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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꿉친구 지키기 프로젝트-11화 (11/52)

#11

아야, 성의 없이 말한 정연이 손을 거두었다. 쳐 낸 건 저면서, 맞은 사람이 자기라도 된다는 양 입술을 우물거리고 숨을 색색거리는 녀석이 보였다. 하기는, 만난 지 며칠도 안 된 애한테 머리 쓰다듬어지고 좋아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나. 물론 한준은 제외하고. 한준은 사람이 아니라 천사니까.

납득한 정연이 선선히 미안하다 사과하려 입을 열려는 순간, 선수 치듯 최서희가 쏘아붙였다.

“…등신 같아.”

“그래, 미… 뭐?”

미쳤나?

아홉 살짜리의 입에서 나오기에는 지나치게 원색적인 말이었으며, 저보다 약 스무 살 정도가 어린 애에게 들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한 말이었다. 순간 머리가 어질해지는 것을 느끼며 정연은 이마를 짚었다. 아아. 유교맨은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물론 정말로 정신을 잃지는 않았다. 대신 정연은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손을 뻗어, 이 얄밉고 좀 되바라진 녀석의 뺨을… 양손으로 꼬집었다!

“너, 누가 그런 나쁜 말 하래.”

그렇게 응징 아닌 응징을 가한 정연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덥썩이 아니라 포옥, 같은 효과음이 날 정도로 손힘은 약했다. 어쨌건, 정연은 어른이었지만 미래에 되도록 살해당하지 않고 살고 싶은 어른이었다. 정말 눈물겨운 일이다.

그렇게 붙잡은 뺨은 예상했던 것보다도 마른 촉감이었다. 두툼하니 말랑한 살 하나 없이 바로 손끝에 뼈가 느껴졌다. 이게 진정 어린애 볼따군가. 믿을 수 없었던 정연이 몇 번을 주물럭거려도 결과는 같았다.

한준의 말랑말랑 보들보들 토실토실한 볼살만 주무르는 호화스러운 손맛에 익숙해져 있던 정연에게는 내심 충격인 일이라, 절로 볼을 잡았던 손이 풀려 툭 떨어졌다. 절대로 맞는 게 싫어서 놓았다거나, 쫄았다거나 한 건 아니다. 마침 다시 정연의 손을 쳐 내려는 것마냥 손을 들어 올리던 최서희가 정연을 빤히 노려보면서 또박또박 말했다.

“하든 말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거야.”

전 세계 부모들이 첫머리만 들어도 질색을 한다는 생떼 목록의 넘버 쓰리 정도에는 들 법한 대사를 내뱉은 최서희가 숨을 쌔근거렸다. 거세고 멋있는 반항을 준비하던 터에 정연이 잽싸게 손을 먼저 떼어 버린 것이 꽤 얄밉게 여겨지는 모양이었다. 타각타각, 불꽃마냥 성질낼 마음 만만으로 보이는 녀석을 바라본 정연이 제 뒷머리를 북북 문질렀다. 이걸 어떻게 한담.

“알았어,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는데. 근데 좀, 생각해 보자. 응?”

워, 워. 투레질하는 소를 달래듯 손을 설설 흔들었더니 녀석이 일단 입술을 다물었다. 당장 더 화내진 않을 모양새라서 안심한 정연이 슬금슬금 시동을 걸었다. 한준 키우면서 생긴 언변술 스킬을 발휘할 시간이었다.

“자, 봐. 너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말, 들어 봤어, 안 들어 봤어?”

“…들어 봤어.”

그렇게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다니. 이미 너는 진 거나 다름없다, 꼬마야.

“그치? 내가 살다 보니까. 그 말, 진짜 틀린 거 하나 없더라고.”

세상 사는 데엔 공짜가 없어. 다 기브 앤 테이크, 주고받기, 공수래공수거지. 아. 후자는 좀 다른가. 주절주절, 진지한 표정에 어울리지도 않는 말을 늘어놓기 시작한 정연을 최서희가 미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 눈에 어려 있던 경계심이 또라이를 보는 듯한 은은한 당황으로 변하는 것을 감지한 정연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맞는 말 하는데 왜 저런 얼굴로 보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정연은 본디 세상의 반응에 그다지 개의치 않았으므로 계속 말을 이었다.

“아무튼, 내가 너한테 사탕을 준 것도 무료는 아니라는 거지.”

“너… 너 빚쟁이야? 용역 깡패야?”

최서희가 조금 말을 더듬으며 내뱉은 그 사나운 물음에는 어린 게 벌써, 하는 비난이 서려 있는 것 같았지만, 아홉 살 주제에 등신이니 뭐니 하는 애에 비하면 본인은 평타라고 여긴 정연은 전혀 머쓱해지지 않았다. 그저 둘 다 아닌데, 하고 어깨를 으쓱였을 뿐이다.

“말은 마지막까지 들어야지. 그러니까 내가 너한테 사탕을 줬으면, 너도 나한테 뭔가를 줘야 해. 이해해?”

잠시 침묵이 흘렀다. 어린 나이를 내세워 이해 못 했다고, 모르는 일이라고 생떼를 쓸 법도 한데 녀석은 뭔가를 생각하듯 입술을 꼭 다문 채 진지하게 무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공주는 못 줘.”

그러고는 불한당으로부터 공주를 지키는 영웅마냥 결연하게 하얀 고양이를 끌어안는다. 재투성이 공주 같은 그 고양이는 그래도 요새 최서희에게 제법 간식을 얻어먹었답시고 손톱을 세우지 않고 얌전히 안겨 콧잔등만 실룩거렸다.

고 간식 출처는 정연인 걸 아는지 모르는지, 요 배은망덕한 녀석. 정연이 좀 억울해하거나 말거나 꼬질꼬질한 고양이와 꼬질꼬질한 어린애 하나가 서로 꼭 끌어안은 모습은 제법 정다웠다. 이거 혹시 내가 악당이 되는 포지션인가? 자문한 정연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공주는 안 데려가. 애초에 살아 있는 건 주고받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럼 나는 줄 거 없어.”

공주 말고 아무것도 없거든. 예민한 음울함이 잔뜩 새겨진 음색으로 중얼거린 최서희가 고양이의 이마에 뺨을 부볐다. 생전 목욕을 한 번이라도 했을까 의문인, 흰색 털이 거의 회색으로 얼룩진 데다 벼룩이 있을지도 모르는 길짐승을 참 애틋하게도 여긴다.

“그런 거 달라는 게 아냐. 그러니까… 너는 아닐 수도 있지만 나는 다른 사람이랑 같이 맛있는 거 먹는 게 좋거든. 그래서 너랑 나눠 먹고 네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는 게 내가 받고 싶은 거야.”

혼자 먹으면 맛있는 것도 맛없어지는 것 같단 말야. 중얼거린 정연이 흘긋 눈치를 살폈다. 그러니까 남들이랑 뭣 좀 나눠 쓰고, 네 물건에 손댔다고 사람 패지 말고, 한준한테 집착 좀 하지 말고. 내포된 속뜻은 길었지만 지금의 최서희에게 말해서 먹힐 내용은 아니었기에 거기까진 말하지 않았다.

최서희가 이번에도 무슨 헛소리냐고 비난할 것을 감수하고 한 말이었는데, 의외로 녀석은 반발이 없었다. 덥수룩한 앞머리 너머로 눈만 깜박이나 싶더니 말하느라 느슨해진 정연의 손안으로 손가락을 꾹 비집어 넣어 무엇을 훔쳤을 뿐이다. 막기도 전에 벌어진 일에 얼떨떨해진 정연이 제 손을 펼쳐 확인하자 빨갛고 노란 사탕만 남아 있는 것이, 정말 하나만 가져간 모양이었다.

“착하네.”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저런 설득에 넘어가다니 자신의 설득 능력이 대단한 것인지 최서희가 아직 어려서 주입식 교육이 잘 먹히는 건지 정연은 조금 헷갈렸다. 포장지를 바스락거린 최서희가 칭찬은 못 들은 척 사탕만 입에 넣었다. 그렇게 새침한 고양이마냥 굴어 봤자 단것이 입에 들어가면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가는 것을 정연은 이미 알았지만. 어른답게 모르는 척해 주었다.

애들 꺅꺅대는 소리로 시끄러운 교실이 간식 한 번 돌리면 조용해지는 것처럼 입에 사탕을 문 최서희도 제법 얌전해졌다. 이제 손 줘 봐, 하는 정연의 말에 얌전히 제 손을 정연의 앞에 내밀어 둘 정도로.

정연은 앞으로 내밀어진 손이며 팔뚝을 뒤집어 가며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여전히 손끝 말고는 잘 보이지도 않게끔 긴 소맷자락 아래에는 정연이 둘째 날엔가 가져와 붙여 주었던 반창고가 아직도 붙어 있었다.

정연이 때가 타서 지저분한 데다가 축축해 끝부분이 말려 올라간 반창고 끄트머리를 막 잡아당기려 하던 차, 최서희의 손이 뒤로 샥 도망쳤다. 이번엔 또 왜 그러나. 반창고를 채 떼어 내지 못하고 놓친 정연이 떨떠름하게 물었다.

“왜 그래?”

“왜?”

“어?”

“왜?”

아니, 왜 그러냐고 내가 먼저 물어봤잖아. 작게 툴툴거린 정연을 본 최서희가 코끝을 한번 찡그리더니 조금 길게 고쳐 말했다.

“왜 가져가?”

음. 딱 세 글자 늘었네. 상세한 질문 감사합니다, 예. 예.

그보다도 가져가는 게 아니라 떼어서 버리려던 건데. 원래 제 것에 대한 집착이 강한 최서희니 제 손에 하루 종일 붙이고 다니던 꼬질꼬질한 밴드도 나름 제 것이라 정을 붙였나. 그렇게 생각하면 이해 못 할 것도 아니었다.

다만 정연의 또래 애들은 슬슬 캐릭터 스케치북이나 캐릭터 반창고 같은 깜찍하고 앙큼한 물품 같은 건 어린애나 하는 거라면서 객기를 부리곤 했었다. 당연한 수순으로 최서희도 이런 캐릭터 밴드는 싫어할 줄 알았는데, 그래도 꽤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때가 타서 이제는 펭귄 얼굴도 알아보기 힘든 병균 덩어리에까지 소유권을 주장하다니.

그래도 지저분한 상태로 두었다가는 상처를 보호하는 게 아니라 병균 사육장이 될 모양새라서, 정연은 한준을 꼬실 때 종종 쓰던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슬슬 녀석을 꼬드겼다.

“그거 주면 내가 새 밴드 줄게. 이거 봐. 깨끗하고, 반짝반짝하고, 아무 무늬도 없고.”

“싫어.”

설득에 넘어가기는커녕 본인이 호락호락하지 않은 꼬마임을 피력이라도 하려는 건지 새침하게 손을 감춘 녀석이 아예 시선까지 돌려 버렸다. 혹시 단호박이신가요? 단호하시네요. 정연은 녀석이 들으면 질색할 것 같은 농담을 속으로만 주워섬기며 눈동자를 굴렸다.

“왜 싫어.”

“…….”

“아무 무늬도 없는 거라 그래? 그러면 내가 캐릭터 그려 줄게. 나 잘 그려.”

토끼도 그리고, 파란 펭귄도 그릴 줄 알고, 수달도 그릴 줄 알고. 기묘한 승부감에 아무 말이나 던져 가며 이래도 뚱, 저래도 뚱한 최서희의 반응을 살폈다. 그러던 정연이 마침내 내가 왜 생판 남인 어린애 손에 굳이 새 밴드 붙이려 애쓰고 있는 거지? 하는 의문을 가졌을 때엔 이미 손에 네임펜이 들려 있었다. 이거 내가 꺼냈나? 자식. 누군지 참 민첩하기도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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