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멸망(8)
이원이 든 [클라우 솔라스]가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그러더니 정말 검에서 피가 흐르는 것처럼, 붉은 빛의 물이 아래로 뚝뚝 흘러내린다. 그리고 작은 원을 그리는가 싶던 물은 순식간에 번져 나갔다. 테네브가 있는 곳까지.
테네브는 인상을 찌푸리며 아슬아슬한 차이로 몸을 피했다. 그러자 테네브가 있던 자리에 물이 솟구쳤다가 아래로 다시 무너져 내렸다.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 붉은 물을 노려보던 테네브가 이를 악물었다.
“이 더러운…….”
“네가 할 말인가?”
이건 최근 이원이 몬스터를 죽이고 또 죽여서 흡수한 마력의 실체화다.
몬스터의 마력은 이미 대던전에 오염됐다. 그걸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한 소화는 시간이 걸린다.
억지로 넘치는 힘을 소화하려 애쓰는 대신, 이원은 제 색으로 물들여 공간에 풀어냈다.
피가 연상될 수밖에 없는 새빨간 액체는 주이원을 향한 원망이 가득했다. 넘실대는 원한은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사용자를 물어뜯을 듯 흉포한 기세였다. 그러나 이원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군.”
그 말대로, 한창 암살이 시도되던 이플리스에서는 자주 쓰던 방법이었다. 암살자의 마력을 먹고 또 다른 암살자를 공격하는 것. 이 스킬을 본 사람은 살려 두지 않았기에 아는 사람이 극히 적었다.
“관리자는 알고 있나?”
알 리가. 지호 앞에서는 일부러 쓰지 않는 스킬이다. 굳이 이런 방법을 쓸 정도로 마력이 모자라진 않았던 데다, 괜히 지호에게 들켰다가 그 심약하고 착한 애가 온갖 걱정을 다 하지 않겠나.
이원은 피식 웃었다. 천여 년 전의 테네브는 이렇게 말 많은 놈이 아니었다. 자꾸 신경 거슬리는 말을 꺼내는 이유야 뻔하다.
조금이라도 동요시키려는 거겠지.
“됐으니까 덤벼.”
하지만 지호도 아니고 별 거 아닌 놈의 말 따위, 이원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원한을 지녔다고 해도 서로 마주한 시간은 아주 짧다. 해후에 나눌 말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 이원은 곧장 [클라우 솔라스]를 휘둘렀다.
쏴아아아아…….
바닥에 가득 찬 붉은 물은 검의 끝이 향하는 곳을 따라 세찬 파도처럼 밀려갔다. 테네브가 손을 휘둘러 격랑을 갈라냈다. 하지만 그 뒤에는 빛살처럼 쏘아 낸 이원의 검이 곧장 테네브를 노렸다.
“큭!”
테네브가 신음하는 것과 동시에 그를 감싸듯 거대한 방패가 나타났다.
아무리 기습을 한다 해도, 대던전 안의 마력은 테네브를 따른다. 테네브는 수호신이라기에는 이질적인, 대던전에 넘어가 변절한 존재였으니까. 말하자면 홈그라운드. 이곳은 지구보다 테네브에게 유리한 장소였다.
하지만 이원도 그런 테네브보다 약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신지호가 자신의 마력을 모두 털어 이원을 강화해 주고 갔으니까.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닌 지호의 힘이다. 함께하는 감각이 있는 한, 이원은 누구에게도 질 것 같지 않았다.
카가가각…….
이원이 쏘아 날린 [클라우 솔라스]와 테네브의 방패가 첨예하게 대립한다. 조금씩 밀리기 시작한 건 테네브였다. 쩌적, 쩍, 방패에서 조금씩 갈라지는 소리가 난다.
쨍!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테네브가 만든 마법이 무너졌다. 테네브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경악으로 커졌다.
테네브는 급히 검으로부터 몸을 피했다. 그러나 빛의 검은 세찬 기세로 테네브를 찌르는 대신 가볍게 흔들렸을 뿐.
진짜 공격은 테네브의 아래에서 오는 뾰족한 붉은 송곳이었다. 애초에 [클라우 솔라스]는 허수. 테네브가 어디로 움직일지 예측하고 동시에 움직였기에 피할 수 없었다.
“커헉…….”
검이 테네브를 꿰뚫었다. 붉은 물 위로 테네브의 피가 후드득 떨어졌다.
이원이 테네브의 마력을 음미하듯 입술을 핥았다. 싸우며 상대가 잃은 마력조차 이원의 것이 된다.
그러나 배가 뚫렸음에도 테네브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회를 잡았다는 듯이 눈을 빛냈다.
“어리석은 놈.”
“한 번 뒈진 새끼가 말이 많네.”
“후회하게 될 것이다.”
서늘하게 내려앉는 테네브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테네브의 마력이 이원의 몸 안에서 주인의 명에 반응했다. 새카맣게 실체화한 마력이 이원의 혈관을 타고 몸 전체로 번진다.
이원은 잠시 제 몸을 보다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마력이 몸 전체로 번지기 전에 몸을 돌렸다. 그러나 마력이 전신을 파고드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테네브는 시간 끌지 않고 곧장 거대한 얼음창을 만들어 이원에게 날렸다. 휘청거리는 이원은 눈을 크게 뜬 채 날아드는 공격을 바라보았다.
콰득.
무언가가 살벌하게 뭉개지는 소리와 함께 붉은 물이 위로 치솟았다. 피를 닮은 액체 때문에 죽은 건지 산 건지 알 수 없었다. 테네브는 지체하지 않고 수없이 많은 창을 이원의 머리 위로 만들어 냈다. 그리고.
푹.
아주 작은 소리가 무언가를 관통했다.
붉은 물이 테네브가 방심한 사이, 가시처럼 변해 바닥에서 솟아올랐다. 그것들은 무척 얇았지만 확실하게 테네브의 몸을 관통했다.
바늘꽂이처럼 수많은 가시에 꽂힌 테네브의 몸이 휘청거렸다. 그러나 다리가 풀렸는데도 쓰러지지 않을 만큼, 수많은 가시가 그를 고정했다.
“분명 저주를…….”
경악한 테네브에게 이원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테네브의 혼탁한 마력 따위가 신지호의 정순한 마력을 이겨 낼 수 있을 리 없다. 모든 수호신보다 더 시스템을 파악하게 된 지호는 만에 하나를 대비해 저주 따위가 침투할 수 없도록 축언을 건네고 갔다.
‘신의 저주가 걱정되니까, 조심해. 아마 괜찮겠지만.’
‘왜?’
‘[별의 축언] 걸어 뒀잖아. 강화뿐만 아니라… 저주나 오염을 막는 데도 도움이 될 거야.’
나, 제법 세졌거든. 뿌듯한 듯이 웃던 지호를 믿고, 이원은 전투를 빨리 끝내기 위해 몸을 던져 보았다. 상대를 죽였다고 생각했을 때, 가장 방심하게 된 순간이 가장 공격하기 좋은 때니까. 그리고 테네브는 예상대로 긴장이 풀어졌다.
물론 이원은 테네브와 달리 방심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강자였던 그와 달리, 이원은 도전자에서 시작했으니까.
“자, 그럼 어디.”
잠시 힘을 잃었던 [클라우 솔라스]가 테네브의 몸을 꿰뚫었다. 피를 쏟는 상대를 보며 이원은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사냥을 끝내 볼까?”
바닥에 깔린 붉은 물에서 풍기는 희미한 피비린내를 지울 만한 바다 내음이 풍겼다. 이원의 뒤로 불려 온 것은 그가 아는 가장 깊고 거대한 바다였다.
주이원과 늘 함께 하는 이플리스의 일부. 이플리스의 바다였다.
이플리스의 바다는 테네브의 앞에서 사납게 요동쳤다. 저를 멸망시키려 한 존재라는 걸 아는 듯이.
손 쓸 새 없이 거대한 해일이 테네브를 휩쓸었다. 깊은 심해를 그대로 떼다 온 스킬은 공간을 그대로 재현했다. 심해의 무시무시한 수압까지도.
테네브가 조금 더 멀쩡했다면 어떻게든 대응할 수 있었겠지만, 연이은 공격에 그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 사이 이원은 [클라우 솔라스]를 회수해 그에게 저벅저벅 걸어갔다. 이원이 가는 길마다 바다가 갈라지더니, 테네브의 앞에 이르렀을 때 완전히 사라졌다.
푸욱.
이원의 검이 테네브의 정수리에서부터 아래로 내려꽂히듯 박혔다. 하지만 이 정도로 신이 죽으리라 장담할 수 없다. 검을 거둬 확실하게 목을 친 순간.
테네브의 몸이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이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신이 현현하기 위해서는 제물이나 강력한 마력이 필요하다. 즉, 이건…….
필시 계약자와의 연결이 끊어진 것이다.
“손 쓸 필요도 없었군.”
─ 주이원!
“…….”
─ 나는 돌아올 것이다.
이원은 테네브의 말을 제대로 듣지도 않고 몸을 돌렸다.
패자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죽음을 장식해 줄 필요는 없다. 게다가 이미 끝난 놈을 상대하느니 빨리 지호를 만나러 가는 게 나았다.
─ 나를 무시하는 거냐!? 너는…….
이원은 성난 목소리에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지호를 찾기 위해 걸음을 옮길 뿐. 테네브의 성난, 그러나 어딘지 처량한 외침은 근처에서만 울리다가 이내 완전히 끊겨 버렸다.
이원이 빠르게 움직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용맹하게 서 있는 작은 고양이를 찾았다.
서리는 피투성이였다. 모두 자신의 피는 아니지만 군데군데 커다란 상처가 눈에 띄었다. 하지만 서리는 승자답게 위풍당당히 서 있었다.
“꽝이네.”
찾으려던 건 지호인데 애먼 고양이가 나왔다. 짜증을 내면서도 이원은 포션을 꺼냈다. 지호가 이 고양이를 무척 아끼고 있으니까, 예비 배우자의 펫을 돌보는 것 또한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값비싼 포션을 들이붓자 서리가 기겁했다. 그리고 포션이 스며들어 상처가 낫는 걸 확인한 후에 질색하며 몸을 털었다. 그리고 젖은 게 싫은지 황급히 그루밍하기 시작했다.
태평한 꼴을 무시한 채 이원은 녹스를 확인했다. 그는 서리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게 다쳤다.
테네브는 상대할 가치도 없었지만 이놈에게는 원한이 있었다. 이원은 쓰러져 죽어 가는 녹스에게 다가갔다.
놈의 상태는 치료하기 전의 서리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 아직 숨이 붙어 있는 건 녹스가 변칙적인 존재이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그나마도 한계가 가까워졌다. 굳이 손을 쓸 필요도 없을 만큼.
“주, 이원…….”
“손경현.”
오랫동안 알아온 이름을 부르자 손경현이 씩 웃었다.
그의 정체성은 녹스이지만, 주이원을 대할 때는 늘 손경현이었다. 손경현에게 주이원은 늘 라이벌이었다. 물론 상대도 안 되긴 했다. 정작 마음을 얻고 싶은 상대는 경현을 친구로만 봤으니.
비참한 처지가 되어서도 경현은 퍽 들떠 보였다. 그는 씨익 입이 찢어질 것처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지호는 내가 데려갈 거야.”
“헛소리.”
“너는 못 느끼지? 이미 죽어 가고 있는…….”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녹스의 머리가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