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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꿉친구 지키기 프로젝트-15화 (15/52)

#15

얼마 되지 않는 휴일마저도 한준에게 특별한 기억을 만들어 주려 하는 다정한 마음씨가 참 한준의 어머니다웠다. 그래도 봉숭아 물이라면 분홍색인가 다홍색 아닌가. 정연 같은 다 큰 어린이 손에 들일 색은 아닌 것 같은데. 저는 사양한다며 점잖게 거절을 말하려 입술을 벌리던 정연이 잠시 멈칫했다.

너도 할 거지? 말하듯 반질반질한 눈동자 네 개가 나란히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 눈빛을 거절하는 방법을 정연은 도저히 알지 못해서, 결국 떠밀리듯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 너머로 한준과 한준의 어머니가 몰래 하이 파이브를 하는 것도 모르고 고개가 숙여졌다. 누구나 예상할 수 있었던 패배였다.

***

봉숭아 물 들이는 법은 어렵지 않지만 퍽 정성이 들었다. 먼저 한껏 따 모아 햇볕에 조금 말린 봉숭아를 깨끗하게 씻어 절구에 넣는다. 그리고 백반 한 숟가락을 더해 콩콩 빻는다. 먼저 풀이 좀 잘아지도록 절굿공이를 콩콩 놀리던 준의 어머니가 풀과 꽃이 좀 질척해지고 나서야 옆에서 저도 하고 싶어 엉덩이를 들썩거리던 한준에게 공이를 넘겨주었다.

한준이 신나게 절구를 콩콩 소리 내며 빻았다. 아직 힘이 부족해서 그런지 몸까지 공이질하는 모양새를 따라 풀썩풀썩 흔들렸다.

그동안 정연은 턱을 괴고 누워 빨강 분홍 꽃잎과 파릇하고 빳빳한 봉숭아 풀잎이 진창으로 섞여 된장 같은 색과 질감이 되는 모습을 보았다. 한준이 ‘연이 너도 할래?’ 하고 물었지만, 그 투명하리만큼 순진한 얼굴에 자기는 더 하고 싶지만 정연이가 심심할지도 모르니까 양보해 줘야지, 하는 생각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기에 정연은 이번에야말로 정중하게 사양했다. 이번에는 제대로 먹혔다.

한준의 피나는, 아니, 행복한 노력 끝에 봉숭아를 다 빻아가는 동안 준의 어머니가 비닐과 실을 준비했다. 이제 할 일은 손톱 위에 봉숭아 빻은 것을 올려 두고 비닐로 감싸 풀리지 않게 실로 꽁꽁 묶는 것이었다.

여기서 조금 문제가 생겼다. 사람이 셋이고, 봉숭아 물들일 사람도 셋인데 마지막 사람 손에는 실을 누가 묶어 주지? 우선은 빨리 물들이고 싶어 엉덩이가 들썩거리는 대기 순번 1호 한준의 조막만 한 손을 잡고 정연이 빻은 봉숭아를 올리고 준의 어머니가 비닐을 덮었다.

봉숭아 반죽이 새지 않도록 밑부분을 명주실로 돌돌 감싸듯 묶고 있는데, 그러는 내내 한준이 좋다고 꺄르륵 웃었다. 제 어머니와 함께 보내는 시간에 퍽 신이 난 모양이었는데, 그 얼굴이 어찌나 밝던지 열 손가락 다 묶었을 즈음에는 세 사람 모두가 웃음이 옮아 비실비실 웃고 있었다.

그다음에는 한준의 어머니 손에 봉숭아를 얹어 주고 정연은 제 손에 묶어 줄 사람이 없다는 핑계로 슬쩍 빠질 생각이었는데, 안타깝게도 이번에는 정중한 사양이 먹히지 않았다. 손끝을 돌돌 묶어 두어 손놀림이 둔한 한준이 꼭 정연이도 물을 들여야 한다며 정연의 손을 잡고 낑낑거리며 봉숭아를 얹은 것이다.

양이 얼마나 많았는지 질척한 반죽이 손톱을 넘어 살까지 덮었다. 그런데도 쪼작쪼작 손을 놀리며 열중하는 한준의 얼굴이 대단히도 갸륵하게 예쁜 나머지, 정연은 결국 자신의 손을 희생할 수밖에 없었다. 정연의 열 손가락에도 그렇게 비닐이 꽁꽁 묶였다.

결국 마지막, 한준의 어머니까지도 정연과 한준이 합심해 손을 꾸몄다. 한준은 선의였고, 정연 역시 좋은 마음이었지만 솔직히 그 속에 혼자 사회적 위신을 잃을 순 없다는 마음도 섞여 있긴 했다.

그렇게 순수한 마음과 아주 조금의 흑심으로 시작된 협업 과정에서 봉숭아 빻은 것을 바닥에 흘린다거나, 그걸 준이 실수로 무릎으로 뭉갠다거나, 그래서 카페트에 주홍 얼룩이 선명하게 들어서 한준이 시무룩해진다거나 하는 작은 사고가 있었지만 무사히 한준 어머니의 열 손가락도 꽁꽁 묶였다.

정연의 손이 그런 것만큼이나 준의 어머니 손에서도 봉숭아가 손톱 바깥으로 비죽비죽 튀어나와 살갗을 물들이고 있었지만, 준의 어머니도 만족하신 것처럼 보였다. 너희 그거 아니? 나중에 손 열심히 씻으면 살에 물든 건 절로 빠진단다. 속살거리는 목소리가 다정했다.

그렇게 삼십 개의 손가락이 모두 부자유해진 세 사람은 거실에 아무렇게나 늘어져 천장을 보고 누웠다. 멀쩡한 소파 놔두고 다 같이 바닥에 눕는 모양새가 새삼스레 웃겨서 정연이 비죽비죽 웃었더니 이유도 모르고 한준이 따라 웃었다. 커튼 너머로부터 비치는 햇살이 딱 기분 좋게 따뜻했다.

그렇게 누워서, 커튼을 한 차례 비친 빛들이 천장에 어룽거리는 걸 보며 저건 새를 닮았고 저건 꽃을 닮았고 하고 별 의미도 없이 수다를 떨었다. 그러다 어느 새엔가 잠든 한준을 따라 정연도 가물가물 졸린 눈을 감았다.

그렇게 정연이 드문 낮잠을 자고 일어났을 때에는 창밖이 어두웠다. 눈을 비비며 기지개를 폈더니 잘 울리는 일 없던 초인종 소리가 딩동, 딩동 울리고 있었다. 아. 저것 때문에 깬 건가. 정연이 비몽사몽하게 누구세요, 하고 묻기도 전에 현관으로 달려간 준의 어머니가 벌컥 문을 열었다. 저런 부주의한 면은 정말 한준이랑 똑같다. 속으로만 하던 가볍게 불평은 곧 멈췄다.

열린 문으로 들어서는 사람의 얼굴이 익숙했던 탓이다. 양손에 빨간 리본으로 묶인 피자 상자를 든 채 현관에 한가득 널브러져 있는 신발들을 실수로 밟지 않으려 비틀거리며 들어온 사람은, 한정연의 어머니였다.

바닥에 동글한 뺨을 붙이고 아직까지도 잠들어 있던 한준이 코를 조금 킁킁거리더니, 눈을 반짝 떴다.

“피자 냄새!”

준이 안녕, 하고 인사하는 정연의 엄마 옆에서 한준의 엄마가 준이 코는 정말 개코라니까, 하고 멋쩍게 웃었다. 정연이 얼떨떨하거나 말거나 폴짝폴짝 뛰어간 한준이 한정연의 어머니에게 와락 안겼다. 운전하고 왔는지 선글라스를 그대로 쓴 채 한준의 등을 도닥거리던 어머니가 정연을 보고 고개를 살짝 까딱했다. 정연도 마주 슬쩍 손을 흔들었다.

그렇게 정연만이 조금 어색한 것 같은 저녁 시간이 되었다. 정연과 한준은 바닥에 앉아서 피자를 먹었고 어른들은 소파에 앉아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눴다. 토끼마냥 앞니로 피자를 조금씩 뜯어 먹고 있는 한준의 요청으로 불을 끄고 틀어 둔 애니메이션 영화가 사람들의 얼굴을 얼룩덜룩하게 물들였다.

한준이 자꾸만 실수인 것처럼 흘리는 올리브를 그때마다 휴지로 콕콕 집어 한 구석에 치워놓던 정연이 흘끗 소파 위를 바라보았다. 글쎄, 있지, 준이랑 정연이가 지난번에는… 한준의 어머니가 저희들은 기억도 못 할 아이들 이야기를 수다처럼 말하면 정연의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또 무어라 대꾸를 했다. 그러다 같이 웃었다. 어딘가 낯설게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아마 정연의 어머니가 이토록 많이 말하는 것을 처음 본 탓이겠지. 어쩐지 싱숭생숭해진 정연이 피자를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동안에도 죽은 영혼들과 함께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며 뛰어다니는 소년이 나오는 애니메이션에서 사용한 알록달록한 파란 빛, 노란 빛이 어머니의 이마와 콧대에 어룽거렸다. 그 옆모습은 이제 그다지 차가워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영화와 함께한 식사 시간이 마치고, 오늘은 각자 집으로 돌아가나 했더니 한준이 발목을 잡았다. 정이 이모, 가요? 연이도 가요? 정연의 어머니와 정연이 조금 울먹거리는 얼굴을 뿌리치지 못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내심 준의 어머니도 두 사람을 보내기 싫었는지, 마침 아까 빻고 남은 봉숭아가 있었다며 절구와 비닐을 들고 왔다. 그렇게 이번에는 정연 어머니의 발가락이 그 희생양이 되었다. 오래 서 있어 굳은살이 박인 발을 정연과 한준이 한쪽씩 도맡았다. 이번에는 한준의 어머니가 봉숭아 얹기 담당을 맡았으므로, 다행히도 정연 어머니의 발은 예쁘게 발톱 부분만이 물들 것이었다.

하여튼 발을 그렇게 하고서는 신발을 신을 수가 없다는 이유로, 이날은 모두가 이 집에 머물러 자기로 했다. 신이 난 한준이 만세를 하고 폴짝폴짝 온 집을 뛰어다녀서 한 번, 침대 크기가 마땅치 않아 거실에 이불을 편다고 가구를 다 밀어 치우느라 또 한 번 한바탕 난리가 있었다.

막상 그렇게 해 놓고서 두 어머니는 자기들끼리 수다 좀 떨 테니 먼저 자라며 방 안에 들어가셨지만.

정말 살다 보면 별일이 다 있네. 잠옷을 갈아입고 보글보글 이를 닦으면서도 내내 어딘가 어색한 기분을 떨칠 수 없던 정연이 발을 직직 끌며 펴 둔 이불에 들어갔다. 먼저 누워 있던 한준이 데굴데굴 굴러 정연의 옆으로 붙었다. 벽시계를 힐긋 보았더니 원래라면 한준은 이미 진작에 꿈나라로 갔을 시간이었다.

“왜 안 자고 있었어.”

물었더니 나 안 졸려, 하고 바로 대꾸한다. 대답이 빠르면 켕기는 게 있는 거라던데. 정연이 자기 싫다는 양 눈을 끔벅거리며 한껏 버티는 한준을 끌어안듯 팔을 뻗고는 등을 토닥였다. 여름용 얇은 잠옷이 손 아래에서 기분 좋게 바스락거렸다.

“정말로 안 졸려?”

“…사실 조금 졸려.”

“근데 왜 안 자.”

그러자 비밀 얘기 하듯 입을 손으로 가린 한준이, 정연의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좋은 하루가 끝나는 게 아쉬워서 자고 싶지 않단다. 잠들지 않는다고 하루가 떠나지 않는 것도 아닌데. 한준답게 천진한 말에 조금 웃은 정연이 한준의 등을 토닥거렸다.

“좋은 하루는 또 올 거야.”

그러니까 자도 괜찮아. 소곤소곤, 속삭인 말에 그제야 한준이 미련 가득하던 눈을 감았다. 긴 속눈썹이 뺨 위로 드리우는 다갈색 그림자를 바라보던 정연이 저도 눈꺼풀을 닫았다. 열어 둔 창으로는 바람이 솔솔 들고 아직도 풀지 않은 손가락 비닐로부터 쌉싸름한 풀 냄새가 났다.

그런 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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