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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사냥(5) (269/283)

41. 사냥(5)

한편 양호진은 이지영과 함께 있었다.

조금이라도 더 정보를 캐내기 위해 지금껏 혹사당한 이지영은 몹시 지쳐 의식을 잃은 채였다. 게다가 그동안 몸을 유지하던 술법이 풀려, 젊었던 육체가 노화해 더더욱 지쳐 보였다.

도주를 염려해 약물과 스킬로 의식을 앗아 둔 꼴을 보며 호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양호진의 하얀 손끝이 이지영에게로 향한다. 그는 소중한 아이를 대하듯, 땀에 젖은 지영의 머리칼을 손수 넘겼다.

“네가 그 정도로 못된 아이는 아니었잖니…….”

기껏 이지영의 머릿속을 헤집은 결과는 거물을 사로잡은 것 치고는 초라했다. 이지영이 선을 넘기 시작한 건 녹스와 접촉한 이후였다. 녹스는 대던전을 만든 자들, 리크레스를 이 세상에 끌어들였다.

부를 수 있던 건 비록 정신체뿐이라고 해도 과거, 수많은 종족을 멸족시키고, 대던전을 통해 온갖 세계를 멸망으로 이끄는 자들이었다.

지구에서 리크레스는 만나는 사람마다 죄다 정신을 오염시켰다. 녹스를 포함해 모두를.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죄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이지영의 기억 속에서 본 인간 중 최남솔 같은 부류는 리크레스의 영향을 조금도 받지 않았다.

리크레스가 영향을 끼치는 건 마음속에 이미 심연이 자리 잡은 자. 악이라고 규정될 만한 자들이었다. 그렇게 리크레스에게 감화된 이들은 조금씩 선을 넘었고, 더욱 걷잡을 수 없는 길로 향했다.

지영은 용서받을 수 없지만, 그녀의 스승인 호진은 안타까웠다. 진작 알았더라면 이 지경이 되는 건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싶어서.

그때 이지영이 괴로운 듯 신음을 흘렸다.

“아, 윽…….”

“지영아.”

“스승님. 도망쳐요. 대던전이…….”

“네가 부른 거잖니?”

차디찬 반응에 지영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아래로 떨어졌다.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이런 결과만… 나온 거라…….”

이지영이 작게 기침했다.

“괜한 짓을 했나… 싶어요.”

“당연히 괜한 짓이지. 지금 그걸 말이라고…….”

인상을 찌푸린 호진에게 지영은 다 갈라져 쉰 목소리로 웃었다.

“후, 흐흐… 적어도 스승님을… 손에 넣었으면… 덜 후회했을, 텐데…….”

호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반성을 다 못 하긴 했지만, 이전에는 거침없이 저질렀을 짓을 후회하는 건… 리크레스의 영향력이 낮아졌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그들이 지영에게서 손을 뗀 이유는 그만큼 계획의 완성이 가까워졌다는 거겠지.

“바보 같구나. 이제 와서?”

“스승님…….”

“눈물은 널 위해서가 아니라, 네게 희생당한 사람을 향해서 흘려야지.”

지영은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이내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천천히 눈을 감았다. 곧 꺼질 듯, 그러나 아직은 느리게나마 숨이 이어진다.

호진은 혀를 찼다.

이대로 두어도 이지영은 죽는다. 하지만 그렇게 평온한 죽음이 이지영에게 어울릴지, 호진은 생각해 볼 수밖에 없었다.

어울리지 않는다. 그녀에게 평화로운 안식은 사치였다.

그렇다면 최소한 괴롭게 죽이는 편이, 또는 그녀가 유일하게 사랑하는 사람의 손에 살해당하는 편이 괴롭지 않을까.

그리 생각하며 호진은 손을 뻗었다. 비쩍 마른 목은 호진의 한 손에 가볍게 쥐여졌다. 얇은 피부 아래 느껴지는 느릿한 맥박.

“…….”

“관둬라, 야. 평생 찝찝할 일 있냐.”

천천히 호진의 손이 지영의 목에서 떨어져 나왔다. 호진은 평소와 같은 얼굴로 강태주를 돌아보았다.

“하여간 노친네, 구석에 처박아 두면 혼자 궁상을 떨어요.”

“…….”

“괜찮냐?”

“괜찮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쯧, 태주가 혀를 차며 다가왔다. 그리고 뭐라고 말하려던 순간, 입을 다물었다. 그의 시선은 허공을 향해 꽂혀 있었다.

“느긋하게 감상에 빠질 여유도 없구나.”

한숨 쉰 호진 역시 눈앞에 뜬 창을 응시하고 있었다.

information

레비아탄이 부산 인근 해상에서 모습을 드러냄.

information

몹시 공격적. 즉시 대피할 것.

* * *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세포가 혹사당했다. 푹 젖었던 빨래를 물 한 방울도 안 나올 때까지 쥐어짠 것처럼. 황혜림의 마력은 바닥까지 긁혔고 생명력마저 사용됐다.

덕분에 그녀는 자신의 한계를 넘었다. 태평양 한가운데에서 원래 있던 동해까지 공간 이동한 것이다.

“흐억, 헉…….”

차라리 죽고 싶을 만큼 괴로웠으나, 그녀를 억지로 쥐어짜 낸 상대는 여전히 혜림을 놔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 상대. 레비아탄은 혜림을 입에 느슨히 문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 먼 곳은 하찮은 인간으로 가득했다. 레비아탄은 웃었다. 그의 웃음에 바다가 떨리며 거대한 파도를 만들어 냈다.

여기서 본신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그 여파로 저 도시의 인간 절반은 죽을 것이다. 아니, 그냥 이곳에서 죽어 버린다면… 대던전의 강림으로 싸그리 몰살당하겠지.

레비아탄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 그깟 게 퇴물 취급할 정도로 약해지진 않았는데.

레비아탄을 발끈하게 만든 건 황룡의 존재였다. 오랜 시간 서로를 인지한 만큼, 무시당한 건 참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일을 어그러트릴 만한 분노는 아니다. 어차피 일은 궤도에 올랐고, 곧 그의 몸을 대가로 대던전이 소환될 테니까.

다만 죽음 이전에 약간의 여흥을 즐길 수는 있겠지.

분명 죽어가고 있었는데 지금은 의식이 반짝 돌아왔다. 초가 꺼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환하게 빛을 밝히는 것처럼, 그 역시 최후의 여력을 짜내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 귀빈에게 귀빈의 대우를 해 줘야겠지.

레비아탄의 눈동자가 스르르 움직였다. 그곳에는 잔뜩 굳은 얼굴로 허공에 뜬 주이원과 신지호의 모습이 보였다.

레비아탄은 그중 신지호를 빤히 응시했다.

─ 나는 너를 갖고 싶었지.

“우리 자기는 왜 이렇게 이상한 놈들에게 인기가 많지?”

─ 네 운명을 조금이나마 훔쳐서, 나는 너를 조금이나마 가졌다.

천희성 그리고 박정림.

박정림은 평범한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술법을 써서 신지호의 운명을 훔쳤다. 짐작은 했지만 역시, 레비아탄의 술수였다.

─ 내 생각 이상으로 굉장한 영혼이더군……. 그래, 그들이 너를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이 세계를 점찍을 만큼 말이지.

“지호야.”

이원이 황급히 지호를 불렀다. 그러나 이원의 부름은 한발 늦었다.

이미 지호의 눈앞에는 새카만 어둠이 펼쳐져 있었으니까.

“…….”

그리고 서서히 어둠이 걷어진 자리에 보인 것은, 현재의 지호가 있는 지구가 아니었다.

이미 흘러간 과거, 지호의 전생.

그때 보다 만 편린이 다시금 눈앞에 펼쳐졌다.

평범한 과거가 보였다면 좋으련만. 하필이면 지호는 과거를 확인하자마자 창자가 끊어질 듯한 통증을 느꼈다.

힘없이 고개를 떨구니 그곳에는 손 두어 마디는 될 법한 너비의 두꺼운 칼이 꽂혀 있었다.

평범한 날붙이가 그에게 이만한 통증을 가져올 리 없다. 검이 찔린 부분은 마치 노이즈가 발생한 것처럼 부서지고 일그러지는 환영이 발생했다. 줄줄 흐르는 피보다 그쪽이 더 심각했다.

꿈속의 지호는 망연자실하게 상대를 바라보았다.

하필이면 경호원이 없는 날. 작정을 한 테러범과 맞닥뜨릴 줄이야…….

평소라면 어떻게든 대처할 수 있었을 텐데. 잠깐 딴짓하고 있던 게 패인이었다.

상대가 벌벌 떨리는 손으로 칼을 뽑았다. 미처 말릴 틈도 없었다. ■■는 낮게 아, 하고 신음했다. 차라리 막혀 있을 때가 나은데. 뚫린 상처로 피가 콸콸 쏟아지며 노이즈 또한 넓게 번졌다.

남자는 검을 든 채 마치 자신이 찔린 양 벌벌 떨며, 붉게 물든 눈으로 지호를 노려보았다.

“저, 정말 관리자가 될 겁니까?”

“……네. 물론, 이에요.”

“그, 그럼 지금 당장 죽어.”

관리자가 되려면 먼저 죽어야 하니까.

“리크레스 주제에…….”

“…….”

리크레스에게 소중한 사람이라도 잃은 걸까. 몇몇 사람들은 아버지가 리크레스고 ■■가 리크레스의 피를 이었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을 증오했다.

■■는 그들을 이해했다.

그들 모두 원망할 대상이 필요할 뿐이다. 저 남자라고 ■■를 죽이고 싶었겠는가. 그저 증오에 몸을 맡긴 채 누구에게라도 토해 내고 싶었을 뿐이겠지.

다만 원통한 한 가지는…….

‘아니, 왜 원통한 게 한 가지야?’

가만히 보고 있던 지호의 의식이 끼어들었다.

막말로 저쪽이 미친 살인마 아닌가. 멀쩡한 사람을 찌르고 말도 안 되는 변명이나 지껄이는. 그걸 죽어가면서도 이해한다고 말하는 전생의 자신은… 그냥 좀 미친놈 같았다. 아니, 미친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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