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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꿉친구 지키기 프로젝트-16화 (16/52)

#16

***

그렇게 방학 이후로 시작되나 했던 정연의 평화로운 삶은 단 한 주를 넘기지 못하고 깨지고 말았다.

좋은 날은 무슨.

정연은 오른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왼쪽을 보았으며, 다시 오른쪽을 보았다가 왼쪽을 바라보았다. 마비라도 온 것처럼 고개가 빳빳해 눈동자만 그렇게 데굴데굴 굴렸다. 아, 이게 혈압인가. 그렇게 먼저 시선을 둔 오른쪽에서는 최서희가 뭘 그렇게 꼬나보냐는 것처럼 눈을 땡그랗게 뜨고 서 있었고, 왼쪽에는, 그래, 왼쪽에는… 이곳에 있어서 안 될 아이가 서 있었다.

캐러멜색 머리가 햇볕에 금빛으로 익어가고, 커다랗게 뜬 눈이 유독 순하고 둥글어 리본 상자 속에 놓인 초콜릿마냥 달콤해 보이는, 뺨이 보드라운, 그리고 정연이 ‘제일’ 좋아하는 한준.

한준이 이곳에 있었다.

그러니까, 정연이 제 유년기를 몽땅 갈아 넣어서라도 막고 싶었던 사태가 바로 지금 이곳에 일어나고 있었다. 도대체 왜. 얌전히 집에 있어야 할 한준이 최서희가 있는 골목길까지 오게 된 것인가?

한준은 아주 작은 일에서도 행복 찾는 법을 아는 아이였기에, 언제나 무척 즐거운 일상을 영위하고 있었다. 특히 방학이 시작해서 학기 중에는 저와 잘 놀아 주지 못하던 정연과 하루 종일 붙어 있을 수 있게 된 점이 좋았다. 좋았으나… 그에게는 최근에 생긴 아주 작은 불만이 하나 있었다.

연이는 대체 나한테까지 비밀로 하고 매일 어디에 가는 걸까?

그리고 왜 매번 주머니가 불룩 튀어나올 정도로 주머니에 사탕을 넣고 다니는 걸까? 물론 정연은 준을 볼 때마다 무표정한 얼굴과 다정한 손길로 준의 손에 사탕을 꼭 하나씩 쥐여 주고는 했으니 준이 사탕의 행방을 아예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준에게 오는 것은 언제나 사탕 하나였다. 노랗게 반질반질하고 반짝거리는 포장지를 펼쳐 한 뺨에 넣고 살살 녹여 먹으면 빠르게도 사라지는 버터 맛 사탕 하나. 세 개 중에 하나. 곧 전부는 아니란 의미였다. 정연은 빨간 커피 맛 사탕이 아니면 잘 먹지 않으니 정연이 전부 먹는 것도 아닐 텐데, 정연의 주머니는 왜 나갈 땐 한껏 불룩하고 돌아올 땐 사탕 하나 없이 홀쭉할까?

한준은 이 문제에 대해 꽤 오래 고민했고, 정연에게도 슬금슬금 낚시하듯 밑밥 같은 질문을 던져 보았지만 정연은 네가 뭐 묻고 싶은 건지 다 안다는 얼굴로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그리고 한준은 그때마다 정연의 유도에 홀라당 넘어가 본 주제를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정연의 비밀은 영원히 난제로 남을 것처럼 보였다. 한준은 남이 숨기는 것을 굳이 캐려 들지 않을 정도로 ‘착한 아이’였기 때문에 더더욱, 비밀로 남을 수 있을 것처럼 보였으나….

방학식 날 일어난 일이 문제였다. 정연의 ‘가장 친한 친구’ 발언.

물론 원래도 정연은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보냈고 한준을 제외한 다른 아이에게는 말도 별로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시선이, 다른 사람에게 보내는 무신경한 시선과는 다른 어떠한 다정함이 깃든 시선이 언제나 한준에게 쏟아지고 있었으므로 한준은 정연과 자신이 친하다는 사실, 그리고 정연이 자신을 꽤 좋아한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남들이 재수 없다고 말할까 봐 아닌 척했지만 실은 정연이 저를 제일 좋아하는 것 같다는 우쭐거리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물론 한준은 착한 아이니까 그런 잘난 척 하고픈 욕구는 아주, 아주, 아주 조금이었지만.

하여튼, 그런 상황에서 정연의 “가장 친한 친구”와 “좋아해” 발언은 한준의 마음을 꽤나 크게 흔들었다. 아니, 흔들리던 마음에 압정을 꽂아 콕 고정시켜 버린 걸지도 몰랐다. 정연의 입에서 표현된 애정은 한준에게 스스로 어느 정도는 자각할 수 있는 든든함으로 자리 잡았다. 그런 만큼 한준은 생각했던 것이다.

어쩌면, 조금은, 정연에게 더 다가가 봐도 되지 않을까.

제일 친한 친구라면 비밀을 조금은 공유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뒤를 살금살금 따라왔다는 것이 한준 측의 주장이었다.

정연은 그래, 누구를 탓하겠어, 나를 탓해야지… 중얼거리며 기어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말았다. 잘 익은 사과를 벽에 던진 것 같은 소리가 났다. 급하게 제 앞에 쪼그려 무릎이 다치진 않았는지 살피는 한준의 뒤통수를 내려다보며, 정연은 속으로만 비명을 지르고 속으로만 바닥을 굴렀다. 이러면 안 되는데. 정말로 안 되는데…!

와중에 사람 가릴 줄을 모르는 한준은 정연이 화났나 눈치를 보며 멀쩡한 무릎에 애교처럼 바람을 호호, 불어 주는 와중에도 부지런히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눈동자에 흥미가 가득한 게, 누군지 소개해 주지 않으면 제가 날름 먼저 말을 걸 낌새라 둘이 말 섞게 두고 싶지 않던 정연이 결국 손을 들었다.

“그러니까 이쪽은….”

응급실에 끌려가는 어린애의 심정이 된 정연이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네 이름 말해, 하듯이 슬쩍 최서희에게 눈짓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뭐 어쩌라고? 하는 듯한 시선뿐이었다. 까칠하긴. 그래, 꼭 실명을 소개해 줄 필요는 없지. 안 그래도 한준이 이 골목길에 들어와 퍽 심기가 불편했던 정연이 필터링을 거치지 않고 툭 내뱉었다.

“강아지똥이야.”

그렇게 정연이 냅다 던진 말에도 한준은 웃었다. 그런데 그 웃는 모양새에 평소의 햇살 같은 미소와는 어딘가 다른, 곤혹스러워하는 것 같은 기색이 서려 있었다. 혹시 아기 솜사탕 같은 한준이 예비 미친놈의 기운을 느껴서 몸이 안 좋아지기라도 한 건가.

걱정이 든 정연이 왜 그래, 어디 아파? 하고 조심스레 물었다. 한준은 고개를 쭐쭐 도리질 치더니 머뭇머뭇 말문을 텄다.

“연아, 나는 정말로 네 마음을 아프게 하구 싶지 않지만, 현실에는 강아지똥이 없….”

거기까지 말한 한준이 입을 꼭 다무나 싶더니, 말끝 방향을 급작스레 훽 틀었다.

“아냐, 아냐. 강아지똥 맞아. 강아지똥은 세상에 있어. 강아지똥 안녕!”

그러고는 초등학생 아들내미의 방에 남몰래 선물을 집어넣고서 자식의 동심을 지켜 줬다고 철석같이 믿는 천진난만한 부모마냥 뿌듯한 얼굴을 했다. 거기에 어린애의 소중한 마음을 지켜 주기란 참 힘들어, 하는 듯한 야무진 한숨까지 덧붙여져서, 정연은 잠시 말을 잃었다.

준아, 설마 내가 동화 속에 있는 걸 진짜로 믿은 줄 안 거니? 정말로? 보통 이런 상황이면 농담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작년까지 산타를 철석같이 믿은 한준이라서 정연도 동화를 믿고 있다고 생각한 건가.

잠시 혼란 디버프 상태에 빠진 정연이었지만, 차마 저 똘똘한 자부심으로 가득 찬 얼굴에 찬물을 끼얹을 수는 없었기에, 그냥 이 나이까지 동화 속 캐릭터가 실존한다고 믿는 좀 모자란 애로 여겨지기로 했다.

잘 가라, 나의 이미지야.

가오에게 짧은 작별 인사를 마치고, 아직까지도 오목조목한 이목구비로 한껏 어른스러움과 배려심을 뽐내고 있는 한준을 잠시 내버려 두기로 결정한 정연이 최서희를 돌아보았다.

최서희는 제가 강아지똥으로 불린 것이 퍽 어이가 없는지 아랫입술을 조금 씹어 물고 있었는데, 그런데도 암말 않는 것이 한준의 미모에 할 말을 잃은 건가 싶었다. 슬금슬금 움직여 최서희와 한준의 사이를 가리듯이 선 정연이 화제를 돌리듯 최서희의 발치를 손끝으로 가리켰다.

“그리고 얘는 공주야.”

“공주구나, 안녕, 공주야!”

휴. 이번에는 공주가 어디 있냐고 태클을 걸지 않아서 다행이다. 정연이 안도하는 사이, 동물을 좋아하는 따뜻하고 보드라운 마음씨의 소유자 한준은 곧바로 쪼그려 앉아 고양이와 눈을 맞추었다. 그러고는 상처 하나 없이 보드랍고 작은 손을 들어 공주의 자그마한 머리통을 쓰다듬는데, 글쎄. 공주 이 까다로운 고양이가 한준의 손길에는 얌전히 고개를 내맡기는 게 아닌가.

심지어 사랑스러운 마음과는 다르게 손재주는 그리 섬세하지 못한 한준이 북북 쓰다듬어 반쯤 제 눈이 까뒤집혀지고 있는데도 고양이는 얌전히 코나 발랑거리고 있었다. 설마 공주는 공주를 알아보는 건가. 저 고양이가 재투성이 신데렐라라면 한준은 백설 공주지, 암.

다시 주접의 세계로 떠나려던 정연의 제정신을 붙잡아 세운 것은 옆에 있는 또 다른 아이의 존재였다. 최서희.

자기 고양이가 한준을 저렇게 따르면 최서희가 질투하는 건 아닐까. 고양이 쪽을 질투할지 한준 쪽을 질투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갑자기 불안해져 흘끔 상태를 살폈으나 걱정과 달리 의외로 최서희도 얌전했다.

설마 사랑의… 힘인가? 첫눈에 반하기라도 한 건가?

그러면 안 되는데. 정연은 어느 시점에 끼어들어서 고양이 쓰다듬기에 열중한 한준을 데리고 도주할지 각을 재느라 안절부절못했다. 차례로 보자면 한준을 소개시켜 줄 타이밍이었지만, 정연은 결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최서희에게 한준의 이름을 알려 주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고양이 가게에 생선을, 아니, 고양이에게 생선 가게를 맡기고 말지.

그렇게 정연이 부지런히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였다.

[실… …건이… 충… 되었… 습… 다]

[이… 트를 …행 …니다]

골목 바깥에서부터 길게 그림자가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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