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소꿉친구 지키기 프로젝트-1화 (1/52)

#1

“어머, 저, 정연아! 피!!”

젠장할.

“흐으, 흐어엉, 여나 죽찌 마아….”

이런 빌어먹을.

바닥에 쓰러진 작은 아이의 주위를 빙 둘러싼 해바라기 반 다섯 살 친구들이 일제히 와앙, 울음을 터뜨린다. 노랗고 예쁜 해바라기가 그려진 앞치마를 맨 선생님이 경악한 얼굴로 이쪽을 향해 달려온다.

반절은 희극이고 반은 비극인 이 상황의 주인공인 다섯 살짜리 아이, 정연은 울기는커녕 피가 터진 이마를 감쌀 생각조차 하지 않고 뒤로 발라당 누운 채 유치원 천장의 아기 천사만 죽어라 노려봤다.

대한민국 햇님 유치원 해바라기 반 5살 남아 한정연. 유치원 체조 시간에 방정을 떨다 창틀에 부딪혀 이마를 제물로 바치고 전생의 기억을 소환하다. 길기만 하고 영양가는 없는 끔찍하게 구린 라이트노벨 제목 같다, 젠장할.

정연은 눈알까지 툭툭 흘러내리는 핏물에도 개의치 않고 속으로 쌍욕을 중얼거렸다. 사방팔방 서라운드로 들려오는 아이들의 통곡과 붉게 아른아른한 시야 사이로 눈물을 팡팡 쏟는, 눈물범벅에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마저도 예쁘기 그지없는 5년 지기 소꿉친구 한준을 애써 외면하려 아기 천사의 날개 깃털 수를 세면서.

그 와중에, 한준이 아기천사보다 더 예뻐서, 정연은 속으로 한 번 더 젠장할, 하고 욕설을 중얼거리고는 눈을 감아 버렸다.

***

정연은 노잼이라는 단어를 사람 모양으로 빚으면 네가 될 거라는 농담을 매일같이 듣고 사는 남자였다. 적당한 대학을 나와 금융업에 종사하며 똑같은 정장을 열 몇 벌 사서 유니폼처럼 입고 다니는, 장점이라고는 군 면제로 남들보다 조금 이르게 자리를 잡은 것뿐인 키가 늘씬하게 크고 말수가 적은 재미없는 남자.

업무로 사용하는 때를 제외하면 휴대 전화는 휴대용 벽돌로, 컴퓨터는 잘못 건드리면 고장 나는 대왕 벽돌 정도로 여기는 것만 같던 정연이 게임을 시작하게 된 것은 그야말로 우연이었다.

휴일에 아무것도 안 하고 잠만 잔다는 제 말에 아래 직원이 자신이 하는 게임을 추천했다. 취미 하나 있으면 좋잖아요, 하며 굵은 목소리로 중얼거리곤 머쓱하게 웃는 얼굴에 정연은 마뜩잖아하면서도 핑크색 일색의 게임 시디를 받아 들었다.

누가 디자인했는지 ‘두근두근’과 ‘하트’라는 단어가 남발된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 일명 미연시에 떫은 표정을 짓던 정연은 그날 낡아빠진 노트북으로 게임의 엔딩을 보느라 밤을 새웠고 아주 조금 울었다. 돈 관련된 일이 아니면 관심이 발가락 때만큼도 없던 정연의 역사를 새로이 개척하게 된 날이었다.

밥 먹고 일하고, 자기 전에 일하고, 출근하기 전에 일하고, 휴일에 일하던 일상은 떠나가고 밥 먹고 게임하고, 자기 전에 게임하고, 출근하기 전에 게임하고, 휴일에 게임하는 일상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27살, 정연은 고른 발음과 낮은 목소리, 우스울 정도로 건조하기 짝이 없는 리액션 탓에 그렇게 유명하진 않아도 나름대로 팬층은 있는 게임 실황러가 되어 있었다. 연애 경험이라고는 없던 정연 혼자서는 도저히 공략 캐릭터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가 없어 시작했던 실황인데 이젠 혼자서도 척척, 공략 캐릭터들 마음속 연애 사정이라면 눈 감고도 달달 외울 수 있었다.

그렇게 안 깬 게임보다 깬 게임이 많은지라 슬슬 할 게임이 없을 즈음, 한 팬이 게임 하나를 추천했다. 정연과 이름이 같은 공략 대상이 나온다면서.

이상성 프로토콜 ~두근두근 학교생활~. BL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 19금. 다양한 루트와 화려한 일러스트.

어떤 게임이든 빠지지 않고 나오는 수식어들에 별생각 없이 게임을 켜던 당시, 솔직히 정연은 패키지의 19금 딱지가 선정적이라 붙은 줄 알았다. 일러스트가 제법 취향인 탓에 나름 기대도 했다.

다만 그 기대와 예상은 딱 반만 충족되었는데, 그 이유를 단적으로 설명하자면 그렇고 그런 장면에서 등장인물이 반절 - 혹은 일부 - 만 나온 탓이었다. 일러스트가 반절만 나왔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정말 물리적으로 반절만 나왔다. 주로 주인공이 그랬고 때로는 주인공의 불운한 엑스트라 친구가, 때로는 선택하지 않은 루트의 공략 캐릭터들이 그런 길로틴 엔딩을 맞고는 했다. 가로로 반이었는지 세로로 반이었는지는 떠올리고 싶지 않으니 묻지 말자.

일명 고어물이라고도 하고 치명적인 유해물이라고도 하며 멘붕물이라고도 하는 이 게임에서는 어느 루트를 타도 주인공은 고통받고 누군가는 죽었다. 가끔 주인공도 죽고. 공략 대상들은 왜인지 사랑에 빠졌다면서 주인공을 박박 갈구고 또 갈궜다. 배드 루트도 데드 루트도 아닌 진엔딩 루트에서.

열나게 머리 굴려 가며 꼬셔서는 구르고 맞고 범해지고 배신당하며 죽는 주인공을 보면서 정연은 사랑은 개뿔, 철천지 원수지간이라도 저런 짓은 안 할 거라 생각했다. 다만 얀데레니 뭐니 하면서 채팅창의 사람들은 꽤 좋아해서, 정연은 세상은 넓고 취향은 다양하다는 말을 진심으로 실감했다.

그 와중에 일러스트는 정말로 예쁘고, 순하며 귀여운 얼굴의 주인공은 정연의 취향이라 기분이 두 배쯤 묘했다. 순애였다면 좋았을 텐데.

정연은 약 스무 시간의 플레이 타임 동안 캡처 한 번 하지 않고 착잡한 마음으로 게임의 모든 루트를 깨고 일러스트를 수집한 다음 해피 엔딩이 단 하나도 없음을 확인하고 깔끔하게 게임을 삭제했다. ‘고통받는 준 군을 이제 평화로운 곳으로 보내 줍시다. 수고했어요, 준 군.’ 하는 성마른 멘트를 치면서.

그리고 그 뒤로 정연에게는 게임은 설명을 꼼꼼히 읽어 보고 시작하는 습관이 생겼고, 시청자는 정연의 신뢰를 조금 잃었다.

그게 사월 일이었던가, 여하튼 잘 잊고 살고 있었는데.

죽었다 깨어나니 평화로운 곳으로 보냈던 준 군, 한준이 다섯 살이 되어 제 옆에 있었다. 정연은 공략 인물이라고 쓰고 미친놈이라 읽는 것들 중 하나, 그와 이름이 같다던 소꿉친구 한정연이 되었다. 그야말로 미친 일이었다.

정연은 이마에 대빵만 하게 붙은 거즈를 한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파란 새 대가리, 아니 펭귄 대가리가 그려진 포크에 꽂힌 고기 조각을 소스에 데굴데굴 굴렸다. 기억이 없는 말간 네 살일 때야 ‘엄마 아빠 한준이 우주 별 하늘’보다도 좋아하던 햄버그였지만 지금은 입맛이 영 없었다.

입 안에 들어가는 대신 접시에서 한껏 뭉개지는 햄버그에 한준이 옆에서 흘긋흘긋 제 눈치를 보다, 많이 아파? 하고 조심스러운 질문을 던진다. 곧 울 기세인 얼굴을 살피며 괜찮다고 중얼거려도 몇 번을 힐끔거리더니, 또 금방 안심했는지 부지런히 제 수저를 놀린다.

이마가 성대하게 깨진 정연이 성형외과에 가서 상처를 꿰매는 내내 수술실 밖에서 앙앙 울어댔던 한준의 눈가고 코끝이 가릴 것 없이 발갛게 물들어 있다. 막상 다친 정연은 울지도 않는데 한준은 정연이 곧 죽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대성통곡을 다 했다.

머쓱해진 정연이 수술실 문에 대고 네가 울어서 더 아픈 것 같다고 외치고서야 히끅대며 잦아들던 울음소리가 아직도 귀에 선하다.

보통 우는 어린애는 악마가 따로 없다는데, 한준은 마음도 얼굴도 예쁘기만 하다. 지나치게 순진하며, 지나치게 부드럽고, 지나치게 사랑스럽다. 어디서 원 플러스 쓰리로 준다 그래도 거들떠도 안 볼 미친놈 넷이 고스란히 꼬일 만큼. 빌어먹을 미친놈들이.

머릿속 한구석에 치워 두었던 미친놈들 루트의 검열 삭제 일러스트들이 떠오르자 얼굴 근육이 정연의 제어를 벗어나 파르르 떨렸다. 그나마 화면 속의 일일 때에는 그러려니 하고 넘겼는데, 막상 어리고 작은 한준과 소꿉친구가 되고 나니까 여러모로 불편하다 못해 화까지 난다.

스물일곱의 메마른 정연과 다섯 살의 치기 어린 한정연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쿵쿵 부딪혀 골이 다 울렸다. 씨발, 밥 다 먹고 생각할걸. 정연은 속으로 쌍욕과 개 자가 더해진 쌍욕을 번갈아 외치며 다 뭉개진 고기 조각을 꽉꽉 물어 씹었다.

그 기세가 심상찮았는지 여나아, 지끈대는 두통을 뚫고 한준이 말끝을 늘리며 제 이름을 부른다. 네가 살갑게도 부른 연이는 약 십삼 년 후에 너를 납치 감금할 계획이었을지도 모르는데 뭐가 좋다고.

문득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은 애잔함에 짧은 팔을 뻗은 정연이 말간 얼굴의 한준을 쓰다듬다가 그대로 끌어안았다. 따끈따끈 말랑말랑, 착잡해 죽겠는데 아무것도 모르면서 안아 주니 좋다고 꺄르륵 웃는 얼굴이 얄궂다. 흰 빵 같은 뺨에 뺨을 부비던 정연이 혀 짧은 소리로 작게 물었다.

“한쭌아, 나 조아해?”

“응! 여니 조아! 이마안큼!”

하, 존나 귀여워. 이렇게 귀여우니까 더러운 것들이 꼬이지. 머리까지 어린애로 변한 건지 정연이 표정 하나 못 숨기고 울적하게 그 얼굴을 마주했더니 제 말을 못 믿는 줄 알았는지, 한껏 벌렸던 손을 더 더 쭉 펴 보인다. 짧은 팔로 표현한 최대의 끝, 오밀조밀한 손가락이 더럽게 앙증맞다.

진짜 진짜 하늘 땅 별 땅. 이마아안큼. 재잘거리는 목소리에서 파앗, 애정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다. 별 이유 없던 하찮은 심술마저 사르르 녹아 사라지고, 살아생전 못 받아 본 곧고 바른 사랑에 온몸이 간질거렸다.

정연은 저도 모르게 웃고서는 달큼한 냄새가 나는 작은 몸에 얼굴을 묻고 숨을 크게 들이켰다. 우유와 캐러멜과 햄버그 냄새가 뒤섞인 따듯한 향이 정연의 조그마한 폐를 가득 채웠다. 이미 반쯤 한준 빠돌이인 한정연은 당연하다 쳐도, 건조하기 짝이 없는 스물일곱의 정연까지도 주르륵 녹아 버릴 만큼 좋은 향이 났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