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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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찬 절임의 끝에 결국 한준 다시 일으켜 세우기에 성공한 정연이 옆에 제 손을 잡고 서 있는 한준을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흘린 눈물 탓에 눈 밑이 조금 발갰지만, 그래도 많이 진정된 모습이다. 마침 정연에게 머리를 얻어맞아서 쑥 빠졌던 얼이 돌아왔는지, 바깥에서도 문을 쾅쾅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야, 나와! 비겁하게 숨기냐!
그럼 비겁하게 떼 지어 솜사탕 나라 아기인 한준을 괴롭히는 너희는 뭐고. 반사적으로 태클을 걸었더니 그게 이번에는 좀 재미있게 느껴졌다.
아, 이제 난 한준이 괜찮지 않으면 재미도 못 느끼는 몸이 되어 버린 걸까. 애정이란 게 이렇게 손해 보는 일인데, 영 싫지만은 않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영영 풀리지 않을 문제였지만, 정연으로서는 애초에 풀 의사도 없었으니 이대로도 괜찮을 것이다.
개수대에서 손을 찬물에 적셔 한준의 둥근 뺨을 감싸고 눈 밑을 꼼꼼히 닦아 준 정연이, 이미 할 말을 전부 정해 두고도 타고 나길 유순해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에도 움츠러들고 마는 한준과 눈을 맞췄다.
“걱정 마. 걔네가 찍소리도 못하게 내가 옆에서 지켜 줄게.”
조곤조곤, 새겨 넣듯 말한 정연이 입꼬리를 씩 올려 웃었다. 아몬드 모양을 닮은 눈이 갸름하게 접혔다. 정연이 거울로 확인하면 별로 예쁘지도 멋있지도 않았건만, 한준은 유난히 좋아하는 얼굴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한준은 정연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내 전장에 나가는 군인과 같은 비장함이 한준의 눈에 서렸다. 자그마한 손이 문고리를 돌려 벌컥 문을 열었다.
“나, 나…! 나 연이 좋아해!”
좋아해– 좋아해–.
문이 열리자마자 복도에 결연한 목소리가 왕왕 울렸다. 예상도 못 한 한준의 목청에 한껏 욕할 준비를 하고 있던 밤톨 무리의 입도 턱 막혔다. 그 틈을 타 한준이 부지런히 준비한 대본을 외쳤다.
“그리고 하나도 안 부끄러워. 그런 거 가지고 남 놀리는 너희가 더 바보 같아!”
발갛게 물든 얼굴로 외친 한준이, 이게 맞냐는 듯 정연을 돌아보았다. 밤톨 무리를 향해 말대꾸하면 뒤진다는 얼굴로 주먹을 들어 올리고 있던 정연이 재빨리 주먹을 뒤로 감추고 미소 지었다. 조금은 어색할 텐데도 한준은 그 얼굴로부터 큰 확신이라도 얻은 것처럼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애초에 내가 너희보다 축구도 잘해!”
그리고 그림도 잘 그리고, 상상력도 풍부하고, 또 태권도도 잘 하구, 정연이 해 준 칭찬을 고대로 읊은 한준이 양손을 제 허리에 척 올리고 밤톨 무리를 한 번 쭈욱 둘러보았다. 더는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 듯한 모양새로.
“그러니까 너희가 놀리건 말건, 나한텐 아무것도 아냐.”
마지막으로 쏘아붙인 한준이 그대로 무리를 헤치고 걸어 나갔다. 도도함과 당당함을 반반 섞은 듯한 기세는 참 좋았지만, 준아. 너 지금 팔이랑 다리가 같은 쪽으로 나가고 있다. 그래도 그런 점이, 끝까지 모나게 굴지는 못하는 한준이 한준답고 귀여웠다.
그렇게 고장난 로봇처럼 삐걱거리면서도 미리 짜둔 각본대로 복도 끝으로 사라지는 한준을 자애로운 고슴도치 아빠의 눈으로 바라보던 정연이 밤톨을 휙 돌아보았다. 부러 눈에 힘을 준 채였다. 그의 어머니를 똑 닮은 이 얼굴이 제법 싸늘하게 생긴 편이라 눈에 힘 좀 주면 또래 애들 겁줄 정도로는 무서워 보인다는 것을 정연은 알았다. 알면 이용해야지.
한껏 사악한 악의 무리 같은 표정을 지어 보인 정연이 한준의 뒤통수에 대고 분한 얼굴로 움찔움찔하는 밤톨과 무리들에게 다시 한번 주먹을 들어 보였다. 아까 머리로 내리꽂혔던 헥토파스칼 꿀밤을 떠올렸는지 녀석들 중 하나가 머리를 감싸고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너희 한 번만 더 한준 괴롭히거나 놀리면,”
뭐라고 하지, 죽을 줄 알아? 아냐, 그건 어린이들에게 너무 과격하지. 잠시 단어를 고민한 정연이 고개를 옆으로 까딱였다.
“…큰일 날 줄 알아.”
아무래도 이건 표현이 너무 순했나 보다. 짜증이 극에 달했을 때 날 법한 이익, 소리와 함께 밤톨이 소리를 질렀다.
“또 하면 네가 어쩔 건데!”
딱 어린이 수준의 공격에 대한 답변이야 준비되어 있었기에, 정연이 태연스레 답변했다.
“왜 내가 어쩐다고 생각하는데?”
“한준은 너 없이 아무것도 못 하잖아!”
이 무슨 모르는 말씀. 차갑게만 식은 눈동자를 한 번 굴린 정연이 한준이 지나간 복도 쪽을 턱짓했다.
“한준 쟤 태권도 파란 띠야. 나보다 손힘 좋고, 송판 격파도 잘해. 네 장 겹친 것도 한 번에 부숴.”
그럼 너희 머리 정도는 어떻게 될지 이제 감이 좀 오지 않나… 정연이 말끝을 늘이며 느긋한 시선으로 녀석들의 머리를 돌아보았다. 박박 깎은 밤톨에서 바가지, 나름 멋 부린 투 블록에까지 시선이 돌아갔다. 죽으면 죽었지 절대로 사람은 못 때릴 한준의 성정을 제대로 모르는 녀석들은 그대로 한껏 겁먹어 쫄아 든 채 제 머리들을 감쌌다.
이 정도로 겁줬으면 됐겠지. 만족한 정연이 시선을 거두고 주머니에 제 손을 꽂아 넣었다. 날 세웠던 자세가 금방 느슨해졌다.
“우리 다음 학기에는 잘 좀 지내보자. 알았지?”
이번에는 제법 어린애를 대하는 말투로 다정하게 말했는데, 녀석들의 눈에 공포가 더해진 것이 억울하다면 억울할 일이었지만. 정연은 더는 신경 쓰지 않고 복도 너머로 사라진 한준을 쫓아 걸음을 옮겼다. 한준만 신경 쓰기에도 이미 열 살배기 인생은 충분히 바빴다.
복도를 다 지났더니, 밖으로 나가지도 않고 복도 끝 계단참에서 정연이 언제 오나 고개만 빼꼼 내민 한준이 있었다. 칭찬을 바라는 듯 빤히 바라보는, 자랑스러움으로 환한 그 얼굴을 본 정연이 좁은 어깨에서 흘러내린 가방끈을 당겨 올려 주고, 등을 가볍게 팡! 쳤다.
“잘했어.”
칭찬을 먹고 자라기라도 하듯, 조금 구부정하게 하고 있던 허리가 좍 펴졌다. 아. 조금 키가 컸나. 눈 잠깐 떼는 사이에도 쑥쑥 커 가는 제 새끼를 보니 흐뭇한 마음에 웃음이 났다.
“이제 가자.”
“응!”
한준이 밝아진 얼굴로 정연의 손에 깍지를 꼈다. 상처 난 구석도, 딱딱하거나 모난 구석도 없이 보드랍고 보송한 손바닥이 정연의 손바닥과 부딪혔다. 정연이 빌어먹을 게임으로부터 지켜 낸 것이고, 앞으로도 지켜 낼 유일한 것이었다.
정연은 제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친구의 손을 잡고 여름 흙과 갓 자른 잔디 냄새가 흘러드는 바깥으로 걸음을 디뎠다. 더럽고 치사한 어른의 완승이었다.
***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바닥에 앉아 소파에 등을 기댄 정연이 다리를 쭉 뻗었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살랑살랑 코끝을 간지럽히고 길게 난 베란다 통창 너머로 격리된 매미 울음소리가 멀게 맴맴 울렸다. 빛이 살짝 비쳐 들어오는 얇은 재질의 레이스 커튼이 흔들거리며 바닥에 갖은 모양으로 빛 조각을 수놓았다.
엄지발가락 부근에 아른거리는 작은 무지개를 바라보며 발가락을 꼼질거리는 것이 당장 할 유일한 일이라, 정연은 느긋하게 숨을 내쉬고 머리를 뒤로 젖혔다.
아, 좋다.
방학이 역시 짱이다.
지긋지긋한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괜히 세상의 해상도가 240p에서 1280p로 올라간 듯한 착각까지 들었다. 이미 다 배운 내용을 가만히 앉아 듣고 있는 것도 고역이었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별로 어울리고 싶은 마음이 안 드는 코흘리개 아이들의 비위를 맞춰 주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차라리 직장에 다시 갔으면 갔지. 거긴 월급이라도 받지 않나.
어린이 노릇도 참 어렵다 속으로 한탄하며 한 입 남은 메론 맛 막대 아이스크림을 와앙, 한입에 처리한 정연이 쓰러지듯 누웠다. 한준은 한준의 어머니와 함께 밖에 나가 정연 혼자였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둘이서만 쑥덕거리면서 슬쩍 정연의 눈을 피하는 두 사람을 정연은 모른 척 보내 주었다. 두 사람이 숨기는 일이래 봤자 정연 몰래 생일 파티 준비하기, 깜짝 음식 만들기 정도의 작고 소소한 일이었으니까.
그러니 슬슬 올 텐데, 생각하며 아이스크림 나무 막대를 질겅질겅 씹고 있자니 금방 삑, 삑, 삑, 띠리링! 경쾌한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렸다. 여름 햇살에 뺨이 살짝 발갛게 익은 채 까만 비닐봉지를 품에 안은 한준과 한준의 어머니가 신난 얼굴로 들어왔다.
“정연아, 이것 좀 보렴!”
“연아, 이거 봐!”
모자가 정말 똑 닮았다니까. 저도 몰래 비식거리는 웃음을 흘린 정연이 반쯤 부러진 아이스크림 막대를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뭐예요?”
일어나기 귀찮아 무릎걸음으로 종종거리며 현관까지 간 정연이 까만 비닐봉지 안을 들여다보았다. 정연이 혹시 잘 못 볼까 걱정이라도 된다는 양 바스락거리며 입구를 한껏 벌린 봉지 안에는 무언가 풀잎이며 꽃잎 같은 것이 가득 담겨 있었다.
“어디서 풀 뜯어 오셨어요?”
“이건 그냥 풀이 아냐.”
봉숭아꽃이란다. 하고 웃음기 머금고 말하는 한준의 어머니 옆에서 한준이 잘난 체를 하듯 동그란 턱을 살짝 치켜들었다. 순간 숨을 멈춘 정연이 옆으로 한 차례 비틀거렸다. 뭐지? 귀여움으로 나를 죽이러 온 암살자인가.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한준은 못 들었는데 준의 어머니는 들으셨는지 정연이 너도 참, 하고 또 웃으신다.
“오늘은 나도 쉬고 너희도 여름 방학이니까 뭔가 특별한 걸 해 볼까 해서, 봉숭아 물을 들이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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