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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꿉친구 지키기 프로젝트-4화 (4/52)

#4

한준이 얌전히 귤을 몇 번 받아먹다가 꼴깍꼴깍 고개까지 젖혀가며 우유갑을 비운다. 생우유를 별로 좋아하지 않던 한준에게 정연이 우유를 많이 먹어야 미래에 소방차가 될 수 있다고 선의의 거짓말을 한 이후로 우유를 참 잘 챙겨 먹는 한준이었다.

아침에 한 팩, 저녁에 한 팩. 정연이 미미하게 흐뭇한 기색을 띠며 남은 귤을 깠다.

저대로 무럭무럭 자라서 180대도 넘기고 근육도 좀 붙고 하면 혹시라도 일이 잘못되었을 때 억지로 깔리는 일은 없겠지.

소꿉친구 지키기 프로젝트의 첫 목표. 강해져라, 한준.

***

머리 위로 병아리색 니트를 뒤집어쓰던 한준이 현관을 힐끔거렸다. 이미 준비를 마친 정연이 신발장에서 제 신발을 꺼내 바닥에 가지런히 놓고 있었다. 뒤집어쓴 옷가지 사이로 가려지는, 다섯 살답지 않게 표표한 얼굴과 꾹 다문 입술이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전에는, 저것보다는 조금 부끄러운 것처럼 다정다감하고 포근하게 웃는 얼굴을 자주 했었는데. 밤하늘처럼 새까만 머리카락이나, 얼음장이나 쌓인 눈의 옅은 회색 그림자를 닮은 눈동자가 전혀 차가워 보이지 않을 정도로 예쁘게. 언제나 잘 웃지만 제게 보여 주는 얼굴은 유난히 더 반짝거리는 것 같았는데.

그 얼굴이 문득 그리워서 울적해진 한준이 옷 입을 생각은 안 하고 제 손가락을 꼽았다. 열 이상은 셀 줄 몰라서 금방 그만두었지만.

그러니까, 정연이 어딘가 이상해진 게 언제부터였더라. 이마를 부딪쳐 심하게 다쳤던 날 이후부터였던가?

맞아. 초겨울, 이마가 쿵 깨진 순간부터 지금까지. 정연은 말수가 부쩍 줄었다. 무지무지 맛있는 걸 먹어도, 유치원에서 좋아하던 체육 활동을 해도 쓴 약을 씹은 것처럼 떨떠름한 얼굴을 하며 한숨만 푸욱 내쉬었다.

그 외에도 귀엽기만 한 길고양이를 보면서 갑자기 무서운 표정을 한다거나, 별것도 아닌 텔레비전 광고를 빠안히 쳐다보고 있다거나. 그 광고 내용이 뭐였더라. 호신용 최루 스프레이? 어찌 되었건 그런, 이상한 행동들도 자주 하고.

사람이 변하면 곧 죽는다는 말을 어디서 주워들은 한준이 울면서 엄마한테 매달렸을 때엔 원래 크게 아팠다가 나으면 변하는 법이라고, 별걱정을 다 한다는 소리와 함께 이마를 콩 얻어맞았었다.

욱신거리는 이마를 문지르면서 한준은 다시는, 다시는 정연이 다치지 않도록 잘 지켜 줘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조금 훌쩍거렸었다. 그게 태권도에 관심이라곤 병아리 눈물만큼도 없는 한준이, 정연의 다소 뜬금없는 ‘같이 태권도 배우자’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따라나선 이유도 그거고.

유치원과 집과 놀이터를 오가던 일상에 태권도 학원이 생뚱맞게 낀 것 말고는 전과 다를 바 없이 하루 종일 같이 있지만, 변한 것 같은 기분은 사라지지 않았다. 어딘가 냉해진 정연은 뽀뽀를 하면 밀어내고, 먼저 놀자고 하지도 않고. 좋아한다고 말해 주지도 않아서 조금씩 서럽고 서운한 게 쌓여 갔지만, 그래도 한준은 정연이 좋았다.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유치원 안 가?”

멀뚱하게 기다리고 서 있던 정연이 고개도 돌리지 않고 물었다. 제풀에 파다닥 놀란 한준이 옷 밖으로 머리를 쑥 빼냈다. 허둥대며 니트에 팔을 마저 끼우고 의자 등받이에 걸린 외투를 꿰어 입으며 가방을 집어 들었다. 지금 가아, 하고 대꾸하고 현관으로 달음박질친 한준이 여전히 표정을 알기 힘든 정연을 슬쩍 살펴봤다.

늦게 왔다고 놓고 가는 건 아니겠지.

힐끗힐끗 눈치를 보며 신발 안으로 발을 꾹꾹 쑤셔 넣지만, 마음이 급하다고 해서 신발이 저절로 제대로 신겨질 리가 없다.

어라, 이게 왜 안 신겨지지. 끙끙거리는 한준의 옆에서 삐뚜름하게 서 있던 정연이 후우, 한숨을 내뱉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느린 한숨 소리가 꼬옥 재촉하는 것처럼 들려서 한준은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꾹 오므렸다. 울 일도 아닌데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옆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서 움찔 몸을 굳혔는데, 정연이 몸을 낮추고 있었다. 울먹거리는 것도 잊고 멍하니 바라보는 동안, 현관 바닥에 쪼그려 앉아 신발의 벨크로를 풀고 발등 부분을 잡아 벌린 정연이 한준의 발목을 잡아 그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고선 꾸욱, 잘 신겼는지 운동화 뒤축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확인한 후 일어나 니트의 목덜미 부분을 반듯하게 정리하고. 마지막으로 니트를 입느라 붕 뜨고 헝클어진 머리카락까지 꾹 눌러 정리하고 나서 손을 뗐다.

어딘가 모르게 난처한 기색이 아주 조금 엿보이는, 눈 그림자 같은 예쁜 연회색 눈동자를 굴리며 뒤로 한 발짝 물러서 손바닥을 툭툭 털어낸 정연이 한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이제 가자.”

앞으로 내밀어진 새하얀 손바닥에 시선을 고정시킨 한준이 언제 멍했냐는 듯 사르르 웃었다. 눈앞으로 어룽거리던 눈물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역시 좋아할 수밖에 없다니까. 예전과는 다르게 차갑고 멀게 굴어서 슬퍼지려 하면 이런 식으로 손을 내밀고 보살피고 예뻐해 주니까. 다른 사람인 것처럼 느껴지다가도 언제나처럼 다정한 소꿉친구의 손에 손가락을 얽은 한준이 웃는 얼굴로 이제 가자, 하고 따라 속살거렸다.

눈이라도 부신 것처럼 눈을 가늘게 뜬 정연이 현관문을 열었다. 쪼르르 쏟아지는 아침 햇살에 하얗게 빛나는 정연의 옆얼굴이 눈부시다고 생각하며 살짝 맞잡은 손에 딸려 가듯 총총걸음을 옮겼다.

변한 걸까, 변하지 않은 걸까. 가늠하던 생각이 빌라 복도의 트인 통로로 들어오는 풀꽃 같은 바람 냄새에 날려 사라졌다. 간질간질하게 가슴께로 퍼지는, 왼손의 다정한 온기만을 만끽한 한준이 앞서 나가는 정연의 등을 보며 마냥 화사하게 웃었다.

겨울이 끝나 가고 있었다.

***

이쪽으로 차-!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먼지구름과 함께 더운 공기를 메웠다. 아이들은 지치지도 않고 운동장 이쪽으로 우르르 뛰었다가 저쪽으로 다시 우르르 몰렸다. 왁왁거리는 함성이며 몇십 개나 되는 발이 바닥 구르는 소리에 허물 벗은 매미가 나무마다 매달려 목 놓아 우는 소리까지 더해져 귀가 아플 지경이었다.

먼지 자욱이 내려앉은 운동화 코로 바닥의 흙을 파내고 있자면, 이 온통 시끄러운 세상과 자신이 그저 동떨어진 것만 같다. 정연은 꽤나 감정적인 감상을 남기다가, 구름 없이 새파란 하늘에서 시선을 떼었다.

바글바글한 애들 사이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얼굴 찾기가 어렵지 않았다. 다 같이 먼지 구덩이에서 굴러도 흰 체육복이 유독 깨끗한 것이 한준이고, 또 보기에 제일 좋은 것이 한준이었다. 빠지고 싶다 떼 한번 쓴 적 없이 태권도 학원을 오 년 동안 다닌 덕인지 체력이 붙은 한준은 그악스러운 또래 사내애들 사이로도 제법 야무지게 뛰어다녔다.

축구공 차는 것보다 맨땅 차는 것이 더 잦았어도 먼지구름과 더러운 운동화들 사이로 잘 보이지도 않는 공 쫓기를 포기하지는 않았다. 송골송골 굵게 맺힌 땀방울이 대낮의 볕에서 파도처럼 종종 튀었다. 반짝거렸다.

그 모습 보는 것이 제법 족해서, 옷 더럽히는 것 싫다는 이유로 축구에 끼지도 않는 정연은 점심시간마다 바깥에 나와 나무 그늘 풍성하게 드리우는 늙은 은행나무에 등을 기대고 운동장을 한참 바라보고는 했다. 날이 더워 그늘 밑에 가만히 있기만 해도 땀이 차는데도 꼭 그랬다. 어쩌면 저 얼굴 보면 더위가 잊혀서 그랬던 걸지도 모른다.

땀 뻘뻘 흘리며 발바닥 까지게 공 차다가도 한 번씩 저를 돌아보고 또 이쪽으로 졸졸 뛰어오는 저 모난 구석 없이 예쁜 얼굴.

기다리고 서 있자면 숨 헥헥거리면서도 뛰는 걸음 늦추는 일 없이 한준이 코앞까지 뛰어왔다. 푸른 기 짙은 나무 그늘에 별 박히는 것처럼 드는 볕이 솜털 보송하니 보얀 얼굴 위로 어룽거렸다. 유리알 같은 까만 눈동자가 빛 받은 부분만 다정한 고동색이 되고, 색보다 더 다정한 눈웃음 사이로 가물었다. 무릎 짚고 숨 고르느라 동그랗게 낮춰진 뒤통수를 내려다보던 정연이 나지막이 물었다.

“왜 왔어.”

물었더니 그냐앙, 하고 말 늘이는 모양새가 어렸다. 아닌 게 아니라 얼굴에 젖살 덜 빠진 한준은 아직도 아기처럼 뺨이 둥글고 팔도 다리도 가늘었다. 타고난 기골이 다른지 열 살의 한정연이 백오십 넘게 자라는 동안 한준은 표준 키에 반 뼘이 모자랐다.

얼굴에 붙은 머리칼을 뒤로 넘겨 준 정연이 넌 언제 다 클래, 하고 중얼거리면 한준은 매번 별말 다 한다는 양 웃었다. 어느 한구석 찡그리지도 않고 동글동글한 웃음이 마냥 순했다.

“연이 너 다 크면 따라 클래.”

그러고서 한다는 말이 이런 것이라 정연은 심장을 움켜쥐었다. 물론 속으로만 움켜쥐었다. 제가 조금만 아픈 척해도 금방 넘어와서 발발거리며 주변을 도는 한준에게 네가 너무 귀여워서 그래, 하고 책임 전가를 하고 싶지 않아 혼자 속으로만 몰래 귀여워하고 속으로만 바닥을 굴렀다.

애 키우는 게 바로 이런 심정인가. 이래서 대한민국의 많은 부모들이 자식을 들들 볶아 아빠가 제일 좋아, 같은 말을 휴X 착즙기마냥 쥐어짜는가. 하지만 정연은 재촉하지 않아도 저 좋은 티 팍 내는 한준이 있었다. 정연의 1승이다. 누구와 겨룬 건지는 몰라도.

“축구 더 안 할 거면 이제 가서 물 마셔. 뛰었으니까.”

“너도 들어갈 거야?”

“너 들어가면.”

그 말에 한준이 또 뭐가 좋다고 헤, 웃었다. 맹한 얼굴이 또 기가 막히게 예쁜 것이 정연의 오랜 고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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