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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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로 한 주가 다 끝나도록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정연의 어머니는 다시 일자리로 돌아갔고, 정연은 다시 한준의 집에 머물렀으며, 날씨는 비 한번 오지 않고 맑았다. 정연이 학교만 끝나면 어물쩍 넘어가듯 한준을 떼어 놓고 어디론가 향한다거나 하는 소소한 일을 제외하면 언제나와 같은 날이었다.
그런데 그 작은 변화가 한준에게는 제법 컸는지, 금요일 방과 후 정연은 제 앞을 단호하게 가로막은 한준을 마주하고 말았다. 마침 분 바람으로 운동장 흙먼지가 일어 한준의 주변을 웅장하게 감쌌다.
“연아, 오늘도 어디 가?”
빠밤! 야생의 한준이 나타났다! 정연은 눈앞에 솔직히 말하기와 얼버무리기, 도주 같은 선택지가 아른거리는 전형적인 게임 중독자의 증세를 무시하고 한준의 어깨 아래로 흘러내린 가방끈을 추슬러 주었다.
“준아, 너 오늘 선생님이 여름 방학 숙제 말씀하시는 건 다 적었어?”
“응? 응! 우유곽으로 방 만드는 거랑, 일기 쓰는 거랑….”
정연이 말 돌리는 대로 조잘조잘 대답하던 한준이 일곱 개는 족히 되는 숙제를 다 읊고 나서야 문제를 알아차렸는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며 뺨에 공기를 넣어 부풀렸다. 정말 미안한 말이지만, 귀여워서 별로 심각해 보이지 않았다. 진짜 얘는 뭐지? 장래 희망이 천사 아이돌이라도 되는 건가?
눈이 돌아간 정연이 말 돌리는 것도 잠시 잊고 말랑말랑한 뺨을 손아귀 가득 쥐어 주물렀다. 또래 애들이 매양 주무르고 다니는 퀴즈 볼인가 스피드 볼인가 하는 것보다 두 배는 더 만지기 좋게 보드랍고 말랑한 볼이었다.
으브브븝, 항의도 못 하고 새는 발음으로 뭐라 웅얼거리며 억울하게 눈을 굴리는 한준이 그러거나 말거나, 정연은 말랑한 볼따구를 마음껏 만끽한 후에야 손을 놓아 주었다.
“잘 적었네. 이제 알림장도 혼자 잘 적으니까, 집에도 혼자 갈 수 있지?”
“그치만 벌써 며칠째 같이 안 가잖아….”
볼이 꼬집힌 게 싫었는지, 다시금 주어진 거절이 맘에 안 드는지 뺨이 벌겋게 달아오른 한준이 입술을 조금 비죽였다. 도저히 밉게 보이지 않는 그 보얀 얼굴은 정연이 저도 모르게 포슬포슬 보드라운 머리를 쓰다듬어 줄 정도로 애틋했다.
“이제 다음 주 월요일에 방학식만 하면, 하루 종일 같이 지내잖아. 그치?”
달래듯 말하면 타고난 성정이 순한 한준은 오래 떼쓰지 못하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착한 태도에 정연은 제가 마구 주물러 불난 뺨을 문질러 주고 보너스로 엉덩이까지 툭툭 두드려 주었다. 그제서야 한준이 미적미적 발길을 떼었다. 그래도 이번엔 용케 울지도 않고 간다.
무슨 일만 생기면 눈물이 퐁퐁 솟던 울보 한준을 비죽이 한준 정도로 바꿔 놓느라 온갖 노력, 주로 울려고 하면 빨리 눈에 힘주게 하기, 웃긴 얘기 하기, 울면 다시는 뽀뽀 안 해 준다 으름장 놓기 등을 기울인 나. 장하다. 짧은 자화자찬을 마친 정연이 한준의 동그란 뒤통수에 대고 모르는 사람 따라가지 말고, 앞 잘 보고 걸으라 외쳤다.
고개를 주억거리면서도 자꾸만 제 쪽을 돌아보는 한준의 조금 시무룩한 얼굴이 끝까지 마음에 걸렸지만, 정연은 매정하게도 그 천사같이 말랑한 얼굴을 뒤로할 수밖에 없었다. 준아. 이 형을 이해해라. 이게 다 너 커서 잘되라고 하는 일이다.
정연으로서도 어지간하면 한준을 떼어 놓고 다니고 싶지 않지만, 그리고 이왕이면 차라리 주머니 속에 넣어서 가지고 다니면서 우울할 때마다 얼굴이나 한 번씩 보고 싶지만 만나러 가는 사람이 사람이다 보니 그럴 수가 없다. 저 말랑한 햇살 같은 한준을 마주한 최서희가 미로 상자 속의 콩마냥 한눈에 반해 한준만 쫓는 처돌이 새싹이 될 건 안 봐도 뻔한 일이니까.
그리고 아직 조막만 한 그 녀석의 사랑은 결코 받아서 좋을 일이 하나도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아니, 애초에 너무 좋아서 같이 있고 싶다는 이유로 상대를 죽이려 하는 걸 사랑이라 불러도 되나.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도축장은 무슨 사랑의 러브호텔이라도 되는지.
속으로만 잘게 투덜거린 정연이 이제는 익숙해진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한 발짝을 경계로 마법같이 주변의 소음이 잦아드는 구석진 모퉁이에는 꼭 사진으로 찍힌 것마냥 같은 녀석이, 같은 모양새로 앉아 있다. 슬슬 익숙해져 가는 모습이었다.
싫으면 찾아오지 않겠다고 말한 게 무색하게 정연은 처음 골목길을 찾아낸 그 바로 다음 날 이곳을 기웃거렸다. 나름의 이유는 있었다. 찾느라 개고생해 놓고 녀석이 근거지를 옮기면 말짱 꽝이지 않은가.
어느 정도 더럽고 치사할 수 있다는 게 바로 어른의 특권이었으므로 둥글둥글하게 마모된 양심을 가진 정연은 별 죄책감도 가지지 않고 전봇대 뒤편에서 골목 안쪽을 기웃거렸다.
그리고 녀석에게 딱 걸렸다.
이번에는 실수로 돌을 차지도 않았는데 어찌 알았는지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지만, 최서희는 전봇대 뒤에 있는 정연을 찾아내고는 발치로 무언가를 던졌다. 무언가가 접힌 딱지인가 했더니 고양이 간식 포장지였다.
잘 먹였다는 증거인가, 아님 그냥 시비 거는 건가 고민하던 정연이 머쓱한 얼굴로 나온 것이 무색하게 최서희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단지 고양이를 끌어안은 채 골목길 중앙이 아니라 조금 왼쪽으로 비켜 앉았을 뿐이다. 딱 대칭으로 옆자리에 누가 앉으면 맞을 모양새였다.
그래서 정연은 그 자리에 앉았다. 그뿐이었다.
“나 왔어.”
괜히 가방을 한 번 끌어 올린 정연이 매번 그랬듯 최서희의 옆에 조금 거리를 두고 쪼그려 앉았다. 조금 늦게 최서희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질문 다섯 번을 하면 한 번 정도만 고개를 까딱하고 말던 녀석이 이제는 왔어, 소리에 알은체를 다 한다. 소소한 성취감과 자괴감을 동시에 느낀 정연이 저도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시선을 깔았다.
최서희의 부지런한 손아귀 아래에서 빈둥거리며 팔다리, 아니 다리와 다리를 늘어뜨린 고양이, 공주가 보였다. 팔자 좋네, 하는 추임새가 절로 흘러나왔다. 누군 소꿉친구 팔자 좀 되살려 보자고 쌔빠지게 머리 굴리고 있는데. 고양이 팔자가 진정 공주 팔자였다.
공연히 손을 뻗어 허연 고양이 뱃가죽을 꾹 누르자 옆에서 따꼼한 시선이 와 닿았다. 정연이 슬쩍 손을 떼고 아무 일도 안 한 척 고개를 돌려서야 시선이 떨어져 나갔다. 거참. 한 번 만졌다고 열심히도 꼽 주네.
잠시 딴청을 부린 정연이 이내 제 가방을 부스럭거리며 열어 고양이 간식을 꺼냈다. 닭 가슴살로 만들어졌다느니 어쩌니 하는 간식을 제가 안 주고 꼭 최서희의 손을 타고 공주에게 가도록 하는 것도 언제나의 수순이었다. 조공품을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인 최서희가 포장을 뜯고 공주의 입으로 동그란 간식을 들이밀었다.
챱챱, 고양이 혓바닥이 간식을 부지런히 핥는 소리가 선명했다. 맛있게도 먹는다. 아직 어린 나이 탓에 인터넷 사용이 금지된 정연은 턱을 괸 채 X튜브 먹방 ASMR을 직관하는 심정으로 공주의 식사를 지켜보았다. 백만 뷰, 갈 수 있겠습니까? 글쎄요. 아무래도 메뉴의 다양화가 관건일 듯한데요….
애답지 않게 차고 건조해 뵈는 겉모습으로 보면 아무도 상상 못 할 정도의 뇌내 헛소리 잔치를 벌인 정연이 정신을 수습했을 때에는 이미 최서희가 먹일 만큼 먹이고 남은 간식을 돌돌 말아 해진 주머니에 집어넣는 중이었다. 둘째 날에 던진 빈 봉지를 보고 설마 간식 한 봉지를 다 먹인 거냐 기함했더니 이젠 나눠서 먹일 줄도 아는 모양이다.
제법 기특하다. 아직은 아무도, 아무것도 안 죽였고. 무릎 위로 턱을 괸 채 간식을 갈무리하는 최서희를 보던 정연이 이번에는 주머니에서 사탕을 세 개 꺼냈다. 빨강, 노랑, 파랑 색색깔로 포장지가 반짝거리는 버터스카치 사탕이었다.
“오늘은 무슨 맛 먹을래?”
녀석이 대답 없이 눈만 깜박였다.
“너 몰라? 포장지 색깔별로 다 맛이 다르거든.”
봐, 파란색이 바닐라 맛이고, 노란색이 버터 맛이고, 빨간색이 커피 맛. 손바닥 위에 사탕 세 개를 줄 세우듯 올려 두고서 콕콕 집어 가며 설명하는 정연에게 어딘가 뾰족한 눈빛이 와 닿았다.
뭔가 불길한데. 아니나 다를까, 무턱대고 사탕을 몽땅 낚아채려는 것처럼 녀석이 냅다 손을 움켰다. 아이고, 짧게 신음한 정연이 타이밍 좋게 주먹을 꼭 쥐고는 뒤로 샥 감춰 결과적으로 약탈에 실패했으니 녀석으로선 아쉬운 일이다.
기특하다 했더니 바로 이 모양이지. 정연이 짧게 혀를 찼다.
“안 돼.”
이어진 제지에 최서희가 호시탐탐 간식을 노리는 고양이마냥, 등 뒤로 감춰진 손안을 투시라도 할 것처럼 노려보았다.
“왜?”
이게 바로 전설의 왜 신공인가. 우리 준이는 왜도 잘 안 하고 웅, 그렇구나 하고 착하게 넘어가고는 했는데. 새삼스레 말랑말랑 한준을 그리워한 정연이 어린이 시선에 맞추어 차분하게 설명했다.
“왜냐하면… 네가 사탕 세 개를 다 먹으면 나랑 내 친구는 못 먹거든.”
그 말을 들은 최서희는 딱 그래서 뭐? 하는 얼굴이었다. 녀석. 싹수도 노랗고.
“혼자서 먹는 것보다는 나눠 먹는 게 더 좋잖… 아.”
한때 자본 독식 및 건물주 되기가 꿈이던 다 큰 어른이 새싹 같은 아홉 살에게 뻔뻔한 얼굴로 거짓말을 했다. 이건 하얀 거짓말이지, 암. 긍정 회로 돌리기도 빠르게 완료한 정연이 흐린 말끝을 무마하듯 최서희의 동그란 머리를 샥샥 쓰다듬었다. 한준에게 하던 버릇대로이던 손길을, 정연이 자각하기도 이전 최서희가 사납게 쳐 냈다. 길게 깨진 손톱이 손을 살짝 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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