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원류(2)
“그 녀석이 파혼하자고 했다고? 그럼…….”
“파혼 안 해요.”
지호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아버지는 지금이 기회란 듯이 입을 열었다. 뭐라고 할지 뻔해서, 지호는 아버지의 말을 잘라 버렸다. 단호한 얼굴의 지호를 힐끗 본 아버지가 피식 웃었다.
“이미 파혼당했잖아?”
“정식으로 파혼한 건 아니에요.”
지호는 발끈해서 아버지에게 쏘아붙였다. 압수하듯 예물을 가져가긴 했지만, 아직 정식으로 파혼한 건 아니었다. 아직은 ‘당장 그만두라’라는 으름장에 불과하리라.
하지만… 평소라면 농담으로도 꺼내지 않았을 수를 꺼냈다는 건, 이원 역시 쉽게 물러날 생각이 없다는 거겠지.
아버지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지호의 말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일에 집중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눈앞에서 수많은 빛이 반짝인다.
관리 시스템 프로젝트.
수많은 세계를 관측하며 대던전 방비용 시스템을 적용하고, 그곳의 지성체에게 잠든 힘을 끌어낸다.
집중 끝에 한숨 돌린 아버지가 지호를 돌아보았다.
“계속 고집부리다가 정말 파혼할지도 모르지. 그 녀석도 너 만큼이나 고집 세니까.”
“…….”
“■■을 좋아하잖아? 파혼당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그만두렴.”
“아버지.”
“그 녀석의 말이 옳아. 굳이 네가 그 길을 걸을 필요는 없어. 네 책임은 아니니까.”
“아버지 책임도 아니에요.”
지호의 아버지는 관리 시스템 프로젝트의 총책임자였다.
그에게 주어진 이명은 ‘멸망의 대적자’.
막중한 책임을 맡아 아버지는 쉴 시간도 없이 일했다. 거창한 그 이름이 일종의 족쇄라는 걸, 지호도 아버지도 모르진 않았다.
“제가 관리자가 되고 잘 풀리면 아버지도 좋잖아요.”
“나는 네 안전을 담보로 일에서 해방되고 싶진 않아.”
“저 말고 다른 이들에게도 좋겠죠. 앞으로 대던전을 맞을 세계들이나.”
수천, 수만 개의 세상을 먹어 치운 후에도 대던전은 탐식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청의 행성은 대던전을 궤멸시킬 전력이 없었다.
대던전은 난공불락의 요새.
그들이 할 수 있었던 건 예방뿐이었다. 대던전이 출현하기 전의 세계에 시스템을 적용하고, 대던전이 세계에 완전히 모습을 드러낼 수 없도록 방어하고, 그 세계의 주민에게 숨겨진 능력을 각성시킨다. 그리하여 맞서 싸울 준비를 한다.
달리 말하자면 거기까지밖에 할 수 없었다. 이쪽에서 지나치게 개입하면 힘의 균형이 깨져서 대던전의 침입을 허용하게 되니까.
“완전히 끝내려면 지금 이 상태로는 안 돼요.”
“…….”
“제가 나서는 게 제일 쉬워요.”
이쪽에서는 개입할 수 없다. 하지만 그 행성의 주민으로 태어난 관리자라면 더욱 깊은 개입이 가능했다.
게다가 지호는 멸망의 대적자의 아들이며, 리크레스의 핏줄이다. 환생한다고 해도 관리자는 전생의 특징을 일부 이어받는 데다, 가장 중요한 혼은 그대로다.
누구보다 시스템을 확실히 이해하고 있으며, 대던전에도 접근하기 수월하다. 그러니 리크레스가 만든 대 멸망 시스템, 대던전을 무너트리는 열쇠가 될 수 있었다.
“그러니 아버지, 제가 해야 해요. 어머니의 복수를 위해서라도.”
“■■. 네 어머니는…….”
“복수를 원하시지 않겠죠. 복수는 산 사람의 것이니까.”
저를 말리려는 아버지의 말을 지호가 단호하게 거부했다.
“복수가 주된 이유는 아니에요. 말씀드렸듯이 이건 필요한 일이잖아요. 제가 관리자의 계약을 맺을 이유는 차고 넘치죠.”
“실패한다면…….”
“왜 실패할 거라고 생각하세요?”
“그들이 너를 막으려들 테니까.”
대던전은 지호를 인식하고 있다. 그를 방해하려들지 않을 리 없었다. 그리고 대던전을 막아 내지 못한 관리자의 말로는 비참하다.
그래도 이번 생에서는 나름 행복하게 살다 갈 것 아닌가. 모든 혼은 윤회한다. 관리자가 되지 않는다고 해서 다음 생이 행복하리란 보장은 없었다.
“이번만은 그 녀석을 응원하는 수밖에 없겠구나.”
아버지가 깊이 한숨 쉬었다. 이원처럼 극렬히 반대하진 않지만 역시 내키지 않는 듯. 지호는 무척 못마땅해 보이는 아버지를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를 왜 그렇게 싫어하시는 거예요?”
“그놈은… 너를 너무 좋아해.”
“……좋은 거 아니에요?”
아버지가 지호를 돌아보았다. 늘 아들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아버지다. 하지만 이원의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아버지는 지호가 희대의 사기꾼에게 당해 전재산을 말아먹고 인생을 저당 잡힌 불쌍한 피해자인 양 굴었다.
“■■은 좋은 애예요. 저를 무척 좋아해 주고요.”
“그래, 널 좋아하긴 하지. 너무 집요해서 문제일 뿐.”
“집요한 건 아닌데.”
“집요하다 못해 음습해.”
“……욕하지 마세요.”
지호는 발끈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질투가 좀 심하긴 해도 귀엽기만 한데 무슨 말인가?
물론 지호가 엮이면 이원이 종종 극단적인 짓을 저지르곤 하지만… 이번의 파혼 통보도 좀 심하긴 했지만…….
아버지의 말처럼 극단적이고 집요하고 음습한 애는 아니었다.
어차피 제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들을 아들을 설득하는 걸 포기하고, 멸망의 대적자는 손을 까딱였다.
“됐고, 온 김에 일이나 돕고 가렴.”
“■■에게 가는 걸 막으려는 건 아니죠?”
“겸사겸사. 일손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니.”
지호는 아버지에게 눈을 흘겼다.
기가 찼지만 더 말하지 않고 옆에 앉으려던 그때.
이원에게서 오랜만에 연락이 왔다. 지호는 아버지에게 눈짓으로 알리고는 곧장 방을 빠져나와 연락을 받았다.
잔뜩 화난 이원의 얼굴이 눈앞에 떠오른다.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무슨 짓이냐니?”
“네가 관리자의 계약을 맺었단 사실이 유출됐어. 네가 한 짓 아냐?”
“……내가 뭐하러 그런 짓을 해?”
지호는 멸망의 대적자의 아들이자, 대던전에 투신하지 않은 단 둘뿐인 리크레스 중 하나다. 그런 그가 관리자의 계약을 맺는다면 엄청난 뉴스가 될 터.
지호는 죽어서의 일이니 별것 아닌 것처럼 일축했지만, 많은 사람이 이원처럼 이번 생의 연장선상으로 생각했다. 관리자가 되길 바라는 이들은 영웅으로 추앙받고, 그들의 죽음 이후는 숭고한 희생으로 불린다.
“정말 내가 한 거 아냐. 언론에 퍼진 거야?”
“일단 막았어.”
이원의 집안은 전쟁 영웅이었으며 이원 또한 행성에서 가장 강력한 마법사 중 하나였다. 그라면 충분히 여론을 막을 수 있다. 하지만 영원한 비밀은 없었다.
“■■, 결정을 철회해. 사흘 정도는 막을 수 있을 거야. 그 전까지 고민할 시간을 줄게.”
“…….”
사흘 고민한다고 바뀔 결정이었으면 애초에 마음먹지도 않았다. 원래대로라면 이쯤 해서 이원이 져줬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만은 이원도 강경했다.
“사흘 후에도 네 생각이 변하지 않는다면…….”
“……변하지 않으면?”
“말했지? 파혼할 거라고. 그리고 파혼하면 너랑은 영영 끝이야, ■■. 두 번 다시 네 얼굴 따위 안 봐.”
“……진심이야?”
설마 그렇게까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바라보는 지호를 이원이 외면하지도 않고 쏘아보았다.
“그래. 다른 곳으로 발령받아 멀리 떠날 거야.”
“■■…….”
“넌 내 말을 들을 생각이 없잖아. 내 가장 간절한 부탁조차 무시하잖아. 심지어 이런 중요한 결정을 나와 상의도 하지 않고 통보했잖아. 뭘 믿고 너와 결혼하겠어?”
“…….”
믿기지 않을 만큼 서늘한 태도였다. 지호가 상처받았음에도 이원은 더욱 차갑게 굴었다.
“지금이라도 없었던 일로 해. 그러면 지금 했던 말 모두 사과하고 원래대로 돌아갈 테니까.”
“……■■, 보고 싶어.”
지호가 어리광부리듯 건넨 말에 이원이 숨을 삼켰다. 그러나 이내 날카로운 눈빛으로 지호를 쏘아보았다.
“날 보고 싶은 게 사실이라면 계약을 그만둬.”
일방적으로 연락이 끊어졌다.
잠시 망연자실하게 서 있던 지호는 아버지의 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묻고 싶은 게 많아 보이는 아버지를 무시한 채, 그의 일을 돕기 시작했다.
시스템의 빛이 반짝이며 수많은 세상을 잇고, 비춘다.
마치 신처럼 지호는 시스템에 연계된 세상을 관찰했다. 물론 지호는 신이 아니다. 그들보다 조금 먼저 태어나, 많은 시간 덕에 앞서 나간 문명의 혜택을 받고 있을 뿐.
새로운 세계의 주민들은 단지 아직 어리고 약하다는 이유로 대던전에 의해 멸망한다. 점점 크기를 부풀리는 대던전이 스스로 소멸할 리는 없었다.
누군가가 끝내야 한다.
지금 당장 이원의 곁으로 떠나고 싶지만, 그렇다고 눈에 보이는 풍경을 외면할 수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