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한정연 소리만 듣고 제가 입으로 욕한 줄 알고 움찔한 정연이 뒷말에야 느지막이 목소리 들린 뒤편을 돌아봤다. 째지는 게 어디서 들은 목소리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밤톨이다. 눈 마주치자 눈 밑을 뒤집어 까고 혓바닥 내미는 게, 저건 급식으로 뭘 처먹길래 뱃속에 심술만 가득한가 의문이었다. 우리 준이는 남에게 심술부리는 모습 한 번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세상이 참 불공평하다.
“정연아, 그랬어?”
교과서 들고 열변을 토하던 담임의 시선이 무던히 연필 놓는 정연을 향했다. 지금까지 담임들은 정연이 수업 시간에 다른 책을 들추든 낙서를 하든 남 건드리지만 않으면 내버려 두던데, 이번 학년 담임이 유난히 필요 없는 정성을 들였다. 하지 말라 한마디 하고 넘기면 될 걸 굳이 확인하겠다고 자리까지 오는 것만 봐도. 한준이 불안한지 움찔움찔 뒤를 돌았다. 그 와중에 완전히 몸은 못 돌리는 모양새가 얌전했다.
감추면 더 수상해 보일 것 같아 덩그러니 내버려 둔 교과서 페이지 위로 담임의 그림자가 졌다. 누구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하지. 만화 캐릭터라고 둘러댈까. 넘기자면 못 넘길 것도 아닌데 켕길 것이 있는 정연만 속이 뜨끔했다. 교과서를 뒤적이던 담임의 손끝이 기어코 종이 한구석의 낙서를 짚어 냈다.
아, 뭐. 그냥 눈 딱 감고 미안합니다, 하면 더 캐묻진 않겠지.
“강아지똥이구나.”
“미… 네?”
“우리 정연이가 강아지똥을 그렸구나.”
아니. 강아지똥이겠냐고.
물론 조금 까맣긴 하지만. 까만 얼룩 같은 구석이 있지만. 나름 눈도 있고 코도 있지 않은가.
항변하려던 정연은 옆 페이지의 일러스트를 보고 포기했다. 그래. 강아지똥도 원래 눈이 있고 코도 있구나.
아무리 수업 내용이어도 그렇지 교과서에 낙서하는 건 좋지 않다며 고운 말로 어르는 참된 스승을 앞에 두고서 정연은 주먹을 꽉 쥐었다. 나름 체계를 가지고 그리던 그림을 비하당한 굴욕감과 뒤늦게 차오르는 웃김 사이로 기묘해져 가는 얼굴을 참기가 어려웠다. 미친놈아, 너 개똥 됐다.
정연이 달아나려는 배꼽을 붙잡으려 배에 힘주는 사이 마침종이 울렸다. 그래도 새로울 것 없어 지루한 시간에 오늘은 웃을 일이라도 하나 있었으니 된 거지. 긍정 회로를 돌리며 필통이며 교과서를 가방에 몰아넣고 있자니 한준이 쫄랑쫄랑 곁에 와 붙었다. 수업 끝나기 전부터 싸 두었는지 등 뒤에는 야무지게 책가방이 자리했다.
“그림 그렸어?”
그러면서 동글한 뺨 갸웃거리는 게 모로 봐도 보여 달라는 모양새였다. 저렇게 몸으로 말할 줄 아는 것도 재능인데. 공연히 말랑한 볼에 손가락 한 번 눌러 보고는 닫은 교과서를 가방에 넣었다.
“나중에 보여 줄게.”
물론 나중이라고 보여 줄 생각도 아니었지만.
부정 탈라.
넣을 것 다 몰아넣어 묵직한 가방을 등에 멘 정연이 한준의 가방을 손끝으로 툭툭 쳤다. 알림장 챙겼어? 챙겼지이. 그럼 스케치북은? 챙겼어. 수학 익힘책은? 아. 눈 동그랗게 뜬 한준이 부지런히 제 자리로 가 수학 익힘책을 찾았다. 열 살의 한준은 제법 손끝이 야무지게 되었지만 그래도 아직은 종종 무얼 놓치기에 정연이 한 번은 점검해 주어야 했다. 한준이 지퍼를 연 채 내민 가방 안을 시선으로 확인한 정연이 고개를 끄덕여 최종 승인을 내렸다. 잘했어.
그제서야 한준이 배시시 웃으며 가방 다시 닫아 어깨에 매 정연과 나란히 섰다. 그렇게 교실을 빠져나오는데 어디선가 시선이 따끔했다. 안 봐도 비디오고 안 봐도 밤톨이군. 정연은 돌아보지도 않고 한준 손만 끌어 복도를 지났다. 볕이 뜨끈해 싫을 법도 한데 한준은 한 마디 불평도 없이 졸졸 따라왔다. 다 컸네, 다 컸어.
이제 신발도 혼자 잘 갈아신고. 제 신발은 보지도 않고 발꿈치를 우겨 신은 정연이 한준 신발 갈아신는 것은 유심히도 보았다. 줄이 꼬여서 넘어지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게 신발끈 다시 한번 묶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신발장 밖으로 나오면 정오 지났는데도 아직 해가 눈 시리게 밝았다. 눈 한 번 찡그리며 운동장 가로지르자면 그제서야 또 생각나는 것이 있어서, 정연이 툭 말했다.
“오늘은 너랑 같이 집에 못 가.”
그 짧은 말에 왜? 하고 묻지도 못하고 얼굴만 금방 울망해진다. 저 말고 다른 애랑 하교하냐고 묻지도 못하고 혼자 시무룩한 모양새가 답답할 만도 한데, 아직도 애다운 얼굴이 귀엽기만 하다. 굳이 해명하는 대신 말랑한 어깨 잡아서 교문 쪽으로 돌려세웠다.
새까맣게 번드르르한 차 한 대가 교문 밖에 서 있었다. 맞추기라도 한 건지 검은 정장 입은 채로 차문에 기대 선 여자를 눈에 담은 한준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쉽게도 시무룩해지고 쉽게도 풀리는 그 낯이 귀여워 정연이 건조하게 웃었다.
“정이 이모!”
반갑게 외친 한준이 날듯이 뛰어가 여자의 허리께에 달려들었다. 정연이 그 뒤를 아주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쫓는 동안 늘씬하게 키 큰 여자는 냉한 외모에 어울리지 않는 다정한 손끝으로 제게 매달린 아이의 등을 도닥였다. 우아한 콧대 위로 걸친 선글라스가 느슨하게 흘러내려, 한여름에도 절로 차가운 회색 눈동자 네 개가 나란히 마주쳤다. 그제야 정연은 손을 흔들었다.
“오랜만이에요, 엄마.”
한정연의 엄마였다.
***
미끈한 차가 유유히 도심을 가로질렀다. 거짓말 좀 보태면 데굴데굴 굴러도 될 만치 넓은 뒷좌석에 정연 홀로 덩그러니 앉아 있자면 차창 너머로 익숙한 건물과 익숙한 상표들이 스쳐 지나갔다. 정연은 새삼스레 제가 한 게임에 삼X을 함성이라 한다거나, 엘X를 알쥐로 각색하는 식의 개그 코드가 들어 있진 않아서 다행이라 여겼다. 만약 그랬더라면 도무지 비웃음을 참을 자신이 없었다.
스물일곱 살 정연이 열 살배기 한정연이 되기 위해 보낸 오 년의 느슨하고 평화로운 시간은 마음의 안정에는 도움이 되어도 표정 관리에는 별 도움이 안 되어서, 아까 강아지똥 사건 때도 일그러지는 얼굴을 참으려 제법 노력을 들여야 하지 않았던가…
잠깐 그 생각만 했는데 창가에 입꼬리 비죽이 올라가는 모양새가 비치는 것에 어쩐지 기분이 미묘해져 제 얼굴 문질러 닦고 있자니 앞자리에서 한마디 말이 건너온다.
“한정연. 오랜만에 엄마 봤는데 표정이 그게 뭐야.”
운전하는 중에 뒤 보는 건 또 뭐고요. 정연은 ‘착한 아이’는 아닐지언정 남의 몸 빌려 패륜하지 않을 정도의 양심은 가지고 있었으므로 떠오른 말을 바로 뱉지 않았다.
“오늘 숙제 생각하느라요.”
대강 둘러댄 말에 ‘핑계는.’ 하는 빈축이 돌아온다. 새삼스레 아이와 부모처럼 툭툭 주고받는 말다툼 하기에는 멋쩍다 못해 어색했으므로, 정연은 입이나 꾹 다물었다. 애초에 어릴 때 삼 일에 한 번은 보던 것이 이제 와서는 한 달에 한두 번이나 겨우 얼굴 볼 수 있는 사람이었다. 세간에서는 보통 그것을 남이라고도 부른다.
차라리 한준이 여기 있었다면 분위기는 좀 나았을 텐데. 얼굴 익힌 사람이면 누구라도 진심으로 좋은 것처럼 구는, 그리고 실제로도 좋아하는 한준은 어색한 어머니와 아들 사이에서도 혼자 조잘조잘 잘만 떠들어, 한정연의 어머니나 정연 같은 메마른 사람조차 어쩔 수 없이 비식거리며 웃게 하고는 했다.
그런데 오늘은 대체 무슨 볼일이 있다고 한준은 집에다 내려놓고 저만 데리고 가는지 모를 일이다. 가리비같이 다물린 입과 침묵이 갑갑하다는 듯 한숨 쉰 여자가 오늘따라 말을 한마디 더 붙였다.
“다음 주에 학부모 참관 수업 있다며. 왜 말 안 했어.”
“바쁘실 것 같아서요.”
“그래도 말은 해야지.”
“바쁘신 것 같아서 말 안 했어요.”
사실만 말한 것 같은데 어째 부루퉁한 어린애라도 된 기분에 정연이 새삼 목덜미를 긁적였다. 아닌 게 아니라 정연의 부모는 정말로 항상 바빴다. 이 정도는 일해야 열여덟 살의 한정연에게 어떻게 봐도 학생 혼자 살 넓이는 아닌 오피스텔 하나 살 만큼의 용돈을 주는 건가, 싶을 정도로.
물론 그 오피스텔이 한정연 18 새끼… 아니. 18세의 손에 후일 감금을 포함한 온갖 범죄의 온상이 된다는 점에서 별로 바람직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정연이 굳이 아직 받지도 않은 돈과 사지도 않은 집 때문에 부모의 경제생활을 방해할 필요가 있나. 참관 수업이래 봤자 병아리들이 부모 앞에서 손 번쩍번쩍 들며 기분 내는 것에 불과한데 각자 할 일 하는 편이 낫지.
“신경 안 쓰셔도 괜찮아요.”
이제 어린애도 아닌데. 한마디 더 덧붙이자 그대로 대화가 뚝 끊겼다. 자타가 공인하는 노잼 인간이던 정연에게는 익숙한 서늘한 침묵이었다. 어쩌면 한정연에게도 그랬을지 모르겠다. 인게임에서 한준에게 ‘너만이 유일한 내 가족이야.’라며 매달리던 모양새만 봐도, 정상적인 가족 관계를 가진 사람이라면 보통 그런 말은 안 하지.
부모는 무심하고 아이는 어딘가 이상하다. 사람 하나 틀어지게 하기에는 딱 좋은 환경이 아닐 수 없지만, 정연으로서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애초에 부모를 가지고 산 날보다 부모 없이 산 날이 길었으니 앞으로도 없는 것처럼 산다고 크게 문제가 생길 것 같진 않았기에 현상 유지라고 부르고 방관이라 불리는 태도를 택했다.
어쩔 수 없는 것이, 한정연의 부모 쪽은 지금의 어색한 사이를 타파하기 위해 노력할 의사가 없어 보이니 변화를 위한 행동은 오롯이 정연의 몫일 테다. 그럴 테지만, …안타깝게도 정연은 자신이 많고 많은 원작 빙의계 게임의 주인공처럼 부모 자식 관계를 고치겠다며 혀 짧은 소리로 엄마가 와 주시면 기쁠 거 같은데, 하고 말끝을 늘이는 상상만 해도 소름이 좍좍 돋았던 것이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