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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꿉친구 지키기 프로젝트-2화 (2/52)

#2

그 순간, 정연은 깨달았다.

꼬박 오 년을 형제처럼, 한 몸처럼 자란 햇살 같고 별 같고 하늘 같고 솜사탕 같은 한준에게 닥칠 미래를 상상하다가 제 기분이 나빠질 이유 따위 없다고. 미친놈들이 한준에게 할 일이 거슬린다면, 미친놈들을 족쳐서 없애면 되는 일이라고. 자신이 모든 것을 기억해 낸 건 네 끌릴 대로 하라는 신의 계시가 분명하다고.

어디선가 빠밤빠, 하는 천사의 트럼펫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족쳐~ 족쳐~ 하는 노랫소리도.

게임이 시작하는 열여덟 살까지, 시간은 많고, 아는 것도 많았다.

네가 나를 이마안큼 좋아한다는데, 내가 그냥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지. 품 안 가득 끌어안았던 한준을 놓아주면서, 다소 제멋대로의 해석을 마친 정연이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음 지었다. 동글동글한 이빨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사납긴 한데 다섯 살 얼굴의 한계로 그닥 사나워 보이지는 않는 웃음을.

한정연 5세. 소꿉친구 지키기 프로젝트의 시작이었다.

***

한준은 정말로 예쁘다. 겨울 햇볕을 받으면 살랑거리면서 금색으로 반짝이는 옅은 갈색 머리카락에 반듯한 눈썹, 얇게 진 쌍꺼풀, 우아하게 휘어져 위쪽을 향한 긴 속눈썹, 유리구슬처럼 반질거리는 새까만 눈동자. 어린 나이에도 오똑하니 높은 콧대에 모양이 예쁜 선홍색 입술. 머리카락과 눈을 빼곤 얼굴부터 발끝까지 뽀얗거나 발간 게 천사가 따로 없다.

심지어 설정상 땀을 흘려도 달달한 우유와 캐러멜 향이 나는 신인류이기까지 하다니, 예쁜 걸 넘어서서 거의 사기급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한준은 정말 정말 정말 정말, 중요해서 정말을 네 번 연속으로 말할 정도로 예쁘다.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산책 나온 강아지처럼 모래 위를 뽈뽈 돌아다니는 한준을 놀이터 구석의 벤치에 앉은 정연이 눈으로만 좇았다. 속으로 한준 얼굴 예찬론을 줄줄 읽는 동안, 한낮의 햇살이 한준을 향해 차르르 쏟아졌다가 살랑거리는 머리 꼭대기부터 동그란 코끝까지 멍울져 떨어진다.

밤사이 눈이 왔다가 녹았는지 축축한 모래를 파고 쌓고, 정연의 눈에는 그게 그거인 돌멩이들을 주웠다 떨어뜨리며 제일 예쁜 돌을 찾아 좁은 모래터 안을 빙빙 돈다. 그러다 고개를 바짝 들어 제가 있는 쪽을 확인하고는 헤, 웃는 얼굴이 심장에 해롭게 예쁘고 귀엽다.

늘어지게 누워 있는 정연을 같이 놀자고 아파트 놀이터까지 끌고 나오더니 혼자서도 잘만 논다.

뼈가 삭고 영혼이 늙은 스물일곱 정연이 다행이라고 생각할 때에 다섯 살 한정연은 조금 서럽다고 생각해 버리는 고로, 다소 복잡미묘한 심정으로 한준에게 손만 한 번 흔든 정연이 바닥에 닿지 않는 다리를 흔들거리며 제 손가락을 꼽았다.

한준이 루트를 타는 이유. 열여덟 살이 될 때까지도 저렇게 강아지 새끼 같아서. 귀엽고 작고 사랑스러우며 한번 맘에 둔 사람은 죽어라 쫓아다니는, 미련하다고도 할 수 있지만 얼굴이 하드 캐리해서 순진하다고 표현되는 성격 때문에.

예쁨받기는 참 좋은 성격인데, 한준을 예뻐하는 놈들에 저세상 미친놈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게 문제다. 지금은 그렇다 쳐도 고등학교 때까지 정연이 스물네 시간 한준을 커버 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저 경계심 없는 성격 좀 어떻게 해야 하는데. 고개를 옆으로 삐뚜름하게 기울인 정연이 얼굴을 슬쩍 찌푸렸다.

자신이 저 나이 때 어땠더라, 생각해 봐도 스물두 해 전의 일이니 기억이 날 리가 없다. 원장님에게 연이는 그래도 얌전한 편이었지, 다른 애들에 비하면. 하는 말이야 들은 적은 있지만 그런 건 예의상의 고정 멘트에 가까운 걸 모르지 않는다. 다들 꺄르르 웃고 있는 사이에서 그 혼자만 웃지 않고 있는 단체 사진을 보면 얌전하다기보다 네 가지가 없는 편에 가까워 보이기도 했다.

그나마 기억나는 초등학생이며 중학생 시절에는 하는 말의 태반이 구성진 욕설이었으니 살면서 성격 좋단 소리 한 번을 못 들어 본 정연에게 한준은 여러모로 작동 원리를 알 수 없는 생명체인 것이다.

지금은 어리니까 내버려 두고 중학생쯤 되면 욕도 가르치고 사는 요령도 길러 주고 해야겠다. 싸움은 어릴 때부터 배우는 게 좋으니까 지금부터 태권도 학원이라도 다닐까. 이런저런 것을 생각해도 막막하긴 매한가지라 깊은 한숨이 또 절로 입 밖으로 새어 나온다.

정연이 앉은 벤치 위에 보석을 진열하듯 돌을 주르륵 늘어놓던 아이가 얼굴을 들고 여나, 아파아? 하고 어눌한 발음으로 묻는다. 제 이마에 붙은 거즈가 어지간히 신경 쓰이나 보다. 고개를 흔들어 괜찮다 도리질을 친 정연이 한준의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뒤로 잘 넘겨 준다. 그새 한준이 또 샐샐 헤프게도 웃는다.

웃지 마, 인마. 속으로 괜히 꿍얼거리며 벤치를 잡고 일어섰다. 다리가 짧아서 폴짝 뛰어내리는 것에 가깝기는 했지만 무사히 바닥에 안착한 정연이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면서.

머릿속에서 다섯 살의 한정연이 말했다. 같이 더 놀자고 해! 머릿속 스물일곱의 정연이 대꾸했다. 얼어 뒤지겠는데 모래 놀이는 개뿔.

정연은 공평하게 반반씩 섞어 말하기로 했다.

“한쭌아. 추우니까 가치 드러가자.”

결론이 한쪽에게 지나치게 치우친 경향이 없잖아 있었으나, 어쨌든 ‘같이’와 ‘얼어 뒤지겠음’을 종합한 합리적인 결과였다. 정연이 스스로에게 성의 없는 박수를 치는 사이에 한준도 발딱 일어서더니 제 손을 팡팡 털고 있다.

손 자바 주면. 작게 중얼거리고 수줍은 듯 휘어지는 눈. 제기랄. 손을 잘라서 달라고 해도 주겠다. 그래도 오른손은 쓰는 손이니까 무리고 왼손 정도는. 물론 한준은 그런 것 따윈 꿈에도 바라지 않겠지만.

정연이 손을 뻗어 한준의 손을 마주 잡았다. 모래가 다 털어지지 않았는지 흙 한번 만지지 않아 깨끗하던 정연의 손까지 부슬부슬, 모래 알갱이가 옮겨 붙는다. 인제 가자. 웅!

보들보들한 손가락을 꾹 쥔 정연이 고개를 살짝 젖혀 하늘을 올려다보곤 곧 비 오겠다. 속살거리며 잡은 손을 이끌어 집으로 향했다. 별거 아닌 이야기에도 진짜? 하고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한준과 함께.

모르는 사람이 까까 준다고 해도 쫓아가면 안 된다는 하찮은 세뇌를 하면서.

***

한정연의 부모님은 굉장히 바쁜 사람이었다. 집에 와서 자는 날이 한 달에 열흘이나 될까.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닌데 살다 보니 일이 그렇게 된 거겠지.

그에 비해 이웃집에 살던 한준의 어머니는 아침 일찍 출근해서 저녁 늦게 돌아오는 비교적 평범한 직장인이었고,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한준이 혼자 기다려야 하는 것을 걱정하는 것 반, 바쁜 한정연의 어머니를 도와주는 것 반 해서 한정연을 집에 들였다.

그렇게 한정연과 한준은 한집에서 한준의 어머니를 기다리면서 자연스럽게 소꿉친구가 되었다. 남의 집에 반쯤 얹혀산다는 데에 불안감이 있을 법도 한데, 그런 기분을 느끼기에는 한준이며 한준의 어머니가 한정연을 지나치게 예뻐했다.

본인 자식도 아닌데 잘도 예뻐해 주고 챙겨 주는 한준의 어머니, 그리고 여지껏 전부 제 차지였을 어머니의 사랑을 나눠 가지면서도 정연을 좋아하는 한준을 정연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저 대책 없이 다정한, 미련할 정도의 성격은 유전인가 보다. 하고 넘어갔을 뿐.

아마 게임 속의 ‘한정연’도 마찬가지였을 테다. 이해하는 척은 할 수 있어도, 진정으로 이해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가지고 태어난 선천적인 기질부터가 다른 것만 같았을 것이다. 어쩌면 불안했었을지도 모르고.

그렇다고 해도 하나뿐인 소꿉친구에게 지나치게 집착해서 가두고 묶고 때리고 발목을 부러트리는 게 설명되지는 않지만 말이다. 하다못해 까치도 은혜를 갚는데, 같은 까만 머리털을 가지고서 은혜는커녕 개지랄이나 떨다니. 말도 안 되고 소도 안 되는 일이다.

정연이 속으로 한정연은 은혜도 모르는 개새끼다, 라는 결론을 내리고는 고개를 돌렸다. 밖에서 조금 놀다 들어와서 간식 좀 먹고 나니 창문 밖이 어둑어둑하다. 창문에서 떼어 낸 시선을 비잉 돌려서 눈 안에 들어온 한준은 숫자 놀이 책을 펼쳐 선을 찍찍 긋고 있다.

칠은 구 같고, 팔은 머리가 찌그러진 눈사람 모양이고 구는 공이랑 일로 나뉜 것 같고 하는 식으로, 아무리 봐도 숫자라고는 보기 힘든 삐죽빼죽한 선과 세상에서 제일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듯한 선량하고 열정적인 한준의 얼굴이 대조적이었다.

진즉에 열 페이지 가득 숫자를 쓰고 책을 덮은 정연의 눈길이 길이가 부족한 팔로 힘들게 턱을 괴고 한준의 손에 쥔 사인펜 끝을 쫓았다. 삑삑. 얼마나 세게 그었는지 애처로운 소리가 다 나며 구겨져 가는 사인펜 심이 점점 꾸깃하게 닳아 갔다. 다른 누가 했다면 시끄럽다며 욕을 했을 것 같은데 이번에도 한준의 얼굴이 하드 캐리를 해서 귀여웠다.

한준의 펜이 길고 긴 고문 생활에서 벗어나 종이에서 떨어지자마자 정연은 제가 쥐고 있던 펜 뚜껑을 내밀었다. 쓰고 바로바로 닫지 않으면 제가 펜을 쥔 줄도 모르고 팔을 흔들다 옷이며 얼굴에 선을 직직 그어버리는 게 일상인 한준이 뚜껑을 받아 사인펜 위에 씌우고는 꾹 눌렀다. 정연이 한준의 책 페이지를 들여다보며 나직이 읽었다.

“1에서 5까지의 숫자를 쓰고 읽어 보세요.”

다 썼으니까 이제 읽어 봐. 넌지시 말한 정연이 지렁이마냥 삐뚤거리는 일 자부터 손끝으로 짚어 보였다. 씩씩한 대한민국 어린이 한준은 고개를 한 번도 아니고 두 번 끄덕끄덕하더니 외치듯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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