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어쨌건, 네임펜을 손에 들었으면 이름은 못 적어도 선이라도 그어야 하는 법. 녀석의 꼬질꼬질한 반창고를 조심조심 뜯어낸 정연이 하얗게 불어 쪼글쪼글해진 피부 위를 후, 한 번 불어 주고는 새 반창고를 뜯었다. 손가락이며 팔뚝의 생채기를 새 밴드로 대강 감싼 정연이 이로 네임펜 뚜껑을 물어 열었다.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주제에 둥글둥글하고 귀여운 캐릭터라면 사족을 못 쓰는 한준 덕분에 캐릭터 그리는 연습을 공책 가득 해 본 적 있는 정연은 나름 자신만만했다. 누구나 일을 시작하기 전에는 그럴듯한 계획이 있는 법이다.
하지만 그 드높던 자신감은 밴드 위로 콕 내리찍은 네임펜이 첫 선부터 장대하게 미끄러지면서 급속도로 낙하했다. 반창고라 그런가 미끄럽다. 변명하듯 중얼거린 정연이 어떻게든 수습해 보려 부지런히 펜 끝을 놀렸다.
지익. 직. 찍. 삑. 지이익.
잠시 골목길 안으로 매끄러운 밴드 표면 위로 펜촉이 미끄러지는 소리만 울렸다. 이윽고 그 소리가 멎었을 때에는 밴드 위에 둥그런… 아니, 사실 둥그렇다고 하기엔 좀 찌그러지고 각진 토끼인지 곰인지 사슴인지 모를 캐릭터 그림이 수놓아져 있었다. 거기까진 괜찮았다. 나름 눈도 있고 코도 있으니 말이다.
문제는 자꾸만 장대하게 미끄러진 펜촉이 녀석의 손가락에까지 자국을 남겨서, 마치 캐릭터의 주변으로 사자 갈기 같은 선들이 뻗쳐 있었다는 것이다. 이제 이 동물은 토끼일까요, 곰일까요, 사슴일까요, 사자일까요. 그것이 문제입니다. 배점은 5점.
누가 봐도 성공이라기에는 영 아니올시다, 하는 모양새라 정연은 조금 녀석의 눈치를 살폈다. 이거 또 성질내는 거 아냐, 했는데 의외로 녀석은 조용히 제 손을 살피고 있었다. 머리칼 아래로 샛노란 눈동자가 부지런히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굴렀다.
설마 마음에 들었나? 그런 건가? 나의 그림에 잠재된 매력을 알아차린 것인가. 정연이 희망 회로를 돌린 것이 무색하게, 녀석의 평이 떨어졌다.
“이상해.”
거참 칼 같다. 하지만 저 스스로도 조금은 찔리는 구석이 있던 정연이 지워 줄까? 물었더니 거기엔 또 고개를 도리질 쳤다. 그러면서 펜으로 얼룩덜룩한 제 손가락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게 이상하다고 말한 애치고는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맨날 보는 것이 애들이지만, 봐도 봐도 모르겠는 것이 애들 마음이다.
새삼스레 한탄하던 그때 딩동, 하고 알람 소리가 울렸다. 정연이 최서희를 찾아 차를 뛰쳐나갔던 다음 날, 정연의 어머니가 보내 준 아동용 전화 기기에서 울린 소리였다. 인터넷은 안 되지만 전화나 문자는 되는. 설명은 없었지만 아마 위치 추적도 될 것이다.
알람을 울리게 한 메시지를 살펴보자 보낸 사람의 이름에는 엄마, 두 글자가 떴다. 한 줄짜리 간단하기 짝이 없는 메시지는 별일 없이 집에 들어갔느냐는 물음이었다. 학교 끝난 지는 한참 지났지만 어머니는 한창 일할 시간이었다. 회의 중간에 보내시기라도 한 건가.
어쩐지 겸연쩍어진 정연이 제 뒷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살짝 노을이 질락 말락 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늘은 별일 안 했다고 생각했는데도 시간이 조금 늦었다. 집까진 차로는 금방이어도 걸어서는 꽤 걸리기에, 어두워지기 전에 집에 가려면 이제 슬슬 출발해야 했다.
“나 이제 가야 돼.”
나직이 고한 정연이 가방을 잘 갈무리한 채 무릎을 털고 일어났다. 여전히 쪼그려 앉은 최서희가 이쪽을 올려다본다. 빛을 저 홀로 몽땅 삼키는 것처럼 까만 머리카락이 옆으로 흘러내려 노오란 눈이 설핏 드러났다.
“가?”
“어, 가야지. 여기서 살 수는 없잖아.”
어제고 그제고 정연이 가든 말든 본체만체하더니, 오늘은 웬일로 시선이 오래도록 정연에게 머물렀다. 버석하게 껍질 일어난 입술이 작게 옴짝거렸다.
“나중에.”
“나중에?”
정연이 한 번 따라 물었더니 금방 또 눈을 뾰족하게 뜬다. 인내심 없긴.
“말 따라 하지 마.”
알았어, 알았어. 그렇게 고개를 끄덕여 주고 손을 바지 주머니에 꿴 정연이 할 말 하라는 양 잠시 입을 다물어 주었다. 그러고도 조금을 더 망설이듯 말이 없던 녀석이 곧 툭, 하고 말을 던졌다.
“…또 와.”
제 할 말 마친 최서희가 금방 고개를 훽, 돌렸다. 길고 비죽비죽한 뒷머리 사이로 드러난 목이 약간 붉어서, 정연은 어른답게 웃음을 참느라 주먹을 꼭 쥐어야 했다. 내버려 두면 미래에 개 짱 미친놈이 될 녀석은, 아직은 어려서 그런지 나름대로 귀여운 면도 있었다. 꼭 얀데레가 아니라 츤데레라도 되는 것처럼.
크흠, 헛기침을 한 번 한 정연이 속삭였다. 다음 주에 또 올게. 대답은 돌아오지 않기에 그대로 돌아서 골목을 나왔다. 딱 이대로만 자라면 정연이 걱정하는 일도 일어나지 않고, 참 좋을 텐데. 길고양이라도 길들인 것 같은 미묘한 충족감이 손바닥 안쪽을 간질거리는 것 같아서, 주머니 속에 꿰어 둔 손가락이 혼자 꼬물거렸다.
집에 가는 길, 끝이 바스러져 모서리가 둥그런 붉은 벽돌 담을 지나면서 정연은 휘파람을 불었다. 삐뚤거리는 가락이 더운 공기를 타고 높게, 높게 흘렀다.
***
월요일은 방학식이었다. 이 아이 저 아이 할 것 없이 가방 안에 사물함의 물건을 급하게 모조리 쓸어 넣고는 무겁지만 가벼운 역설적 발걸음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날.
하지만 이 번잡스럽다면 번잡스러운 과정은 이 주 전부터 조금씩 리코더니 스케치북이니 하는 것들을 전부 집으로 옮겨 두었던 정연에게는 그저 남의 일이었다. 한준에게도 더 쓰지 않을 물건은 바로바로 집에 옮겨 두라 당부했었으니 오늘 두 사람은 그냥 가벼운 손과 그만큼 가벼운 발걸음으로 털레털레 집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분명 그랬을 텐데.
가방을 다 몰아 싼 애들이 먼저 하나둘씩 교실을 빠져나가 어느 정도 휑해졌는데도 저에게 함께 가자 손을 잡아끌 한준이 보이지 않았다. 정연 없이 혼자 집에 돌아가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슬픈 일이라는 양 요새 계속 기운이 없던 한준은, 방학식 날에는 같이 가자는 정연의 말에 뛸 듯이 기뻐했었다. 그러니 혼자 가진 않았을 것이다. 화장실이라도 갔나. 그렇기엔 돌아오지 않는 시간이 긴데.
책상에 걸터앉은 정연이 고민하며 다리를 달랑달랑 흔들었다. 발 사이즈에 딱 맞춰 샀더니 어느새 또 조금 작아진 실내화가 발끝에 매달려 덜렁거렸다. 설마 토요일에 치과 데려간 것 때문에 아직도 삐져서 혼자 갔나. 한준이 싫어, 싫어 하고 우는데도 매정하게 손만 잡은 채 괜찮아 염불만 외워 주던 건 좀 심했던 걸까.
아냐, 치과에서는 한껏 토라져 있더니 손잡고 집에 오는 길에는 금세 구름이 고래 모양이라며 또 헤헤 웃었으니 그것도 아닌데.
아, 아니면 점심마다 같이 축구 하던 다른 반 애들하고 작별 인사라도 하고 있나? 방학 동안만의 짧디짧은 이별이지만 그 나이대 애들에게는 나름 긴 시간일 테니까. 초를 세듯 생각하던 정연이 결국 속이 비어 가벼운 가방을 등에 메고 한준을 찾아 복도로 나섰다. 정연의 시야로 애들이 전부 빠져나간 텅 빈 교실이 줄줄이 스쳐 지나갔다. 여기도 없고, 여기도 없고.
나름 숨은그림찾기 게임도 잘한다는 나름의 자부심이 있던 정연이 꼼꼼히 이곳저곳을 훑으며 걷다가 우뚝 멈췄다. 눈을 찡그려도 사라지지 않는 이상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화장실 앞에 애들 여럿이 강강술래라도 하듯 둥글게 모여 있었다.
그것뿐이면 이상하다고까진 하지 않겠는데, 하필 여자 화장실 앞에 남자애들이 그렇게 우글우글 모여 있다는 점이 꽤 묘했다. 눈살을 찌푸리고 그쪽을 보고 있자니 어딘가 익숙한 밤톨 머리가 눈에 쏙 들어왔다.
어딘가 불길한 기분에 정연이 그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발뒤축에서 접혀 둔탁한 느낌을 주는 실내화가 거슬리지 않을 정도로 신경이 그쪽에 쏠렸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웅성거리는 소리가 선명해졌다.
“…주제에!”
무어라 다투는, 혹은 일방적으로 몰아붙이기라도 하는 듯한 목소리. 변성기도 오지 않은 얄팍한 악의가 소란으로 엉켜 복도에 쟁쟁히 울렸다.
그리고 그 틈새, 저마다 울룩불룩 튀어나온 머리들 사이로 저 홀로 한 뼘이 작은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검게 그을리고 탄 머리칼과 피부들 사이에서 저 홀로 옅은 아이였다. 한정연의, 정연의 단 하나뿐인 소꿉친구.
저도 자각하지 못한 사이에 정연은 뛰고 있었다. 한 발짝, 그리고 또 한 발짝이 가까워질 때마다 또래 아이들로 이루어진 벽 안쪽에서 울먹거리는 한준의 얼굴이 눈에 선명히 박혀 들었다. 일러스트 속에서 본 것보다는 어린 얼굴이지만, 그럼에도 몇 번이고 보았던 ‘그 표정’이었다.
크게 슬퍼 본 적도 절망한 적도 없는 정연으로서는 짐작할 수조차 없는 슬픔이 어룽지다 끝내는 눈물이 되어 떨어지려 했다. 그러나 한준은 게임에서 그랬듯 울어 버리는 대신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주먹을 둥글게 말아 쥔 채로 울음을 참고 있었다. 그러나 버티려고 아무리 애써도 덜 자란 몸은 겨우 또래 애들이 밀치는 것만으로도 바닷가 모래마냥 속절없이 하얗게 밀려났다.
한준을 둘러싸고 여럿이 몰이사냥이라도 하는 것마냥 한준을 툭툭 밀어 화장실 입구 쪽으로 밀었다. 한 번 밀칠 적마다 꼭 독한 말이 따라붙었다.
“너 한정연 좋아하지? 남자가 무슨 남자를 좋아하냐?”
야. 그렇게 말하면 너는 꼭 생전 너희 아빠랑 할아버지한테 사랑 한 번 못 받은 것 같잖아.
“맞아, 너 여자야?”
여자면 어쩌게.
“축구도 못하는 게!”
방금 말한 너는, 내가 너 맨땅에 헛발질하는 것만 다섯 번은 본 것 같은데.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