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일촉즉발(7)
가슴을 꿰뚫린 채 쓰러지는 순간, 천희성의 기억 속에 누군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건 자신을 이곳으로 보낸 ‘삼촌’이었다.
무저갱을 닮은 새카만 눈을 기억한다. 죽음에 한없이 가까운 어둠을 떠올린 순간, 천희성은 코앞까지 다가온 제 죽음보다도 저 존재가 더 두려워졌다.
지금까지 천희성은 그것을 삼촌이라고 불렀다. 정을 붙일 유일한 혈육으로 믿고 따랐다.
그러나 원래 천희성이 삼촌이라고 부를 만한 존재는 없었다. 천희성에게 싸늘한 친가나, 연이 끊긴 외가, 그 어느 쪽의 어른도 그에게 정을 붙일 이유가 없었으므로.
그를 처음 본 것은 천희성의 어머니가 죽은 다음 날이었다.
‘네 어머니가 왜 죽은 줄 알아?’
갑자기 나타나 두서없이 말을 던진 그가 미소 지었다. 분명 웃고 있는데 웃는 것 같지 않은… 그 어떤 것도 담기지 않은 듯한 얼굴이었다.
‘가엽게도, 뱀에게 속았지. 커다랗고 멍청한 바다뱀.’
‘…….’
‘그렇다고 바다뱀에게 속은 네 어머니가 멍청하다는 건 아니고. 바다뱀은 한낱 인간에게는 재앙이니까.’
전도하는 사이비 같은 말이다. 원래대로라면 귀담아 듣지 않았겠지만 천희성은 남자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남자의 존재는 너무도 압도적이었다. ‘한낱 인간’이라는 표현이 과하지 않을 만큼, 아득하게 인간을 뛰어넘은 존재.
‘당신… 뭐야?’
‘뭘까?’
남자가 장난스레 되물었다.
‘소개할 말은 없어. 나는 정의되지 않고, 정의할 수 없으니까. 뭐 다들 제멋대로 무명이니 노네임이니 불러대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고.’
남자는 아무렇게나 지껄이고 있을 뿐이었는데 천희성은 남자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남자가 한 말 그대로, 그는 단어나 문장으로 정의할 수 없는 존재였다. 인식하기 전이라면 모를까, 한 번 시선을 두고 나서는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그런 존재.
‘도와줄까.’
‘……뭘?’
‘네가 바라는 모든 것.’
무명이 노래하듯 속삭였다. 램프만 문지르면 조건 없이 소원을 들어준다고 하는 정령처럼 너그럽게. 천희성은 남자의 말에 홀린 듯이 귀를 기울였다.
‘앞으로 기댈 혈육 하나 없는 널 지지해 줄 어른이 되어 주고, 아무런 힘도 없는 네가 집안에서 무시당하지 않도록 도와주고, 앞으로 무얼 위해 살아가야 할지 모르는 네게 복수라는 목적을 쥐여 줄게.’
‘……복수?’
‘복수하고 싶지? 너를 무시하던 어른들에게.’
무명의 목소리가 달착지근하게 귀에 달라붙었다. 당연히 남자가 어머니의 복수를 입에 담을 줄 알았다. 남자의 입에서 튀어 나온 뜻밖의 말에 천희성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어머니를 죽인 바다뱀이니 뭐니 해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복수라는 단어를 들은 순간, 그간 자신이 당하던 무시와 설움이 생각났을 뿐.
무명의 말을 듣는 순간, 어머니에 대한 복수보다 그것을 먼저 떠올린 자신이 수치스러웠다.
‘괜찮아, 어차피 나도 내 목적을 위해서 네게 손을 내민 건데. 너는 네 가족들에게, 나는 바다뱀에게… 타격을 입히기 위해 손을 잡으면 완벽하지.’
‘당신도 복수하려는 거야? 그… 바다뱀에게.’
그럴듯한 말로 꾀어 내는 무명을 보며 천희성은 당연한 의문을 가졌다. 천희성이 보기에 남자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으니까. 무명은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 건 아니고. 필요하니까.’
‘필요?’
‘그래. 네가 가장 적당하지. 귀인의 운명을 훔친 데다가, 집안도 집안이니.’
훔치다니, 누굴 좀도둑 취급하는 건가. 게다가 집안이라니, 이 집구석에서 태어나고 싶었던 적은 한 번도 없다.
인상을 찌푸린 천희성의 미간을 남자가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갑자기 가까워진 거리감에 희성의 뒤로 물러나자, 남자는 우습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물론 네가 원해서 훔친 건 아니었겠지만… 어쩌겠어? 이미 훔쳐 버린 것을.’
‘안 훔쳤어…….’
불만스레 중얼거리는 천희성을 보며 남자가 소리 내어 웃었다. 그리고 짓궂은 장난꾸러기처럼 씩 웃으며 낮게 속삭였다.
‘괜찮아. 반드시 네게 뭘 바라고 도와 달라는 건 아니니까. 아무 일도 없이 무탈히 넘어간다면 그건 그것대로 네 운명이겠지.’
‘…….’
‘하지만 만약에 때가 오면… 도와주는 거야. 나중에라도 꼭.’
나중에.
하필 이 순간에 지워진 기억이 떠올랐다는 것은, 남자가 말했던 그 순간이 바로 지금이었을까. 천희성은 가물거리는 눈으로 신지호를 노려보았다. 조금 전부터 묘하게 거슬리던, 저 초점 없는 두 눈.
설마 신지호를 대신해서 죽으라고 보낸 걸까. 그런 거면 정말로 억울할 텐데.
천희성은 입술을 달싹였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누군가가 자신을 끌어안는 것을 느끼며 천희성은 의식의 끈을 놓았다.
* * *
하늘 길드의 부길드장 천희성이 피습당했고, 중태에 빠졌다.
그 사실은 숨길 틈 없이 보도됐다. 언론에는 아직 ‘유력한 용의자를 조사 중’이라고만 발표됐지만, 그 용의자가 허소리라는 게 밝혀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모든 상황이 허소리에게 부정적이었다.
사람의 몸을 손으로 꿰뚫은 흔적부터 허소리에게 불리했다. 그런 기행은 각성자나 가능하니까. 당시의 허소리는 가짜 ‘신지호’를 회수하기 위해 일부러 블랙박스가 없는 차량을 선택했다. 당연히 주변에 CCTV도 없었다. 정황적인 증거가 너무도 불리했다.
게다가 이번에 터진 비리 사태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애를 쓰던 만큼, 하늘 길드와 천공 그룹 역시 노네임 길드 소속인 허소리를 진범으로 몰 것이다.
“하…….”
신지호는 초조하게 마른 얼굴을 문질렀다. 애초에 이런 상황이 닥치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맷에게 모두가 감쪽같이 속았다. 완전히 놀아났다. 신지호는 물론이고 이번에 습격당한 천희성까지.
맷이 진범이라는 사실을 바로 알게 된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가짜 ‘신지호’가 목격한 모든 데이터가 주하은에게 실시간으로 전송되지 않았더라면, 천희성을 공격한 진범을 조사하는 데도 시간을 썼을 테니까.
“천희성이 깨어나서 증언해 주면 좋을 텐데…….”
“기대하긴 힘들겠지.”
가슴이 뚫리고도 천희성은 살았다. 하지만 상처가 아물었음에도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천희성이 깨어난다고 해도 허소리에게 유리한 증언을 해 주리란 보장은 없었다. 어디까지나 천희성은 천공 그룹의, 하늘 길드의 소속이니까.
지호는 퍽 야속하게 말하는 눈앞의 이원을 빤히 바라보았다. 다들 이 사태에 발 벗고 나서는 동안, 지호는 최종적인 판단을 내리기 위해 이원과 둘만 남았다.
“일단 방침을 정하자.”
“무슨 방침?”
“일단 허소리 씨를 구하고…….”
“허소리 씨를?”
이원이 뜬금없이 말을 잘랐다. 갑자기 방해받은 지호는 의아한 얼굴로 이원을 살폈다.
“구해야지, 그럼. 내가 잡혀갔으면 안 구할 거야?”
“지금 개인적인 이유로 구하러 가자는 거야?”
이원이 날카롭게 물었다. 저도 모르게 어어, 하고 버벅거리려던 지호는 재빨리 정신 차리고 받아쳤다.
“아니, 개인적인 친분 때문에 구하러 가자는 게 아니라…….”
“아니면? 왜 허소리 헌터가 아니라 허소리 씨야?”
“……그냥 호칭 변화야.”
“왜 그냥 변하는데.”
그냥 그렇게 불러 달라고 해서… 라고 해 봤자 물고 늘어질 게 뻔하다. 이런 데 소요할 시간은 없는데. 설명하기 귀찮아진 지호는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아, 어쨌든. 그게 원래는 나를 노렸을 거야. 그런데 허소리… 헌터가 대신 잡혀갔단 말이지. 그러니까…….”
“그러니까 안 돼.”
지호가 이원을 한 대 칠 기세로 노려보았다. 그제야 이원은 한숨을 쉬며 덧붙였다.
“널 노리던 놈에게 허소리가 대신 잡혀갔어. 거기에 뭐가 있을 줄 알고 가?”
“내 말이 그 말이야. 사람 하나 죽여 가면서까지 일을 쳤어. 뭔가 노리는 게 뻔히 보이는데 저대로 둬?”
“그렇다고 네가 위험을 무릅쓸 필요는 없잖아?”
“……내가 간다고는 안했는데.”
“아.”
지호와 이원 사이에 잠시 침묵이 맴돌았다. 확실히 이원도 머리에 열이 올랐다. 예상 못한 사태이긴 했으니까. 지호는 조금 맥이 풀렸다.
“네 말대로 뭐가 있을 줄 알고 내가 가. 아니, 위험을 무릅쓰는 건 상관없지만… 내가 가기만 해도 발동하는 함정 같은 게 있을지도 모르고.”
“자기가 왜 허소리 때문에 위험을 감수해? 그냥 함정 때문이라고 해.”
“그렇게 사는 거 아니다, 너. 아무튼 허소리 씨를…….”
“헌터.”
“……허소리 헌터를 구하긴 구해야 해. 무턱대고 탈출시킨다는 게 아니고… 지켜보다가 위험할 것 같으면 데리고 튀어야지.”
“왜 굳이 기다려?”
“……허소리 헌터 인생도 좀 생각해 줄래?”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조사 받는 와중에 그냥 냅다 빼냈다가는 허소리에게 도망자의 낙인이 찍힌다. 그렇다고 정말 신변의 위험이 생길 수도 있는데 내버려 둘 수는 없다.
그러니 무작정 빼내려는 건 아니다. 일단은 가만히 지켜보다가 만에 하나의 상황이 발생했을 때 빠르게 구해 내야 했다.
이원은 못마땅한 투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잠입한 다음에 낚아채서 대충 튀면 되겠지.”
“대충 튀어서 되는 건 네 기준이고……. 혹시 구하러 갈 거야?”
“아니. 그거야 뭐 다른 녀석들 보내면 어떻게든 잘 하지 않겠어? 못하면 같이 잡혀 들어가면 되고.”
“야.”
“하지만 진범을 잡는 쪽이 더 사건 해결에 도움될 거 아냐?”
물론 그야 그렇다.
허소리를 구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일. 천희성을 찌르고 허소리에게 누명을 씌운 맷을 잡아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