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다 커서 수북한 어른의 자아로 그런 치욕을 감수할 수는 없는 일이다. 결연하게 어른의 가오를 다진 정연이 창에 뺨을 기댔다. 덜 빠진 젖살을 말랑하니 짓누르는 서늘한 유리 너머로 가로수가 환영처럼 스쳐 지나가다가 멎었다. 신호에 걸린 모양이었다.
시간이 길어질수록 점차 답답해지는 차 안 공기에 한숨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한준이나 보고 싶다. 하루 열여섯 시간은 봐 온 소꿉친구가 떨어진 지 십 분 만에 그립다면 중증인가. 하지만 이 세계에 한준 얼굴보다 재밌는 게 있어야지. 속으로만 중얼중얼 불만을 늘어놓으며 창밖 풍경을 훑던 정연이 문득 눈을 크게 떴다.
아.
자각도 없이 터진 짧은 탄성에 왜 그래, 하고 앞자리에서 물어도 창문 밖만 뚫어져라 노려보던 정연이 흘러내린 가방끈을 추슬러 맸다. 저거, 저거. 저거!
“잠깐만 내려 주세요.”
“갑자기 왜.”
“저기 친구가 있어서요. 제가… 공책을 빌렸는데 돌려주는 걸 깜박했던 게 생각나서.”
내일 돌려주면 되잖니. 당황스러운 투로 답하는 여자와 백미러를 통해 눈이 마주쳤다. 이런 되도 않는 떼를 들어 본 건 처음이라는 듯한 아연한 태도에 정연이 다 미안해질 정도였으나, 지금 당장은 뻔뻔해질 필요가 있었다. 흰 형태가 골목 쪽으로 구르듯 들어가고 있었다. 이번에 놓치면 또 언제 찾을지 몰랐다.
“진짜 잠시만요, 오늘까지 돌려주기로 했어요.”
“식당 예약 시간 거의 다 됐어.”
말다툼하다가는 끝이 없겠다. 눈 굴려 신호등의 색만 가늠하다 차 문을 붙들고 더듬거렸다. 비싼 차는 안전장치도 싼 차랑 다른가. 한순간에 찾지 못해 손이 헛돌았다.
“그럼 먼저 가 계세요. 저는 알아서 갈게요.”
몇 번 헛손질 끝에 차 문 잠금장치를 해제한 정연이 반쯤 굴러떨어지듯 차에서 내렸다. 에어컨이 빵빵하게 틀어져 시원하다 못해 춥던 차 안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후끈한 바깥 공기가 밀려들었다.
“한정연!”
잽싸게 도로 닫은 차 문 뒤로 드물게도 매서운 외침이 들렸으나 정연은 아랑곳하지 않고 뛰었다. 어머니. 아들은 지금 악마를 무찌르고 소꿉친구라는 이름의 천사를 구하러 갑니다. 말리지 마세요. 애초에 금방 신호가 바뀔 테니 쫓아오지도 못하겠지만.
뜨끈한 아스팔트에서 모락모락 올라오는 김 탓에 얼마 뛰기도 전에 숨이 턱 막혔다. 초여름이라는데 덥기는 더럽게 덥다. 가냘프기로는 한 줌인 한준이 어떻게 이런 날씨에 축구를 다 했지. 역시 태권도. 산발적으로 흩어지는 생각을 그러모으는 대신 흘려보내며 인파 사이로 표적을 쫓았다.
끈적거리는 사람들과 몸이 맞붙는 기분에 얼굴을 찌푸린 정연이 눈여겨봐 둔 골목길로 들어섰다. 이리저리 이어져 미로 같은 골목 지날수록 사람이 줄어 뜀박질이 한층 수월해졌다. 물론 그즈음에는 아슬아슬하게 보이던 뒤꽁무니를 놓치고 말았지만, 찾던 것 마저 찾아가기가 어렵지는 않았다.
모서리의 벽돌 하나가 빠져 대신 돌이 괴어져 있는 붉은 벽돌담, 커다랗게 스프레이 낙서가 적힌 누런 회벽, 문을 열었는지 닫았는지도 모르겠는 낡은 국숫집.
정연 홀로 길거리를 돌아다닐 때에는 아무리 시간을 들여도 많고 많은 골목 사이에서 찾을 수 없었던, 스크립트 속의 모호한 묘사가 그대로 펼쳐졌다. 잘못 보지 않았다. 뛰는 속도가 빨라지고 숨이 가빠졌다.
실은 종종 의심했었다. 스물일곱 살의 정연이나 열 살의 한정연 중 어느 쪽이 허상이나 정신적 이상으로 인한 존재에 불과한 것이 아닌지 하는. 자기 전이면 이따금 악몽처럼 떠오르는 붉은빛 일색의 일러스트와 실황러 정연이 건조하게 읽을 뿐이던 스크립트의 바이트가 목 끝까지 꾸역꾸역 차올라 숨을 조이곤 했다. 꾸역꾸역 한준을 끌고 태권도를 배우고 샴푸를 바꾸게 하고 호신용품을 알아보면서도 정연은 꽤 자주 자신을 믿지 못했다. 하지만 아니다. 찾았다.
길가를 도도하게 뛰어가는 흰 고양이와 그 뒤를 쫓아가는,
바쁘게 뛰느라 넘어질 듯 위태한 몸을 부지하려 모서리 옆 전봇대를 붙잡고 방향을 꺾었다. 어느 집 뒷담인지 쳐 놓은 철창이며 우거진 관목과 넝쿨로 더는 길 없이 막다른 곳이었다. 함초롬하니 매달린 꽃이 붉고 노랬다. 능소화였다.
꽃그늘 아래서 조막만 한 애 하나가 흰 고양이를 쓰다듬고 있었다. 날씨 같은 건 모른다는 양 두툼하게 껴입은 목폴라가 소매 아래로 비죽이 나온 작은 손이 찜통 더위에 희고 긴, 빈말로도 깨끗하다고는 못 할 고양이 털을 부지런히 쓰다듬고 있었다. 언제 깎았는지 긴 손톱 밑으로 때가 꼬질꼬질하고 손등에는 짐승 이빨 자국 두 개가 점처럼 쫑쫑 남아 있었다.
“공주야, 찻길로 막 뛰면 안 돼.”
위험하잖아. 조곤조곤 쓰다듬는 손길만큼이나 보드랍게 소곤소곤, 말 못 알아듣는 동물에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정연은 저도 모르게 한 발짝을 더 다가갔다. 발치에 채인 자갈돌 하나가 굴렀다. 그제야 등 한 번 움츠린 아이가 이쪽으로 돌았다. 눈앞 가리도록 긴 머리칼이 바람에 얕게 흩어져 맨 얼굴이 설핏 드러났다.
고양이처럼 얄포름하게 올라간 눈매며 능소화 심지마냥 노르스름한 눈동자. 그 얼굴을 채 다 보기도 전에 정연은 확신했다.
찾았다.
강아지똥.
***
“공주마저 죽었을 때에는 말야. 다들 나를 떠나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그러다가 며칠 뒤에야 깨달았지. 공주는 떠난 게 아니라 계속 내 옆에 머물러 준 거였다고….”
피가 흐르고 살이 썩어 파리가 끓어도, 내가 아무것도 주지 않아도. 내가 얼마나 끔찍한 사람이어도, 내 곁에 얌전히 앉아서 나를 지켜 줬어.
준은 천진하게까지 들리는 소년의 중얼거림을 들으며 거세게 몸부림쳤다. 그러나 아무런 소용 없는 일이었다. 손목과 발목을 단단히 얽맨 밧줄도, 입술을 짓누르는 테이프도 틈 하나 없었다. 자신이 그 존재조차 모르는 사이에, 그를 둘러싼 거미줄은 차츰 견고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포식자의 손에 온전히 쥐여진 가여운 피식자. 그것이 준의 처지였다.
마냥 어리게만 보이던 소년은 이제 남모르게 벼려 온 칼을 집어 든 채 한 발짝씩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방바닥에 흥건한 피 위로 눈물이 떨어졌다. 그러나 소년은 마치 어떠한 동정심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웃음 지으며, 청혼하는 젊은 연인처럼 무릎을 꿇었다.
“형도 내 공주가 되어 줄래?”
***
이상 최서희 루트 메인 이벤트에서 발췌.
최서희. 주인공보다 한 살 어린 17세. 탈색을 두 번은 족히 했을 텐데도 머리카락 끝 하나 상하지 않아 타고 난 것처럼 보이는 반짝이는 금발. 귀에 빽빽하리만치 여럿 뚫은 피어싱. 화사한 웃음.
오토메 게임의 양아치 계열과 왕자님 계열 어느 중간쯤에 들 것 같은 외관 일러스트와 형도 내 공주가 되어 줄래, 하는 게임 다운로드 페이지의 소개 멘트를 본 정연은 짐작했었다. 아, 얘는 흔히 보이는 바람둥이 왕자님 계열 캐릭터구나. 그리고 게임을 공략하는 4시간 내내 뒤통수를 집요하게 얻어맞았다.
왕자는 왕자지. ‘왕도 이 정도로 자기중심적이진 않겠다’의 준말로 왕자. 알코올 중독자인 친부 아래에서 불우한 유년기를 보내다가 대기업 회장인 외조부에게 구해져 오냐오냐 부둥부둥 당 하는 재벌 3세가 되었다는 인생 역전의 배경 설정을 가진 최서희는, 응석받이로 자란 애들이 으레 그렇듯 욕심이 많고 제멋대로였다.
같은 걸 받아도 어떨 땐 기뻐하고 어떨 땐 준 사람 얼굴에 그대로 던져 버렸다. 원하는 건 꼭 손에 넣고 하고 싶은 일은 무조건 하며, 문제가 생기면 돈으로 해결한다. 참으로 고전적인 지랄의 형태였다.
그래서 좋아하는 음식이 한 시간 단위로 바뀌고, 좋아하는 사람은 대강 삼십 초 단위로 바뀌는. 변덕스럽고 자기중심적이며 선택지 하나로 멘탈 수치와 애정 수치가 끝과 끝으로 들쭉날쭉해지던, 그래서 공략 난이도가 몹시, 굉장히, 심하게 하드하던. 그런 최서희가.
정연은 차마 참지 못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최서희가….
쓰다듬던 고양이를 냅다 끌어안고 몸을 움츠린 어린애가 정연의 한숨에 또 몸을 움칠했다. 아직 조막만 해서 간이 작나. 제 키는 생각도 않고 어린애만 보면 다 조막만 하다 여기는 정연의 고개가 비뚤게 기울어졌다.
열 살의 한정연보다 한 뼘은 작은 녀석은 비쩍 마른 데다가 하필이면 제 몸보다 한 치수는 큰 긴팔 옷을 입고 있어 더 작아 보였다. 이제는 길게 기른 앞머리 사이로 사라져 버린 눈만 혼자 둥그러니 커서는 갓 태어난 새끼 고양이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그것도 물에 쫄딱 젖은. 애처로워 보이는 게 역시 교과서 삽화의 강아지똥 같기도 하고….
아무튼, 그 최서희가 이럴 줄은 몰랐는데.
“너희 집 고양이야?”
잠시의 어색한 대치를 견디다 못한 정연이 넌지시 물었다. 누가 뺏어가기라도 한다는 것마냥 꽉 웅크린 아이의 품에 갑갑하게 갇힌 고양이가 발톱을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날카로운 발톱이 멋대로 옷을 뜯고 할퀴었다.
습관처럼 아이 앞에 정연이 쪼그려 앉아, 얼추 높이가 비슷해진 시선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꿋꿋이 눈을 피했다. 대강 부정으로 해석이 가능할 모양새로 고개를 도리도리 저은 것이 상호 작용의 전부였다.
“그래? 우리 집 고양이도 아닌데.”
머리칼에 덮여 잘 보이지도 않는 아이의 머리에 대고 대강 중얼거렸다. 정연 스스로 느끼기에도 성의 없는 답변이었던지라 뒤늦게 헛기침 한 번이 따라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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