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소꿉친구 지키기 프로젝트-5화 (5/5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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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제 소꿉친구가 좀 덜 예쁘거나 덜 귀엽거나 덜 사랑스러울 수 없을까? 이는 칸트가 와도 답을 못 찾을 영원한 난제였다. 물론 칸트는 이 문제와 아무런 관련이 없고 정연이 아는 유일한 철학자이기에 끌려 온 것뿐이지만.

아무튼 세간의 인식으로는 하루하루 이성 외치는 기계와 다를 바 없는 그 철학자도 한준을 보았다면 인간의 이성이 얼마나 나약한지 번민하게 되었으리라고 정연은 의심 없이 생각했다.

대한민국 햇님 유치원 해바라기 반 5살 한준은 한국 초등학교 3학년 2반 25번 한준이 되어서도 여전했다. 샴푸며 바디 워시를 싸하니 시원한 향으로 바꿔도, 태권도 학원을 다녀 병아리 같은 노란 띠도 아니고 파란 띠를 따 허리에 매도, 괜히 뾰족한 징이며 해골 무늬가 박힌 기묘한 옷을 입혀도 한준의 사랑스러움을 막을 수는 없었다.

시원한 향이 나면 시원한 향이 나는 대로 요정 같았고 흰 도복 밖으로 튀어나온 손은 끄트머리 둥그러니 귀여웠다. 정연이 한준을 업어 키우다시피 해서 하는 말은 아니다. 한준에게 쌍팔년도에 유행했을지 아닐지도 모르는 펑크 스타일 옷을 입혔을 때엔 할로윈도 아닌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사탕을 수북하니 받았던 것이다.

좀 험상궂어 보이라고 머리까지 비죽비죽 세워 둔 애가 짧달막한 팔뚝과 좁은 품 새에 넘칠 정도로 알사탕이며 초콜릿 따위를 한 아름 안고 세상의 아름다움을 설파하는 듯한 반짝이는 얼굴로 돌아왔을 때, 정연은 그 자리에서 눈물을 찔끔 흘리고 말았다. 사랑스러움도 이쯤 되면 범죄인데, 정연은 도저히 벌줄 수가 없었다. 누가 벌주려는 양 헛짓거리를 벌일 것 같으면 대가리를 깰 자신은 있었어도….

그렇게 눈물 젖은 사탕은 이후 정연의 엄격하고 치밀한 검사 끝에 하루에 딱 하나씩만 한준에게 제공되었다. 불법적인 약물과 충치를 우려한 방침이었는데, 안타깝게도 전자는 막아졌어도 후자는 잘 막아지지 않았다. 이번 주 토요일에 한준은 치과에서 입을 얌전히 벌리고 눈물을 줄줄 떨굴 운명이었으니까.

준이 어머니께서 둘이 다녀오라 하셨는데, 이번에는 또 무슨 핑계를 대 데려가야 하나. 돈가스는 이미 써먹었고….

고작 화장실 가는 쉬는 시간 동안에도 샛길로 번지는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원래 이렇게 산만했던가, 아니면 열 살 한정연의 소소한 농간인가 고민하는 걸음이 분주했다.

그래도 볼일 보면서까지 정신 놓을 수는 없어 잠시 고개를 흔들고 소변기 앞에 섰다. 꼭 물도 저랑 같이 마셔야겠다는 한준을 못 이겨 목 타지도 않는데 물을 몇 잔이고 마신 탓이었다. 그래도 마신 대로 나오는 걸 보면 몸은 건강한가 보지.

정연이 남의 몸 보듯 한정연의 건강 상태를 가늠하다 말고 눈을 옆으로 돌렸다. 애 하나가 자리도 많은데 꼭 옆에 와서 바지 까고 소변을 누기 시작한 탓이었다. 머리를 꼭 밤톨처럼 밀고 헐렁헐렁한 나시를 입은 게 전형적인 골목대장처럼 생긴 녀석이었다. 같은 반이었나, 대충 눈에 익은 것만 확인하고 다시 눈 돌리는 정연에게 밤톨이 툭 물었다.

“너 한준 좋아하냐?”

이 무슨 중국집 가서 짜장면 있나요, 하고 물어보는 소린가 해 반사적으로 뭐? 되물었더니 당황한 줄 알았는지 심술 어린 얼굴에 의기양양함이 더해진다.

“맨날 축구도 안 하고 한준만 쳐다보는 거 다 알아!”

눈치가 참 빠른 녀석이다. 제가 누가 봐도 티 날 만치 빤히 쳐다봤다는 생각은 안 하는 정연이 요새 애들은 똘똘하네, 생각하는 동안 밤톨이 숨을 쌔근거렸다. 대답 안 하면 버럭버럭 소리를 지를 낌새라 대강 말을 던졌다.

“그래서?”

밤톨이 눈을 굴렸다. 누가 누구 좋아한단 소리 들으면 얼굴 붉히며 아니라고 화부터 내는 그런 모양새를 기대했는지 퍽 당황한 모양새였다.

“조, 좋아하면 손잡고 뽀뽀한다던데, 한준이랑 그러겠네!”

그런데도 어물어물 놀릴 말을 쥐어 짜내는 것이 참 근성 있다. 그 근성으로 공부를 하면 밤톨이 밤나무가 될 즈음에는 서울권 대학에 들어갈 텐데. 물론 내 자식새끼가 아니니 크게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사실 명문대는 우리 한준 녀석이 들어가야지. 요새 분수며 소수며 하는 수학 문제까지 꼼꼼히 풀어 나가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뽀뽀니 뭐니 더럽니 뭐니 하는 소리 듣는 둥 마는 둥 대강 고개 끄덕여 주고 다시 한준의 빛나는 미래 따위를 떠올리다 어깨를 떠밀렸다.

우악스럽긴 해도 이미 키도 크고 덩치도 큰 정연이 굳이 넘어질 정도는 아니라서, 고개나 조금 기웃거리며 조금 얼떨떨하게 박박 깎은 머리통을 내려다보니 밤톨이 숨을 씨근거렸다. 그 얼굴에 제 맘대로 되지 않으면 분해하는 어린애다운 악이 서려 있어서, 정연은 저걸 한 대 쥐어박아야 하는지 어른답게 훈계해야 하는지 고민했는데, 그럴 필요도 없이 행동은 밤톨이 빨랐다.

“한정연이랑 한준이 뽀뽀했대요!”

녀석이 와아악, 그렇게 소리를 지르며 복도로 뛰어나간 것이다. 정연은 속으로 탄식했다. 어쩌나. 진짜로 했는데.

물론 유치원 때의 일이지만, 진짜로 뽀뽀한 나머지 저 놀림에 분해할 정당성을 잃은 것이 안타깝기 그지없었고 애들끼리 뽀뽀 한 번 하는 것을 진심으로 놀림거리로 알고 펄쩍 뛰는 어린애들 모양새가 웃겼다. 열 살짜리 한정연이 속에서 반은 분개하고 반은 부끄러워하든 말든 스물일곱 살 성인이 낄 일은 아니었다. 아직은.

지금은 그래, 한준에게 우유를 어떻게 먹여야 할지가 고민이지. 우유를 마시면 소방차가 될 수 있다는 희대의 거짓말이 탄로 난 여섯 살 이후로 한준은 우유를 거의 안 마셨다. 키가 덜 큰 건 아무래도 그 탓이다. 정연은 옷매무새를 추스르고 손을 뽀득뽀득 깔끔하게 씻고 수근거림 가득한 복도를 태연하게 걸었다.

창으로 들어오는 볕 탓에 복도까지 따뜻하도록 햇살 좋은 여름이었다.

***

“자, 그럼 강아지똥은 왜 민들레를 꼭 안아 주었을까?”

맥락이고 뭐고 똥 소리만 나오면 키득거리기 바쁜 애들 웃음소리가 오후의 교실에 가득했다. 철 덜 든 애들 데리고 작품의 취지 따위를 가르쳐야 하는 담임도 고생이었다. 내내 쳐다보던 한준의 동그란 뒤통수도 살짝 들썩거리는 게, 저도 웃긴데 선생님께 실례일까 봐 꾹 참고 입 안으로만 웃는 모양이다.

역시 내 새끼. 마음씨도 비단결이다. 유치원 때는 강아지똥 비디오 보고 엉엉 울었던 것 같은데 이젠 웃는 걸 보니 씩씩하게 크기도 했고. 오늘도 어김없이 팔불출적 마인드를 펼친 정연이 연필을 까딱까딱 흔들었다.

오늘따라 교실 분위기가 붕 뜬 게 비단 배설물 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다음 주면 여름 방학이라 다들 마음은 벌써 바다며 놀이공원으로 떠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은 진도 나가야 한다며 책 붙들고 있는 담임도 지독하지. 정연 또한 선생님의 학구열에 동참할 마음이 없기는 일반이었다. 여름 방학 되기 전까지는 해결해 두어야 하는 일이 있었던 탓이다. 물론 다른 애들마냥 여행지 생각이나 하는 것은 아니고,

사람을 찾을 때가 되었다.

미친놈을 사람이라고 불러도 된다는 가정하에.

물론 사랑이라는 명목하에 죽느니 사느니 하는 한준의 박복한 팔자가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것은 열여덟이지만, 다른 공략 인물들과의 접점이 딱 그 시기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었다. 한정연만 보아도 한준의 소꿉친구 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지 않은가.

유구한 게임의 법칙상 겹치는 포지션은 없어야 하기에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사이는 한정연 하나지만, 다른 미친놈들에게도 후에 아련한 척 꼴값 떨며 회상할 만한 어린 시절의 추억 정도는 하나 주어져 있었다. 하나가 초등학생 때, 하나가 중학생 때. 아, 아무 접점 없는 놈도 하나 있던가.

하여튼, 정연은 굿 루트에서 나온 그 몇 줄의 단서들을 바탕으로 아직 덜 자란 미친놈들을 찾아내야 했다. 게임은 리셋이 가능하다지만, 이 인생이 리셋 가능한지는 아는 바가 없으니 보험이란 보험은 싹 다 들어 놓아야지.

한준을 나름대로 남의 또라이 짓에 휘말리지 않을 강골로 키우고 있다고는 하지만, 차가 아무리 벤X 급으로 성능이 좋아도 길이 포장 안 된 자갈밭이면 운전이 고역이지 않던가.

그러니 자갈들 중 고를 수 있는 건 미리미리 고르고 뽑아 둬야지.

***

그러니까 지금은 초등학교 3학년 때에 처음으로 만나게 될, 하지만 한준은 다시 만나기 전까지 어렴풋이만 기억하게 될 ‘그 미친놈’을 찾아야 하는데. 혼자서 어느 정도 운신이 가능한 초등학교 일학년 때부터 쭉 염두에 두고 있었으나 찾기가 쉽지는 않았다. 붉은 벽돌담을 돌아가면 있는 골목이라고 해도, 이 도시에 붉은 벽돌담이 한두갠 줄 아나. 빌어먹을. 자세히 좀 써 둘 것이지.

속으로 욕을 짓씹은 정연이 기억 속에서 흐릿해져 가는 일러스트 속 이목구비를 더듬으며 연필을 놀렸다. 몽타주라도 그려 둘 셈이었다.

노란 탈색 머리, 갈색 눈, 고양이 상, 미인. 물론 한준만큼은 결코 아님. 아, 아직 애일 테니까 검은 머리려나. 머리카락 부분을 흑연으로 북북 문질러 칠한다. 연필 놀리는 사이 조급함은 더해진다. 일 터지는 게 방학 중이니까, 여름 방학 시작하기 전까지는 찾아 둬야 어떻게 손을 쓰는데, 젠장.

“선생님! 한정연 수업 안 듣고 낙서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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