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정연은 언제나 그랬듯 장난삼아 속으로 태클을 걸다가 지금은 조금도 웃기지 않아 그만두었다. 사람이 어이가 없으면 머리가 새하얘지는구나. 살면서 당황할 일이 별로 없던 그의 첫 깨달음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떠오르는 건 오직, 게임. 이상성 프로토콜.
이런 이벤트가 원래 있었나?
아무리 켜켜이 쌓인 정연의 기억을 헤집어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다,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릿속을 더듬으며 뜀박질을 내딛던 어느 순간에야 우연히 번개가 내리쳐 구름 사이를 쪼개듯 강렬하고 간명한 깨달음이 정연의 뇌리를 스쳤다.
이런 일은 원작에 나오지 않았다.
이건 그저 ‘어릴 때부터 한정연은 항상 준을 구해 주었다’는 한 줄의 서사를 완성시키기 위한 상황 중의 하나일 테니까.
한준의 자존심을 약탈해 결국 물렁물렁 흐물흐물한, 쿡 찌르면 눈 밑 발갛게 물들이며 눈물 흘리는 외롭고 연약한 비운의 연애 시뮬레이션 주인공으로 만들기 위한 많고 많은 사건 중의 하나.
이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한정연은 언제나 한준을 ‘구했다’.
한정연은 어릴 때부터 한준에게 손끝 하나라도 댄 또래 애들을 뒤에서 죽도록 쥐어팼다. 팬 곳 또 패며 집요하게 쥐 잡듯 잡았다. 그렇게 한 차례 일을 치르고 나면 더는 아무도 한준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괴롭히지는 않았지만, 친해지지도 않았다. 당연한 수순처럼 한준은 예쁘지만 너무 비싸서 다가가면 안 되는 관상품이 되었다. 한정연의 구원이란 그토록 외로움을 전제한 것이었다.
정연은 그렇게 할 마음이 없었다.
그럼 내버려 둘 거야? 불만에 가득 찬 열 살짜리 한정연이 새끼 실뱀처럼 몸을 뒤틀고 내장을 꾹꾹 짓눌렀다. 분노가 꼭 누르면 터질 고름처럼 자글자글하게 차올랐다. 가슴팍을 떠밀려 결국 화장실 안으로 넘어지듯 엉덩방아를 찧은 한준을 눈에 담은 정연이 대꾸했다.
아니, 그건 아니지.
깡-!
뛰듯이 몸을 던진 정연이 꽉 쥔 주먹을 뒤로 젖혔다가 내리쳐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박박머리 밤톨을 쥐어박았다. 손으로 뒤통수를 후렸는데 깡통 차는 소리가 났다. 악, 비명을 지른 밤톨이 제 머리를 쥐어 잡고 주저앉았다. 설마하니 최근 수업만 끝나면 쌩하니 사라지던 정연이 여기서 등장할 줄은 몰랐는지, 주변 애들까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너, 너 뭐야! 왜 여기 있어!”
“나? 너희 보러 왔지.”
물론 거짓말이었다. 덜 여물어 그런지 욱신거려 오는 손을 한번 탈탈 턴 정연이 다시 주먹을 치켜들었다. 다굴이라도 치려는지 마구잡이로 버둥거리며 달려드는 팔들을 잡아 뜯고 집요하게 머리만 깡깡 내리쳤다. 머릿속으로 어디선가 들었던 것만 같은 트럼펫 소리와 함께 족쳐~ 족쳐~ 하는 노랫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정연 테마곡은 피아노곡이었던 것 같은데, 나는 뽕짝이라도 되는 걸까. 머리를 난타하면서 혼자 히죽이는 저를 본 꼬마들이 겁에 질리는 것도 모르고 정연은 조금 웃었다.
그 와중에 한 사람당 딱 한 대만 쳤으므로 정연은 자신이 제법, 이성적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뼈마디도 아니고 손 옆면으로 때렸으니 이 정도면 양심적으로 때리기 대회가 있다면 우승할 정도 아닌가. 아무리 몸 나이가 어리다 한들, 속은 이미 다 큰 어른에게 어린애 꿀밤 좀 먹이는 일은 어려운 것 축에도 끼지 못해 일은 금방 끝났다.
“야, 다 봤으니까 이제 가도 되겠다.”
집에 잘 가, 공평히 한 대씩 얻어맞고서 머리를 부여잡은 애들에게 작별을 고하듯 가볍게 밀쳐 낸 정연이 화장실 안으로 들어섰다. 달칵, 잠금장치까지 잠그고서야 주변을 한 번 둘러보았다.
화장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른 애들이 있었으면 한준에게도, 괜한 남자애들 장난에 끼인 그 애들에게도 고역이었을 테니 그나마 다행인 일이다. 화장실 바닥이 나름 곰팡이 없이 깨끗한 상태인 것은 확실히 다행인 일이었고.
바닥에 넘어진 채로 울음을 참듯 고개를 푹 숙이고 스읍, 긴 숨을 삼키고 있는 한준의 앞으로 쪼그려 앉았다. 혹여나 다친 곳은 없는지 살피는 시선에도 한준은 움츠러들었다. 저에 대한 경계가 아니란 걸 알면서도, 짧게 엇갈리는 시선이 정연의 마음에 아프게 콕 박혔다.
사실 밤톨 녀석과 그 무리들이 그렇게까지 큰 악의를 가진 건 아니었을 것이다. 특정한 기준을 만들고 기준을 벗어나는 애를 놀리고 괴롭히는 건 그 나이대에 흔한 일이며, 먼 미래에 찾아와 사람을 찢고 부수고 멘탈을 그라인더로 갈아 댈 미친놈들에 비하면 이 정도는 귀엽다고 봐도 될 일이었다.
하지만, 하지만.
사람이 꼭 큼지막한 돌덩이에 맞아야만 아픈 것은 아니다. 때로는 조약돌 하나에 맞아도 멍이 들고 모래알 하나에도 눈이 먼다. 정연은 때로는 너무 작아서 치우지 못한 유리 조각처럼 사소한 악의가 오래오래 남아 오랜 염증이 되기도 한단 사실을 알았다. 한정연의 서툰 ‘구함’이 한준에게 오래도록 남길 상흔을 알았다. 알았기에,
정연은 한준의 보들보들하고 소중한 피부 어느 곳에도, 그리고 깊숙한 곳에는 더더욱 어떠한 상처도 흉도 남길 생각이 없었다.
정연은 도저히, 정연만은 그렇게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한준, 나 봐.”
“…….”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도 조급해하지 않으려 마음을 꾹 누르며 고개를 살짝 아래로 숙였다. 그 상태로 시선만 올리자 한준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차오르는 울음을 참느라 쪼글쪼글해진 턱까지도 밉지 않고 귀여운 얼굴이었다. 좀처럼 이쪽으로 시선을 주지도 않아서, 잠시 초조하게 손끝을 갉작거리던 정연이 강수를 던졌다.
“너 나 좋아해?”
한준이 무언가 말하려는 양 입술 달싹거리는 사이, 정연이 틈을 주지 않고 쐐기를 박았다.
“난 너 좋아하는데, 넌 안 그래?”
우리 제일 친한 친구잖아. 그렇게 말하는 정연을 그제야 한준이 홀린 듯 눈도 깜박이지 않고 바라보았다. 둥글게 뜬 눈, 언제나 다감한 눈동자는 흔하디흔한 형광등 빛을 받고서도 꼭 어느 나라의 귀한 보석처럼 산란했다. 눈 밑에 맺혀 있던 눈물 한 방울이 모난 곳 하나 없는 뺨의 곡면을 따라 조르륵 흘러내리는 모습을 정연도 마주 바라보았다.
떨어진 물방울이 뺨을 길게 타고 내려가 끝이 둥근 턱에 맺혀, 바닥으로 몸을 던졌을 즈음에야 정신을 차렸는지 한준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나, 나도… 나도. 연이 좋아. 진짜로 좋아.”
넘어져 겨우 일어난 애가 절뚝거리듯 몇 마디를 더듬던 한준의 목소리는 몇 번씩이고 좋아, 좋아 하고 연신 달리듯 외치는 중얼거림으로 이어졌다. 여전히 연약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였지만 적어도 그 안에 담긴 확신과 애정만은 항상 곧았다.
정연은 정말로, 한준의 이런 다정함이 퍽 좋았다. 그렇게 놀림을 받고서도, 그래서 부끄럽고 싫어서 울 정도로 몰렸으면서도 빈말로도 결코 너 같은 거 싫어, 같은 소리는 하지 않는 한준의 성질은 결코 약한 것이 아니라고 믿었다.
애초에 이런 빌어먹을 세상에서 착할 수 있다니, 어지간한 의지력으로는 안 되는 최강의 성질 아닌가.
가슴이 울렁거리도록 벅차 오는 기특함에 정연이 손을 뻗어 한준의 머리칼을 북북 쓰다듬었다. 북북 빨듯이 목욕시킨 다음 말린 강아지 털마냥 얇고 보드란 머리카락이 부스스 일어났다. 나무를 온통 흔드는 짓궂은 바람마냥 머리칼을 온통 흩어 놓은 정연의 손이 아직도 좋아해, 연신 되뇌는 한준의 뺨을 감쌌다.
“그래서, 나 좋아하는 게 부끄러워?”
물었더니 바로 고개를 뒤흔들었다. 제 뺨을 감싸고 있는 손이 떨어져 나갈까 봐 거세게 흔들지도 못하고 소심하게 쭐레쭐레 흉내만 내는 것이 한준다웠다.
“근데 왜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었어. 무서웠어?”
“아니이….”
말을 흐린 한준이 정연의 손안으로 숨듯이 얼굴을 폭 묻었다. 꼭 강아지 코처럼 촉촉한 코끝이 손바닥 안을 간질이고 따끈한 숨이 비밀 얘기를 하듯 조심스레 쏟아졌다.
“나 때문에 친구들이 연이까지 놀릴까 봐….”
저런 버릇 없는 꼬맹이들을 굳이 친구라고 호명하는 다정함에, 이 상황까지 남만 걱정하는 상냥함에 정연은 솔직히 조금 감명받았다. 하지만 지금은 착한 것도 좋지만, 때로는 단호함이나 당당함도 필요하다고 가르쳐 줄 때였다.
“난 남들이 뭐라고 말하든 신경 안 써. 그리고 너도 그랬으면 좋겠어. 적어도 나쁜 말이랑 거짓말에는 신경 쓸 필요 없어.”
정연이 또박또박 내뱉은 말을 따라, 한준이 나쁜 말이랑 거짓말에는? 하고 따라 물었다. 어쩐지 어물거리는 기색에 빤히 바라보았더니 조금 느리게 속엣말을 터놓는다.
“그렇게 하다가… 친구들이 다 나를 싫어하게 되면 어떻게 해.”
톡 터져 나온 걱정은 허탈할 만치 어이없는 것이었다. 그럴 리가 있나. 이 세상은 한준을 사랑했다. 단지 정연이 용납할 수 없는 방식으로 사랑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차마, 그것은 말해 줄 수 없는 정연이 보장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였다.
“괜찮아. 절대로 너를 안 싫어할 사람이 있잖아.”
여기에. 하고 정연이 양팔을 벌려 보였다. 평소의 정연은 잘 해 보이지 않는 과장스러운 제스처에 한준이 작게 웃었다. 진짜로? 하고 묻기에 몇 번이나 진짜, 진짜로. 정말로 하고 속삭여 주었다.
애초에 네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상상력도 풍부하고, 그림도 잘 그리는데 어떻게 안 좋아해. 그리고 축구도 엄청 잘하지, 그리고 또 말이야….
소곤소곤, 끝을 모르는 애정 담긴 칭찬이 천장까지 닿을 기세로 흘러나왔다. 수많은 칭찬에 절여진 한준이, 설탕 병에 담긴 딸기마냥 다시 행복으로 반질반질 윤이 날 때까지. 듣기만 해도 간지러워지는 자그마한 웃음이 소리로 터질 때까지.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