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하아나, 두울, 세엣, 오오….”
비록 반절을 가기도 전에 틀렸지만 시도가 가상했다. 하아나, 둘, 세엣, 넷, 하고 다섯. 정연이 작게 훈수를 두고 나서야 틀린 부분을 알아챘는지 다시 또박또박 숫자를 부른다. 나 진지해요, 라고 써진 까만 눈동자를 보면서 정연은 얼굴이 저렇게 예쁜데 공부를 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했다. 한준이 느리기는 해도 숫자며 글자를 익히는 걸 좋아하지만 않았어도 책을 집어 던지며 너는 예쁘니까 공부 안 해도 돼! 하고 외쳤을지도.
어린이용 파란 펭귄 테이블 아래에 글자 놀이와 창의력 놀이, 색칠 놀이 책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알록달록한 커버가 제법 아이의 시선을 끌 만큼 귀여웠다.
세상 참 좋아졌네. 나 어렸을 때엔 저런 거 없었는데. 나름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해도, 솔직히 노잼이다. 이십이 년 전에 다 배운 걸 새로 배우는 체하려니 몸이 비비 꼬이는 것 같다고 생각하던 정연이 눈알을 도르륵 굴리다 책상 위로 쭉 늘어졌다.
다섯 살 인생, 평화롭고 좋기는 한데 재미는 없다.
게으름 좀 피우려니 바로 자지 마아, 하고 칭얼거리는 목소리가 날아온다. 보챔에 못 이겨 억지로 꾸물꾸물 일어나던 정연이 고개를 들고, 한준 얼굴을 한 번 마주 보고 생각을 수정했다.
재밌는 거 딱 하나 있다고.
한준 얼굴.
***
어둡다.
다리를 정연의 배 위로 올리고 착 달라붙은 채 잠든 한준의 고른 숨소리를 들으며 눈을 껌벅였다. 혼자 살 때는 항상 불을 켜 놓고 잠들었는데. 한준과 한 침대에 챡 달라붙은 채로 누워서 불을 끄고 자려니 기분이 이상하다. 희미하게 간질간질한, 그런 기분.
정연이 기억을 찾은 지 일주일,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정연은 이마에 붙였던 거즈를 떼고 실밥을 풀었고 한준과 함께 인근의 태권도 학원에 등록했다.
유치원, 학원, 한준의 집.
특별히 바뀔 일 없는 규칙적이고 제한적인 일상. 자극적인 것들만 뽑아 만드는 게임 뒤의 현실은 지루하고 평온해서, 정연이 할 거라곤 생각뿐이었다. 해야 할 일, 깔아 둬야 할 포석, 지뢰, 보험 같은 것. 그리고 한정연에 대해서도.
스물일곱의 정연과 다섯 살의 한정연은 같은 사람이다. 정연이 두 쪽 모두 지나칠 정도로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으니까. 그럼 열여덟의 한정연은 과연 정연과 같은 사람일까? 정연이 자신의, 그러니까 전생의 삶을 기억하지 못했더라면 그렇게 자랐을까?
다정하고 상냥한, 어른스럽고 모든 일에 능숙한 한정연. 적어도 루트 중반까지는 동갑인 주제에 소꿉친구보다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형 같은 느낌의, 생긴 것도 대강 그렇게 생겨 먹은 제일 진입하기 쉬운 루트의 뒤통수 깨는 용도의 캐릭터.
집착에 감금, 납치, 스토킹, 살인 미수까지 범죄 모음 오관왕을 찍을 정도로 비틀어진 인간이 다정한 척은 어떻게 했는지. 하긴, 주변에 따라 할 사람이 있어서 쉬웠을까. 다정한 한준, 다정한 한준의 어머니. 단순하고 다정하고 따뜻한, 아예 생물학적 종이 다른 것 같은 사람들.
캄캄한 방 안 천장에 붙은 야광별 스티커가 빛도 없이 빛난다. 낮에 머금었던 햇빛을 어두워지면 본래 제 것인 양 뱉어 내는 얄팍한 것들. 한정연이 표하는 다정함이란 결국 저런 식으로 남의 행동을 따라 하는 것뿐이었겠지. 자신은 성가시고 무의미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한정연은 제 인격을 갈아 치울 정도로 뭔가 절박했을 수도 있다고, 정연이 성의 없이 생각했다.
하여튼 원래 머리 좋고 감성적인 미친놈들이 세상에서 제일 개 같은 법이다. 그런 개 같은 것들은 저들끼리 돌려 사귀고 싸우고 치고받다 죽으면 좋을 텐데. 죄라고는 예쁘고 착하고 아주 조금 멍청한 것뿐인 한준이 무슨 죄가 있다고.
정연이 종아리까지 내려간 이불을 끌어 올려 한준의 머리만 쏙 빼고 꼼꼼히 둘러 감쌌다. 어둠 속에서 어슴푸레 윤곽만을 드러낸 보얀 뺨이 이빨로 꾹 물어 보고 싶을 정도로 통통하다. 물기가 마른 머리카락 끝에서는 단내가 났다. 우유나 갈색으로 태운 설탕, 캐러멜 같은 달착지근한 냄새. 한준을 똑 빼닮은 따뜻한 향.
동화 속 아름다운 공주가 당나귀 가죽을 뒤집어쓰고 검댕을 묻혀 달아나는 것처럼, 한준을 꽁꽁 감춰야 했다. 좋은 점을 숨기고, 덜 착하고 덜 예쁘고 덜 약하게.
샴푸나 바디 워시도 조금 시원하고 싸한 걸로 바꾸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하품을 한 정연이 이불 속에 푹 파고들었다. 전에는 기본 취침 시간이 네 시였는데, 몸이 아이라 그런지 열 시만 되면 저절로 잠이 왔다. 그래, 자신이 한정연이든 아니든 무슨 상관인가. 한준이 예쁘고 정연은 예쁜 거에 약하다는 게 중요했다. 적어도 지금의 정연은.
***
널찍한 창문으로 아침 햇살이 바스스 쏟아진다.
한정연의 일상 중 하나. 주말 아침 일찍 일어나 소파 구석에 앉아 텔레비전으로 보는 파란 펭귄의 역습. 정연이 애써 지루함을 감추며 펭귄과 여우와 수달과 공룡의 시공을 초월한 우정을 보고 있자면, 조금 늦게 눈을 뜬 한준이 비척거리며 방문을 열고 나온다.
잠이 덜 깼는데도 부스스하기는커녕 눈부신 얼굴에, 정연은 아침에 보는 프로그램이 한준의 돌잔치 영상이라거나 유치원 학예회 영상 같은 거라면 다섯 배쯤 삶이 흥미로워질 거라고 확신했다.
소파 옆자리에 늘어지는 한준에게 정연이 작게 좋은 아침, 하고 속삭이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포슬포슬 부드러운 머리칼을 헤집었더니 한준이 꾸물거리며 몸을 일으킨다. 동글동글 앳된 얼굴이 훅 가까워지고, 곧 눈 안 가득 들어오는 새까만 눈동자에 밀어낼 타이밍을 놓쳤다. 아니. 또야.
미간을 꾹 찌푸리는 사이에 츱, 입술 위로 가볍게 따끈하고 말캉한 것이 맞붙었다가 떨어져 나간다. 손등으로 입술을 문질러 닦으려던 정연이 한준의 반짝이는 눈동자에 동작을 멈췄다. 말간 얼굴이 개 같다. 한숨 쉬면 빨리 늙는다는데. 정연이 또 한숨을 푸욱, 쉬면서 대신 한준의 뺨을 잡아 쭈욱 밀었다.
“입에는 하지 말래찌.”
더럽다고. 퍽 단호하게 나간 말에 한준이 히잉, 삐진 체를 하며 고개를 돌렸다. 히잉은 무슨 히잉인지. 희미하게 떫은 시선을 보내던 정연이 잡은 손을 내렸다. 어린애라는 걸 감안하고서라도 스킨십이 많은 한준이다. 좀 잘해 주기만 하면 뽀뽀 쪽, 기쁘기만 해도 쪽.
한 번은 앉혀 놓고 그렇게 아무하고나 뽀뽀하면 미친… 아니 나쁜 사람이 나쁜 짓을 할 수도 있다고, 짧은 발음으로 진지하게 말해 본 적도 있었지만.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 하고 말하는 듯한 반짝반짝 샤방샤방한 얼굴에 결국 정연이 심장을 붙잡고 뒤로 발라당 누워 버리는 걸로 끝난 결국은 헛된 시간이었다.
그 뒤로 한준이 연이는 아무가 아니라거나 뭔가 칭얼거리는 소리를 했던 것 같기는 한데, 샤랄라한 얼굴에 가려서 잘 기억은 나지 않았다. 결국 설득을 포기하고 그때그때 밀어내는 걸로 방침을 변경한 게 삼 일 전인데, 아직도 빈틈만 보이면 엉기려 들었다. 익숙해진 작은 몸이 따뜻하고 사근사근해서 싫은 건 아니지만, 한준이 미래에 큰일 겪을 걸 생각하면 어쩔 수 없다.
정연은 올바른 삶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평범한 삶 정도를 살아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정연이 아니라 한준이. 연애가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말고, 가끔가다 멍청한 짓도 해서 죽도록 후회도 해 보고, 죽고 싶어서 엉엉 울다가도 해 뜨면 살아 있어서 다행이라고 웃는 삶. 정연이 살아 본 적 없는 그런.
정연이 이런 게 부모 마음인가 생각하는 사이에 삐졌던 한준이 이쪽을 스을쩍 돌아본다. 눈이 마주치자 파다닥거리며 다시 고개를 돌리고. 나름 쏜살같이 돌리려던 것 같은데, 한준은 얼굴이 예쁜 대신 몸이 둔한지 거의 슬로 모션 수준이었다. 저쪽으로 팩 돌아간 뒤통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정연이 이제는 거의 습관이 된, 애답지 않은 한숨을 후, 하고 내쉬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덩치가 정연의 여섯 배쯤 되는 커다란 냉장고 문을 열어 작은 우유 팩과 귤 세 개를 작은 손 가득 든다. 주말에는 한준의 어머니가 늦게까지 잠을 자고 한준은 막 먹어야 할 다섯 살이었으므로 작은 간식이라도 챙겨 먹여야 했다. 손이 없어 어깨로 무거운 문을 쿵, 밀어 닫은 정연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한쭌이는 삐져서 간식도 안 먹게따. 그치이.”
“…….”
“그럼 우유도 귤도 내가 다 머거야겠다.”
당연히 반응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조용하다. 혹시나, 생각한 정연이 소파로 돌아오면서 곁눈질로 한준을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한준이 진동하고 있었다. 얼굴이 매너인 것도 모자라서 시스템도 매너 모드인가. 시답잖은 생각을 하던 정연이, 이러다 울겠다 싶을 정도로 진동하는 한준의 머리 위에 가져온 우유를 반듯하게 올렸다.
거짓말이야. 빨리 머거. 속삭이듯 흘리는 목소리에 진동이 멎는다. 희미하게 물기 어린 눈동자가 이쪽을 향하더니,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 과하게 예쁜 눈웃음을… 치기 전에 정연은 아슬아슬하게 고개를 돌렸다. 매우 아주 많이 빨리. 한준이 꼭 멀쩡한 사람한테 시집을 가든 장가를 가든 하기 전까지는 심장 마비로 죽고 싶지 않았다.
겨우 우유 하나에 삐진 척을 끝낸 한준이 조막만 한 손으로 우유를 터서 홀짝이는 사이에 정연은 귤껍질을 동그랗게 벗겼다. 뱀 허물처럼 툭 떨어진 껍질을 구석에 치우고 한 조각씩 쪼개 한준에게 내밀었더니 아. 아, 하고 입만 벌려 받아먹는 모양이 새 새끼 같다.
전에는 개 같더니 지금은 새 같다니. 합쳐서 개 새…… 정연은 스스로의 부족한 어휘력을 책망하며 생각을 그만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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