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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세계의 종착지(5) (194/283)

28. 세계의 종착지(5)

이원은 힘없이 늘어져 할딱이는 지호의 새빨간 목덜미를 응시한 채 손을 움직였다. 천이 부딪쳐 사각거리는 소리가 날 때마다 지호가 움찔거렸다.

“으…….”

얕은 신음이 샌다. 얼굴을 보이기 부끄러운지 지호는 이원의 품으로 파고들며 얼굴을 가렸다. 이원은 지금 당장 지호의 턱을 들어 올려 입 맞추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았다.

지금 지호의 얼굴을 본다면 분명, 자제 못할 테니까.

신지호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상상하는 건 쉽다. 본 적 있으니까. 수십만의 밤이 흐르는 동안, 이원은 수십만 번 지호의 꿈을 꿨으니까. 개중에는 제 아래에서 흐트러진 지호의 꿈도 무척 많았다.

처음 이원의 꿈은 애틋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살인에 익숙해진 이원의 꿈은 과격해졌다. 그리고 차원 이동이 실패한 후, 지호가 자신을 잊었다는 생각에 꿈은 참혹해졌다.

지호는 다정한 걸 좋아한다. 하지만 아무리 애써도 지금의 주이원은 신지호를 마냥 다정하게 소중히 품어 줄 자신이 없었다.

‘취향이 좀 과격해졌단 말이지…….’

다시 만나서 애틋함을 느끼고 마냥 잘해 주리라고 다짐했는데. 1300년 간 버린 성격이 갑자기 자애로워질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암호문을 일부러 심술궂게 말했던 때처럼, 이원은 지호가 자신 때문에 우는 얼굴이 좋았다. 슬프고 괴롭고 힘든 감정을 이원 때문에 느끼길 바랐다. 그럴 때의 얼굴이 정말로… 참을 수 없게 만드니까.

그렇다고 매번 지호에게 차갑게 굴 만큼 못돼 먹진 않았다. 하지만 둘만 남아 지호를 속속들이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이 온다면 분명 솔직하고 저열한 욕망이 머리를 들 것이다.

적어도 지호가 완벽하게 자신에게 다시 넘어올 때까지는 참아야지. 이상한 짓을 해도 도망가지 못하도록 말이다. 신지호는 아무도 쥘 수 없었던 주이원의 고삐를 쥐고 있다. 지금은 본인조차 자각하지 못하고 느슨하게 잡힌 대로 대충 쥐고 있지만. 언젠가 꽉 잡고 제 고삐를 세게 쥘 때까지 주이원은 인내할 작정이었다.

“괜찮아, 독을 빼는 정도만 할 테니까.”

“주이원…….”

지호의 몸이 움찔거린다. 이 텐트 바깥으로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는다고 말해도, 부끄러운지 입을 꾹 다문 채 열지 않는다. 이원에게 매달린 채 헐떡이던 지호가 가볍게 몸을 떨더니 이내 축 늘어졌다.

이전과 달리 고른 호흡에 이원은 혀를 찼다.

“독을 걸 거면 제대로 걸든가…….”

주이원의 인내는 반쪽짜리였다. 최대한 참고는 있지만 기회만 있으면 지호를 집어삼키고 싶었다. 참을 수 없을 만큼 그럴싸한 핑계가 생긴다면 저지를 생각이었는데… 오늘은 날이 아닌 모양이다.

아쉬워하면서도 이원은 지호를 똑바로 눕히고 흐트러진 옷을 정돈해 주었다.

“여섯 시간까지는 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예정대로 일어나면 되겠네.”

독을 해소하고 푹 잠들었으니 소득이 아예 없는 건 아닌가. 지호를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원은 괜한 욕심이 생기기 전에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문 앞에는 김태용이 서 있었다. 어린 꼬맹이의 눈에는 이원을 향한 적대심이 가득했다.

“신지호 님은…….”

“잘 자고 있으니까 깨우지 마. 독에 당한 모양인데 해독했어.”

“……알겠습니다.”

순순히 대답하면서도 김태용은 텐트 앞을 떠나지 않았다. 이원은 태용을 무심한 척 바라보다가 자리를 떴다.

저 꼬맹이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지호도, 그 허접한 수호성인 고양이도 모르는 것 같지만… 김태용은 신지호의 반려라는 운명을 받은 녀석이니까.

반려는 세상에서 처음으로 태어난 관리자만을 향한 시스템의 안배였다. 반려는 태생부터 강력한 힘을 지니며, 처음부터 관리자에게 강한 친밀함을 느끼는데… 이원이 보기에 그 조건을 채우는 건 김태용밖에 없었다.

반려는 평생을 함께하는 동반자일 뿐, 그게 꼭 연인 관계를 뜻하는 건 아니었다. 이플리스의 첫 관리자와 반려 또한 평생 친구로 지냈다. 물론 많은 관리자 중에는 제 반려와 연인 관계가 된 놈도 있었겠지.

만에 하나 저 순진해 빠진 놈이 지호에게 특별한 애정을 요구한다면 죽여 버릴 작정이었지만… 이원은 미리 신지호가 제 연인이라고 못 박아 뒀다. 덕분에 고지식한 놈은 차마 지호를 그런 눈으로 보진 못할 것이다.

지호에게 이득이 될 놈이다. 미르 길드와 틀어지는 한이 있어도 저놈은 지호를 배려할 거다. 지호에게 절체절명의 위기가 찾아온다면 몸을 던져 구해 줄지도 모르지.

김태용은 유용한 패일 뿐인데… 가끔은 속이 쓰렸다.

주이원은 신지호를 망치기만 했는데, 김태용은 신지호에게 꽃길을 깔아 줄 운명을 타고난 놈이라서.

잠시 짜증스러운 생각을 하던 이원은 이내 고개를 흔들어 쓸데없는 생각을 털어 버렸다. 선대 왕을 죽이고, 살아 있는 중에 왕의 자리를 버리고, 지구의 운명을 완전히 바꿔 버린 게 자신이다. 고작 운명 따위가 두렵진 않다.

그러니 이건 치졸한 질투에 불과하다. 이원은 살의를 내리누르며 몸을 돌렸다.

* * *

대던전에 들어오고 일주일이 지났다.

일행은 드디어 대던전의 마지막 방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크게 다친 곳은 없지만… 일행의 얼굴에는 일주일 내내 새벽까지 야근한 직장인처럼 고단한 피로가 느껴졌다.

“힘들었습니다.”

“그러게요…….”

지친 듯 중얼거리는 태용에게 지호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몬스터가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강력한 건 아니었다. 다만 몬스터가 쉴 새 없이 들이닥쳤다. 그나마 여유가 있어서 돌아가면서 쉬긴 했다. 하지만 밖에서 요란한 소리가 나는데 편하게 잘 수 있을 리가.

절로 신경이 예민해진다. 어서 던전 밖으로 나가 쉬고 싶은 생각뿐이다. 지호는 다소 긴장한 크사냑을 돌아보았다.

“전에는 어떻게 공략했어요?”

“이원 님이 알아서 다 해 주셨습니다.”

“여기서도 알아서 해 주지…….”

“하하.”

이원이 멋쩍게 웃었다. 물론 도움이 되긴 했는데… 압도적으로 강한 건 아니다 보니, 함께 열심히 굴렀다. 그래도 덕분에 이원을 제외한 세 사람 모두 눈에 띄게 성장했다.

“그럼 준비됐죠?”

어쩌다 보니 파티의 리더 역할을 떠맡은 지호가 나섰다. 모두 문제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가장 먼저 크사냑이 앞장섰다. 김태용이 들어가고, 마지막에 들어가기로 한 이원과 눈빛을 교환한 지호가 안으로 발을 들였다.

‘이것만 끝나면 돼.’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다. 각오를 해야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발을 들인 순간, 갑자기 거꾸로 들린 것처럼 어지럼증이 몰아닥쳤다. 지호가 손을 쓸 틈도 없이 강력한 마력이 그를 휘감았다.

“신지호! 손,”

커다란 외침이 중간에 뚝 끊겼다. 갑자기 귀가 멀기라도 한 것처럼. 발 아래가 푹 꺼졌다. 그러나 추락하는 대신 지호는 안락하게 착지했다. 이상하리만치 편안한 감각이 지호를 감싸 안았다. 온몸이 따스한 물에 감싸인 채, 솔솔 단잠이 밀려들었다.

지호는 간신히 눈을 떴다.

눈앞에 보이는 건 저 멀리 서 있는 세 명의 동료다. 세 사람 모두 놀란 얼굴로 지호를 바라보고 있다. 지호가 입을 여는 순간.

-그아아아아악!

머리 위에서 몬스터의 거대한 울음이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소리는 그대로 파동이 되어 일행을 덮쳤으나 지호는 여전히 안락한 채였다.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간신히 눈알만 굴려 본 곳에는 반투명한 무언가가 삐죽 밖으로 튀어나온 게 보였다. 저게 뭘까, 생각하는 순간…….

그것이 삽시간에 길어져 일행을 내리쳤다. 일행이 피하자 그것은 바닥을 긁으며 재빠르게 움직이면서 일행을 노렸다.

지호는 한 발 늦게 깨달았다.

자신이 있는 곳이 보스 몬스터의 안이라는 것을.

이원이 검을 쥔 채 달려들었다. 보스 몬스터의 팔이 떨어져 나가고, 이원은 지호가 있는 몸통 쪽으로 검을 박아 넣었다.

동시에 지호는 팔이 끊어지는 듯한 고통에 이어 몸이 뚫리는 충격을 동시에 받았다.

몬스터의 몸이 투명하기 때문에 바깥에서 표정이 모두 보인 모양이었다. 이원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물러섰다.

몬스터는 이내 아무렇지 않게 재생해서 똑바로 섰지만, 끔찍한 고통은 여전히 지호를 괴롭혔다. 이원이 보고 있으니 멀쩡한 척이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죽을 것 같아.

이러다가 정말로 쇼크사로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더 무서운 건… 몬스터를 공격하지 못한 채 피하는 일행이었다.

‘제압이라도 해야지.’

일행도 마찬가지로 생각한 모양이다. 김태용과 크사냑이 협공하고, 이원이 올라타 마법으로 제압했다. 그러나 그 순간, 몬스터가 제압한 부분의 살덩이를 통째로 떼어 냈다.

지호는 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아주 잠깐 기절했다.

계속 기절해 있을 수도 없었다. 살점이 산채로 떨어져 나간 느낌. 몬스터가 작게 몸을 뒤틀 때마다 끔찍한 고통이 뒤따랐다. 점점 더 감각이 예민해져, 나중에는 서 있는 것조차 발이 불타듯 아파왔다.

정신을 놓고 싶다고 생각하던 그 때.

─ 이것은 불합리해.

낯선 목소리가 지호의 머릿속을 울렸다. 성별을 짐작할 수 없는 중성적인 목소리. 차분한 어조이지만 지호를 마음 깊이 걱정한다는 건 분명히 느껴졌다.

─ 불합리한 건 이것의 존재 자체다.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앞에 들린 것보다 굵은 남성의 목소리는 강한 적개심을 품고 있다.

─ 아무도 개입하지 않았지. 자연스러운 흐름 속에 만들어진 상황이니.

─ 너희는 이것을 아끼고 있다. 나는 그 말을 믿을 수 없다. 설령 네 말을 믿는다고 해도, 이곳은 대던전. 너희는 이 이상 개입할 수 없다.

완곡하게 설득하려던 목소리를 굵은 목소리가 쳐냈다. 한동안 머릿속에서는 아무런 목소리도 울리지 않았다. 지호가 격통을 느끼며, 차라리 정신을 놓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은 순간.

─ 무엇을 원하지?

처음 울렸던 중성적인 목소리가 한풀 꺾인 채 조심스레 질문했다. 그러자 이 말을 기다렸다는 듯 대답은 곧장 돌아왔다.

─ 주이원을 세계에서 치워라.

─ …….

─ 나는 그리 많은 것을 바라는 건 아니다.

미쳤나. 당연히 많은 것을 바라고 있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것만은 안 된다고 말하고 싶은데, 이놈들은 남의 머릿속에서 떠드는 주제에 지호의 말은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

─ 좋아.

지호의 기대와 달리, 중성적인 목소리는 잠깐의 침묵 끝에 곧장 제안을 수락했다.

─ 주이원의 생을 거둬들이도록 하지.

“미, 쳤어?”

고통 속에서 지호는 입을 열었다. 말을 할 때마다 목이 타들어 가는 것처럼 아팠지만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 걱정하지 마라. 네 삶이 끝난 후에는 다시 재회할 수 있을 테니까…….

고통스러워하는 지호의 모습이 안쓰러운 듯 중성적인 목소리가 달랬다. 그 목소리가 지호의 귀에 제대로 들어올 리 없었다.

“필요 없어, 그런 건…….”

누구 마음대로? 이미 오랜 세월 헤어져 있었는데 이원에게 또 상실을 느끼게 하라고?

정신력이 고통을 이겨 냈다. 여전히 죽을 것처럼 아프지만,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이 있었기에 지호는 이를 악물었다.

─ 괜한 힘 빼지 말렴. 어차피 이치에 맞지 않았단다.

부드러운 목소리와 달리 거대한 힘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마력이 아니다. 그 힘은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심지어 이원조차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목소리와 연결된 지호만이 희미하게나마 알 수 있었다. 저것은 마력보다 훨씬 더 상위 차원에서 존재하는 개념. 시스템, 그것과 궤가 같은 힘이란 것을.

“안 돼!”

지호의 비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세계를 재단하는 힘이 똑바로 이원을 향해 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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