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원류(1)
방주에 들어선 순간, 지호의 머릿속으로 또렷한 목소리가 꽂혔다.
─ 이곳에서 나가도록 해. 여긴 위험하니까.
한동안 침묵하던 멸망의 대적자의 목소리였다. 평소 전언을 보내 오던 것과 달리, 지금은 직접 말을 건넨다.
‘위험하다고 나갈 거면 애초에 들어오지도 않았겠지.’
지호는 눈앞의 캄캄한 어둠을 응시했다. 어둠에 섞인, 어둠 너머에 도사린 악의가 지호에게 쏟아진다. 멸망의 대적자가 뭘 염려하는지는 지호 또한 뼈저리게 느꼈다.
그러나 여느 때와는 다르다. 지호를 붙든 이원의 뜨거운 손. 주이원이 곁에 있다는 사실이 지호에게 더없는 안정감을 선사했다.
“멸망의 대적자. 당신이 이 시스템의 설계자라고 했잖아.”
시선은 느껴지지 않지만 분명 어디선가 자신을 보고 있을 멸망의 지배자. 지호는 확신을 품은 채 그에게 말했다.
“나는 시스템을 제대로 다룰 힘이 필요해.”
맞잡은 손의 온기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이대로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녹스가 할 수 있는 것을 내가 못 하지는 않을 거야. 가능하다면 내게 시스템을 지금보다 자유롭게 다룰 수 있는 힘을 줘.”
─ 위험하다.
“이대로 있어도 위험한 건 마찬가지야.”
─ 그건 내가 어떻게든 해 볼 테니…….
“당신은 함부로 개입할 수 없잖아. 안 그래?”
개입이 가능했다면 진작 어떻게든 도왔겠지. 멸망의 대적자는 지호를 무척 아끼고 있었으니까.
“당신이 개입하면 대던전 또한 직접 개입할 수 있는 거야. 안 그래?”
멸망의 대적자는 침묵했다. 침묵 속에서 지호는 상대가 얼마든지 권능을 내릴 수 있음을 확신했다.
“그리고 말해 줘.”
─ 무엇을?
“내가 모르는 진실. 당신이 침묵하는 진실.”
지호는 그간 토막토막 끊긴 진실만을 접했다.
모든 관리자는 관리자가 되기를 선택한다. 지호에게는 관리자가 되기 전의 생이 한 번 더 있었다. 그 생에서 지호는 이원과 어떠한 깊은 관계였다. 오직 지호를 쫓기 위해 관리자의 길을 선택했을 만큼.
그런 이원을 없애기 위해 외부의 존재는 테네브를 통해 개입했다. 자신이 받을 페널티를 감수하고서라도 이원을 죽이고 싶어서.
살해의 이유는 이원의 전생에서 찾아야겠지. 그만큼 이원이 의미 있는 존재라는 거다. 그리고 지호 역시도.
‘네가 그런 고행을 떠맡을 필요는 없어.’
언젠가 환상 속에서 들린 목소리가 지호의 귓속을 울린다. 동시에 환영처럼 누군가의 모습이 떠올랐다.
주이원이다. 아니, 이원과 닮았지만 조금 다르다. 이목구비의 생김새나 지닌 마력, 풍기는 분위기까지. 형제처럼 닮았으나 본인은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 인물이라기엔 지나치게 닮았다.
‘까딱 잘못하면 비참한 처지로 죽지도 못하게 돼.’
물에 잠긴 채 바깥의 소리를 듣는 것처럼, 목소리는 다소 멀게 들렸다. 하지만 확실히 알아들을 순 있었다.
눈앞의 ‘이원’이 화를 낸다. 이원의 손이 지호의 손목을 단단히 붙들었다. 절대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가만히 내려다 본 자신의 손에는 본 적 없는 금빛 팔찌가 끼워진 채였다. 조금 부담스러운 디자인이지만… 그가 준 선물이니까 그저 예쁘다. 정성스레 손수 만든 물건인 데다, 이 선물이 지닌 의미가 깊었으니…….
─ 신지호.
다급한 목소리가 끼어들었지만 이미 멀게만 들렸다.
지호는 눈을 깜박이며 이원을 보았다.
이원은 낯선 차림이었다. 특히나 그가 걸친 망토가 특이했다. 망토 끝자락이 바람에 흩날리는 모래처럼 작은 조각들이 흩어지며 부서진다. 결코 짧아지진 않은 채 길이를 유지했다. 실체하는 게 아닌, 농도 짙은 마력으로 만든 일종의 스킬이다.
그때 ‘이원’이 지호를 잡은 손에 힘을 더했다. 지호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아파…….”
“아프라고 잡은 거야.”
조금 전과 다르게 또렷이 들리는 목소리.
지호는 저도 모르게 눈을 깜박였다.
희뿌연 세상이 또렷이 보인다. 지호는 이원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가, 차근차근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채로운 식물이 자라난 커다란 창 너머로 햇살이 쏟아진다. 아낌없이 빛을 받는 방은 무척 넓었으나 휑할 정도로 간소했다. 방 안에 놓인 가구라고는 근처에 놓인 소파와 테이블 뿐. 테이블 위에 내어 둔 차가 모락모락 김을 뿜었다.
멍하니 주변을 바라보는 지호를 ‘이원’이 세게 붙들었다.
“듣고 있어? ■■.”
“어?”
‘이원’이 말하는 이름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가 어떤 이름을 말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마 제 이름을 불렀을 텐데… 이상한 일이었다. 제 이름인데도 뭘 부르는지 알 수 없다니.
“■■.”
‘이원’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지금 당장 지호의 멱살을 붙들 것처럼 분위기가 사나웠다. 지호는 애써 미소 지었다.
“말려도 이미 결정했어, ■■.”
분명 제 입으로 말했는데도 ‘이원’의 이름 역시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이상한 일이다. 하지만… 어찌됐든 눈앞의 존재는 주이원이 맞으니까.
지호의 의식이 서서히 옛 기억과 동화된다. 지호는 더 이상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해야 하는 일이야.”
“네가 할 일도 아니고, 해야 할 일도 아니야. 오히려 해서는 안 될 일이지.”
“■■…….”
“그 결정을 내리면서 나는 조금이라도 생각해 봤어?”
생각했다. 분명 반대하리라고. 이원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관리자’가 되는 삶을 꺼린다.
평온한 안식과 윤회의 길을 박탈당한 채, 자칫 잘못하면 이성 없는 괴물로 끝없이 죽임 당할지도 모르는 길. 가까운 지인이 그 길을 걷겠다고 하면 누구든 말리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아무리 제 연인이 말린다고 해도 ■■는 그만둘 수 없었다.
“나는 책임을 져야 해.”
“책임은 무슨 책임!”
“우리가 저지른 짓이야. 마땅히 책임을 져야지.”
대던전. 그 미증유의 재앙은 리크레스라고 불리는 종족의 탐욕에서 시작되었다.
리크레스는 모든 세계를 호령하던 종족이다. 리크레스는 누구보다 강력한 힘을 지녔음에도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 외에 모든 종족을 잡아먹고 우주의 패자가 되길 원했다.
그런 리크레스에게 유일하게 대항했던 게 이곳, 청의 행성이었다. 다종족으로 구성된 청의 행성은 리크레스에 끊임없이 저항했고, 결국 그들을 막는 데 성공했다.
거기에서 끝났다면 평범한 해피엔딩이 되었을 텐데.
리크레스는 패배를 용납하지 않았다. 그들은 패배하느니, 차라리 자신들을 불사르는 쪽을 택했다. 리크레스는 영과 육을 대가로 대던전이라는 재앙을 만들어 냈다.
지호는 그런 리크레스의 피가 반 섞여 있었다. 아버지는 리크레스에서 이단아로 불리다가 뛰쳐나왔다. 그와 근본이 같은 이들이 세상의 멸망을 불러온 것이다.
이원이 사나운 눈으로 으르렁거렸다.
“진작 연 끊고 나왔으면서 무슨 연대 책임을 느끼는 거야. 만약 책임을 져야 한다면 네 아버지로 충분해. 너는 여기서 태어났잖아?”
“아버지의 부담을 덜어드리고 싶어.”
아버지는 리크레스의 고위층이었다. 대던전을 만든 주동자 중에는 아버지가 아는 이들이 상당수였다.
“그럼 나는?”
원망 어린 목소리에 지호가 움찔했다. 그러나 이내 다잡고 고개를 저었다.
“……내가 당장 죽겠다는 것도 아니잖아.”
관리자의 삶이 시작되는 건 이 생이 끝난 뒤다. 하지만 이원이 그런 말로 납득할 리 없었다.
“네가 다음 생에 어떤 일을 겪을지 알면서 무시하고 즐거운 시간 보내자는 거야? 응?”
“그런 건… 아니야.”
지호는 힘겹게 이원의 시선을 피했다. 그가 뭐라고 추궁하듯 지호는 제 뜻을 꺾을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이원도 그걸 알았다. 동시에 자신이 지호에게 이긴 적 없으며, 이번에도 결국 그리 되리라는 것 또한.
하지만 이번만은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이원이 무언가를 단단히 결심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이원은 지호의 팔에 끼워 둔 팔찌를 뺐다. 그 가차 없는 손길에 지호는 처음으로 당황했다.
이건 이원이 제 손으로 지호에게 채워 준 약혼 예물이었으니까.
“파혼해.”
“뭐?”
“파혼하든가, 네 결정을 무르든가. 하나만 선택해.”
지호는 아연해졌다. 그가 파혼이라는 수를 쓸 줄은 짐작도 못했으니. 그도 그럴 게 어릴 적부터 서로 오랫동안 사랑해 온 사이 아닌가.
“돌려받고 싶으면 관리자 계약을 취소해.”
“■■…….”
“그렇게 쳐다봐도 안 돼. 취소해. 그렇지 않으면 널 두 번 다시 안 볼 테니까.”
통보한 이원은 지호가 붙잡을 새도 없이 성큼성큼 방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