기만 해도 오싹한 대던전을 마주한 채, 이 던전에 들어갔을 수많은 사람을 떠올려 보았다.
지호는 이것의 정체라도 알지, 다른 사람들에게는 미지의 공포였을 것이다. 지금까지 나타난 적 없는 타입의 던전에 들어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다가, 세계가 먹히는 걸 보면서 결국 안으로 들어갔겠지.
이원에게 미리 들은 바로, 이 안은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난생 처음 본 지옥에서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던전을 공략했을까… 또는 죽어갔을까.
그다지 알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저쪽도 처음부터 잘하지는 않았을 텐데요. 김태용 헌터는 처음이기도 하고, 저도 그렇고요.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처음인 건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위로하는 지호에게 태용은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지금까지 저는 우물 안 개구리였습니다. 날 때부터 어르신들께서 귀히 여겨 주셨고, 지구에서도 결정하기 힘든 일이 있으면 방법을 알려 주셨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태용이 저 멀리 선 이원과 크사냑을 바라보았다. 비교 대상을 저쪽으로 잡으면 당연히 비교될 수밖에 없겠지만…….
“물론 그렇습니다만, 더 잘하고 싶습니다. 누구보다도.”
굳이 이렇게 의욕을 불태우는데 꺾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 지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저의 활약을 똑똑히 봐 주십시오. 이계인보다 제가 낫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드리겠습니다.”
“…….”
아무리 태용이 힘을 낸다고 해도, 그 정도로 잘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괜한 승부욕은 불태우지 않는 게 좋을 텐데. 상대는 1000년 넘게 살아온 능구렁이 두 명이다. 100살 밖에 안 된, 상대적으로 풋풋한 김태용이 상대할 적은 아니다.
게다가 저 멀리서 그 이계인이 이쪽을 살벌하게 노려보고 있다면 더더욱. 하하, 지호가 어색하게 웃는 사이 이원이 못 들은 척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준비 끝났어. 출발하자.”
“응.”
지호도 자신의 무기, [방주의 보검]을 꺼내 들었다. 살의가 없을 시 두 배의 효과가 적용된다고 하는 이 검은… 세이크리스 해방군과 함께 사람을 상대할 때에도 효과를 발휘했다.
이 검의 효과가 적용되지 않은 적은 없었다. 지호의 살의가 다른 사람의 기준보다 터무니없이 낮은 걸까.
어쨌든 그런 무기이니, 대던전의 몬스터를 상대로도 충분히 효과를 발휘할 것이다.
“앞장서겠습니다.”
지금으로서는 가장 강력한 전력인 크사냑이 대던전으로 향했다. 지금까지 모든 것을 부숴오던 대던전은… 각성자 크사냑은 부수지 않은 채 그를 안으로 집어 삼켰다.
다음 차례로 태용이 들어가고, 지호와 이원만 남았을 때.
이원은 몇 번이나 충고해놓고는 다시 한번 심각한 낯으로 입술을 뗐다. 지호는 그가 잔소리하기 전에 손을 휘휘 저었다.
“알았으니까 말 안 해도 돼. 내가 그새 까먹을 만큼 멍청해 보여?”
“걱정되니까 그렇지, 매정하긴…….”
“빨리 들어가는 게 좋잖아? 먼저 들어갈게.”
지호는 이원의 얼굴을 힐끗 보고, 긴장을 억누른 채 대던전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 순간, 어느 때보다 강렬한 이질감이 지호를 덮쳤다.
순간 시야가 캄캄해졌다. 그와 함께 지호의 의식 또한 가물가물해졌다. 지호는 의식을 놓지 않기 위해 검을 꽉 쥐었다.
‘환상에 발이 묶이면 안 돼.’
이원이 몇 번이나 했던 충고였다. 대던전이 주는 첫 번째 관문은 다름 아닌 사람을 미혹시키는 환상이었다. 여기에 휘말리면 시작부터 탈락이다.
애써 무시하려는 지호에게 환상이 말을 걸어온다.
─ 네가 그런 고행을 떠맡을 필요는 없어.
─ 까딱 잘못하면 비참한 처지로 죽지도 못하게 돼.
─ 너는 끝까지 내 생각은 안 하지.
─ 나는 널… 용서하지 않을 거야.
아니, 그건 지호에게 시도하는 대화가 아니라… 그저 맥락 없는 말의 나열이었다. 지호를 꼬드기려고 애쓰는 느낌과는 아주 거리가 먼, 차라리 애원하는 듯한.
목소리에서 마지막으로 느껴진 건 깊은 체념과 원망이다. 그 감정의 색채가 낯이 익었다. 그러나 기억에는 전혀 없는 목소리였다.
대체 누구의 목소리일까. 언젠가 들어본 것 같은데.
목소리의 정체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지호는 대던전에 발을 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