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소꿉친구 지키기 프로젝트-8화 (8/52)

#8

“안 뺏어갈 테니까 놔줘. 그러다 옷에 구멍 나겠다.”

아니다. 구멍은 이미 났구나. 좀 바보가 된 기분을 느낀 정연이 나지막이 어르듯 고쳐 말했다.

“…그러다 다치면 아프잖아.”

“…….”

이번엔 제법 부드러운 목소리라 생각했는데, 그대로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다는 양 제 몸뚱이를 작고 둥글게 만 어린애의 경계심이 사라지질 않는다. 제가 숨만 쉬어도 헤실헤실 웃는 한준만 봐 와서 그런가, 안 친한 애 다루는 법을 도통 모르는 정연이 다시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고는 꾸물꾸물 가방을 앞으로 돌려 매 속을 뒤적였다. 여기 어디 넣어 뒀을 텐데.

거의 어깨까지 가방 안에 욱여넣은 후에야 원하던 것을 찾아낸 정연이 손에 쥔 것을 불쑥 내밀었다. 고양이 그림 위로 닭고기인가 오리고기인가로 만들었다는 문구 떡하니 써진 노란 포장지가 반들거렸다.

“내가 주려고 했는데, 걔는 네가 더 좋은 것 같으니까.”

네가 줘. 소곤거린 정연이 고양이 간식 쥔 손을 꿋꿋이 내밀었다. 제가 직접 고양이에게 주는 방법도 있긴 있었지만. 공연히 남의 공주에게 과한 관심을 보였다가 얀데레 컨셉 시뮬레이션 공략 캐릭터답게 제 것에 대한 애착이 강한 최서희를 자극해 피 터지는 참사에 휘말리고 싶진 않았다.

비록 아직 손가락이 짤막하고 머리가 동그란 어린애라고는 하지만, 이래 보여도 이분께서는 사망으로 가는 루트를 타기 제일 쉬운 분이셨다. ‘한정연’이 집착, 감금, 납치, 스토킹, 살인 미수의 오관왕이라 한다면 최서희는 살인이라는 한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는 트리플샷 에스프레소 같은 범죄자라고나 할까. 질투가 나면 칼로 찌르고, 화가 나도 칼로 찌르고 너무 행복해도 칼로 찌르는….

그러니까, 아무리 덥수룩하게 길어 눈을 가리는 머리칼 아래로 보이는 뺨이 아직 솜털로 보송하다 하더라도, 경계심을 낮춰서는 안 된다. 안 되는데, 경계심을 버리면 안 되는 건 나지 네가 아니라고. 제발 좀 받아라.

정연이 속으로 온갖 헛소리 다 하고 삼백을 세며 시간을 보낼 때까지도 어린 최서희는 동그랗게 몸을 말고 고집스레 고양이를 끌어안은 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고양이 간식을 내민 손만 무안해져서 결국 바닥에 내려놓았다.

싫으면 싫다고 거절이라도 하지. 사나운 고양이 발톱이 이제는 숫제 생살까지 긁고 있는데도 여전히 끌어안은 채다. 이래서 어린애들이 어렵다니까. 정연은 자기도 열 살인 주제에 제법 오만한 생각을 하고는 다시 가방을 뒤졌다.

이번에 꺼낸 것은 포장지가 파랗게 반짝거리는 버터스카치 맛 사탕이었다. 내밀어도 받지 않을 것 같아서 고양이 간식 옆에 얌전히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목적은 찾는 것이 전부였으니 꼭 친해질 필요는 없겠지. 여기 있어 봤자 저 어린 최서희 팔뚝만 죄다 쥐어뜯기겠다. 절대 이것은 패배가 아니다. 전략적 후퇴다. 짧은 정신 승리 끝에 사탕은 네 거니까 고양이 주면 안 돼, 주의시킨 정연이 느릿느릿 뒷걸음질했다. 아. 그리고 더 할 말이 있었다.

“네가 싫으면 나는 더 안 올 테니까, 넌 내일도 여기 와. 알았지?”

찾는 데 얼마나 오래 걸렸는데, 어디로 쏠랑 사라져 버리면 골치 아플 테니까. 제 할 말 다 끝내자 그제야 걸음이 가벼워졌다. 정연은 그 길로 골목을 빠져나갔다. 뒤 한 번 돌아보지 않는 발걸음이 앓던 이 빠진 양 개운했다.

코끝까지 간지럽히는 긴 앞머리 사이로 동그란 눈 두 개가 내내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줄도 모르고.

***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던 골목길을 빠져나오자 바로 도시 소리가 들린다. 차의 경적, 사람들의 통화, 가게에서 줄지어 틀어 놓은 음악들. 여상한 소음들 사이로 걸으며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났는지 가늠하던 정연의 고개가 급작스레 비틀렸다. 방금 한정연, 하고 누가 부르지 않았나?

“한정연!”

착각이 아니었다. 한정연의 엄마가, 숨을 씩씩거리며 골목길 바깥 인도의 사람들 사이에 섞인 채 정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의 당혹을 느끼며 정연은 제 혀를 물었다. 어이구야. 어떻게 찾았지. 그나저나 차는 어떻게 하셨담. 도로 중간에 내버려 두고 왔을 리도 없고. 이런저런 생각이 머리를 맴도는 사이 성큼거리며 정연의 코앞까지 다가온 여자가 팔을 치켜들었다.

아, 때리려나.

눈도 감지 않고 멀뚱히 바라보던 정연의 몸이 한순간 뒤로 휘청였다. 다만 예상했던 타격도 피부와 마찰하는 아픔도 없었다. 그저 더웠다. 목덜미에 땀이 송글송글하게 맺히고 단정하게 묶었던 머리칼은 흐트러져서 더는 조금도 서늘해 보이지 않는 여자가 정연을 끌어안아서. 안는 방식이 우악스러워 팔이 조금 아프고 숨이 막혔다. 아니, 다른 모든 것보다도 더.

“집에 가서, 너, 아주 크게 혼날 줄 알아.”

으름장 놓는 목소리가, 저를 찾아 아주 오래 헤맨 것처럼 땀으로 눅눅해서 기분이 이상했다.

커피와 말린 오렌지꽃 향이 나는 포푸리도, 엉망진창으로 벗어던져 정연이 치우기 전까지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자그마한 한준의 슬리퍼며 구두, 레인 부츠 하나도 없이 그저 냉랭한 현관 바닥에 금방 벗은 운동화 한 켤레와 여성용 구두 한 쌍만 나란했다. 체감상 십몇 년 만에 들어서는 것처럼 느껴지는 제집 현관이 낯설다.

하긴, 아직 어린 정연 집에 혼자 있으면 위험할 것 같다며 매번 붙잡은 한준의 어머니와 그냥 저랑 같이 있고 싶으니 가지 말라며 핑계 하나 댈 생각도 않고 달라붙은 한준 덕에 이 집에는 들어올 일이 별로 없었다.

남의 집에 들어온 것마냥, 실제로 정연에게는 어느 정도는 남의 집이기는 한 공간을 슬쩍 두리번거리는 정연을 뒤로하고 정연의 어머니는 정장 재킷을 벗어 의자 위에 던지듯 걸어두었다. 깊게 내쉰 한숨에 어깨가 바짝 가물듯 내려앉았다.

조금 늦은 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내내, 그리고 지금까지도 두 사람 사이에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신발만큼이나 어색한 침묵이 흘렀지만, 저 기운 빠진 뒷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정말로 크게 혼나지’는 않을 것 같단 예감이 들었다.

적어도 당장 얻어맞을 것 같진 않았으므로, 잘못 하나만 해도 귀싸대기를 갈기던 성질 나쁜 고등학교 선생에 비하면 나을 것이다. 유난히 정연의 무표정한 낯을 재수 없다고 싫어하던 그 새끼가 개 같았던 정연은 부러 매를 벌듯 더 표정을 굳히고 멀뚱히 쳐다보고는 했다. 다 어렸을 때의 이야기다.

그때와 달리 지금의 정연은 적어도 속내는 어른이고, 한정연의 어머니에게 별다른 유감도 없었으므로 최대한 반성하는 어린이 같은 얼굴을 하려 노력했다. 착한 얼굴. 죄책감을 느끼는 얼굴.

정연이 얼굴 근육에 힘을 주는 사이 차가워 보이는 은회색 눈동자가 정연을 돌아봤다. 미미하게 찌푸려진 눈썹이 아니었으면 무표정이라 오인하기 딱 좋은 표정은 거울에서 자주 보는 모습과 똑 닮았다. 아무래도 한정연의 얼굴은 집에 들어오는 일이 적어 아예 얼굴도 가물가물해진 아버지보다는 이쪽을 닮은 모양이다.

첫머리 열 말을 고민하듯, 의자에 건 재킷을 만지작거리고 입술만 우물거리던 여자가 조금 늦게 물었다.

“엄마가 바빠서 너에게 신경 못 쓴다고 삐뚤어지려는 건 아니지?”

“설마요.”

반사적으로 답변이 튀어 나간 것에 정연 스스로도 조금 놀랐다. 하지만 사실이었으니 어쩔 수 없다. 정연은 자신이 사랑을 바라는 어린아이가 아니란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심지어 어렸을 때에도, 정에 목마른 어린애들이 원장님 무릎에 기어 올라가려 애를 쓸 때 정연은 외려 그 애들을 비웃는 쪽에 서 있었다.

생각해 보니 좀 싸가지가 없었던 것 같기도 한데. 아무튼, 자신에게 어딘가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선천적인 것이지 누군가의 양육 탓이 아니었다. 적어도 정연 스스로는 그렇게 믿었다. 그러므로 뒤이은 말도 사실이었다.

“노력하고 계시는 거 알아요.”

그러니까 괜찮아요. 여기까지가 정연이 발휘할 수 있는 최대의 솔직함이었다. 꾸며낸 기색 없이 중얼거린 말에 한정연의 어머니는 한참 후에야 눈가를 한 번 꾹 누르고 그럼 되었다 중얼거렸다. 뭐가 되었다는 건지는 그녀 스스로도 모르는 것 같았지만, 굳이 지적할 일도 아니라 정연은 고개를 어색하게 끄덕여 주었다.

차갑던 방 안에 조금의 온기가 맴돌기 시작한 것만 같았다.

***

그래서, 이거 보통 화해 이벤트 아닌가? 수많은 실황 방송을 통해 다져진 정연의 미연시 선택지 고르기 능력에 따르면 분명히 화해 이벤트였던 것 같은데, 억울하게도 삼십 분 정도 더 차에서 뛰어내리면 안 된다든가 하는 잔소리를 들은 정연은 그날 저녁 외출이 금지당했다.

그 말인즉슨 오늘은 제집에서 자야 한다는 말이었고, 곧 한준네 방에 준비되어 있는 이층 침대의 일층이 오늘은 빈다는 이야기였다. 그것이 정연이 그 흔한 야광별 스티커 하나 없이 어두운 한정연의 방에 홀로 누워 있는 이유다. 인생은 미연시가 아니었다. 당연하지만.

그나저나 걔 아직 나 없이 밤에 화장실 혼자 못 가는데. 어떻게 하지.

한준네 어머니는 밤에는 깨워도 잘 안 일어나시는데. 한준 열 살 먹고 잠자리에 실례하게 생겼다. 그럼 머리에 키 씌워서 동네 한 바퀴 돌고 오라 시켜야 하나….

자꾸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무는 게 도저히 잠들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서, 정연은 포기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에서 노트를 꺼냈다. 모르는 사람이 뒤지면 바로는 찾지 못할 가장 안쪽 주머니에 밀어 넣어 둔 대학 노트를 펼치고 샤프를 입술로 눌러 심을 꺼냈다. 잠이 오지 않으니 오늘 있었던 일이나 간편하게 정리해 둘 요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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