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골목 안쪽까지 드리운 그림자가 점차 이쪽까지 덮어왔다.
누군지 모를 남자가, 아니, 정연만이 정체를 짐작할 수 있는 성인 남성이 아이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손은 주머니에 꽂혀 있었고 검은 티셔츠에 구깃구깃한 청바지를 입고 챙이 긴 캡 모자를 쓰고 있었다. 턱에는 깎지 않은 수염이 거칠했고 눈알은 탁했다.
그 새끼다.
납치범.
직감한 정연이 반사적으로 한준을 뒤로 감추듯 물렸다. 아, 방금 건 너무 표 나게 감췄나. 슬금슬금 방향을 바꾸어 최서희도 같이 감춰 준 정연이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어린애의 환심을 사려는 더러운 어른들이 지어 보이고는 어색한 웃음을 얼굴 가득 떠올린 남자가 세 아이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아저씨 누구세요?”
“아저씨라니, 형이야.”
형이 누구를 찾고 있는데, 말을 늘이며 애들 사이를 훑는 눈이 기묘하게 번들거렸다. 숨결에서 펄펄 나는 술 냄새를 맡았는지 뒤에 감춰 둔 최서희가 몸을 움찔하는 것이 돌아보지 않고도 느껴졌다.
정연은 양손을 뻗어 처음 보는 사람에게 안녕하세요, 반갑게 인사하려는 것처럼 방글거리며 입을 여는 한준과, 그와 대비되게도 한껏 쫄아 든 최서희의 손을 당겨 잡았다.
쫄지 마, 임마. 킬수로 따지면 네가 이 세계관에서 어디 가도 꿀리지 않는 놈이야. 지금은 아니고 커서지만.
“너희 중에 서희, 최서희가 누구니?”
여기서 이놈이 최서희예요, 하고 내어 주면 한준은 지킬 수 있지 않을까. 순간 그런 치졸한 발상이 머리를 스쳤지만, 정연은 언제나 제게 닿는 것을 질색했으면서 지금은 제 손을 아프도록 감싸 쥐고 있는 이 작은 손의 주인을 버릴 수 없었다. 제가 아이를 ‘그렇게’ 버리지는 못하리란 사실을 알았다. 너무 잘 알았다.
결국 느릿한 한숨을 한 번 내쉰 정연이 턱을 가볍게 치켜들고 남자를 바라보았다. 분명 올려다보는 것인데도 어딘가 낮춰 보는 듯한 기묘한 시선에 남자의 미간에 금이 갔다.
“저요.”
제가 최서희예요. 정연의 폭탄 같은 발언에 맞잡은 손이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정연은 눈치껏 가만히 있으란 뜻으로 최서희의 손가락을 꼭 눌러 잡았다. 정연이 짐짓 어린애마냥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고 물었다. 저 새끼가 좋은 어른인 척한다면 이쪽도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인 척해 주는 것이 장단이 맞지 않겠나.
“저는 왜 찾으세요?”
정연이 묻는 동안 뒤에서 알사탕 같은 눈동자를 도록도록 굴리며 상황을 파악하던 한준이 갑자기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러곤 놀란 정연이 말리기도 전에 당당히 외쳤다.
“나도 최서희야!”
아냐! 넌 한준이잖아! 네가 왜 그래. 순간 어이가 없어 잠시 입을 벌리고 말을 잃은 정연이 어떻게 대응하기도 전에, 눌러 잡힌 손가락을 꼬물거리던 최서희까지 입을 열어 합류했다.
“아냐, 내가 최서희야.”
아니, 아니. 지금 우리는 최서희 되기 놀이를 하는 게 아니라고. 누가 최서희일까요 대회도 아냐. 정연은 채신머리없게도 좀 비명을 지르고 싶은 심정이 되었지만 어른의 인내심으로 꾹꾹 눌러 참아 냈다. 하기는, 이제 아홉 살이고 열 살인 꼬마 애들에게 무슨 대단한 눈치와 지성을 바라겠나. 숨 쉬듯 포기한 정연이 힐끗 남자를 보고 말했다.
“그래서 제가 최서희인데, 얘도 최서희고, 쟤도 최서희라네요.”
일이 이렇게 된 걸 어쩌겠어요. 정연이 한탄하듯 내뱉은 중얼거림에 놀림을 당한다고 생각했는지 온화함을 가장하고 있던 남자의 미소가 기묘하게 뒤틀렸다.
“이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들이 어른한테 장난을 쳐.”
좋은 어른을 가장하듯 높였던 가성 대신 목 안을 긁는 듯한 가칠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남자가 가장 앞에 있던 정연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충혈된 눈을 한 남자는 이럴 줄 알았다거나, 수는 좀 많지만 상관없겠지, 같은 말을 정신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에 정연이 무슨 반응을 하기도 전에 몸이 돌려 세워지고 입가에 무언가가 와 닿았다. 축축하고 미끈한. 아. 손수건인가. 뭔가 물 같은 약이 묻어 있는. 순간 물체의 정체를 파악한 정연이 숨을 멈췄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물에 얼굴 넣고 숨 참는 연습만 몇 시간을 했는데.
그러나 생각하고 호흡을 멈춘 보람도 없이 남자가 정연의 뺨을 거세게 잡아 눌렀다. 아니, 이건 반칙이지. 억지로 벌어진 입으로 들어찬 공기가 목 안쪽까지 밀려들었다. 이것까진 대비하지 않았는데. X됐다.
화학 약품의 알싸한 냄새가 폐부를 타고 들어가자 빠르게도 정신이 몽롱해졌다. 저쪽에서 연아! 하고 비명을 지르는 준과 눈을 크게 치뜨는 최서희가 보였다. 애들은 저런 얼굴을 해서는 안 된다. 정연은 어린이였던 시절이 기억나지도 않을 정도로 빠르게 자랐지만, 그런 사실 정도는 알았다.
저 조그만 것들이 잡히는 것보다는 정연이 잡히는 것이 한참은 나았고, 정연에게는 헤쳐 나갈 대책이 있었다. 부러 비위를 긁어 대 저만 잡히는 이것이 정연이 생각할 수 있는 차선의 방법이었다. 가물가물해져 가는 정신을 붙잡으려 혀를 한 번 깨문 정연이 입을 크게 벌리고 외쳤다. 그렇게 보지 말고.
도망쳐.
그 말이 닿았는지는 모르겠다.
***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온통 깜깜한 곳이라, 정연은 혹시 제가 죽었나 하는 바보 같은 생각을 잠시 하다 말았다. 사위가 온통 어두워 분간하기는 어렵지만, 어느 구석에서 부스럭거리는 인기척이 나는 것이 혼자는 아닌 모양이었다.
잘 보니 천장이 완전히 막히지 않고 얼기설기 구멍이 나 그곳으로 희미하게 빛이 새고 있었지만 충분하지는 않아, 앞을 볼 정도로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창고 비슷한 공간인가. 아니, 게임에서의 묘사에 따르면 오두막이겠지.
상황을 파악하려 눈을 몇 번 깜박인 정연이 어쩐지 자꾸만 따끔거리는 눈을 비비기 위해 손을 들어 올리려 했으나, 움직이지 않았다. 등 뒤에서 손목이 묶여 있는 것 같았다. 거칠거칠한 감촉이 밧줄인가 싶었다. 짜증스러운 웃음이 저도 모르게 입가에 떠올랐다.
정연은 납치를 막을 수 없었다. 어쩌면 애들을 대신해 납치당하는 것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걸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했다. 납치범이 저와 소꿉놀이라도 할 요량으로 사이좋게 갇혀 있는 게 아니라면 저 인기척은 분명 한준이나 최서희의 것일 테니까. 정연은 게임 스크립트 속에서 보았던 그 상황에 자신까지 더했을 뿐이다.
스멀거리는 자괴감이 발밑부터 기어올라 왔지만 지금은 자책 따위를 할 상황이 아니다. 정연. 해야 할 일을 한다. 할 수 있다. 실시.
“…거기 있어?”
애써 생각을 정리하고 겨우 꺼낸 목소리가 갈라졌다. 얼마나 기절해 있었는지, 푹 잠긴 목으로는 벌레 기어가듯 작은 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연아? 거기 있어?”
마주 소곤소곤 돌아온 대답은 한준의 것이었다. 울어서 코가 막히기라도 했는지 목소리가 맹맹했지만, 그 점을 감안하더라도 어딘가 다치거나 아픈 사람의 목소리는 아니라 정연은 절망과 안도감을 동시에 느꼈다.
“응. 나 여기 있어. 최서… 큼. 강아지똥은?”
“아까 아저씨가 저어 쪽에 던졌어. 근데 계속 말이 없어서….”
너도 강아지도 많이 아픈 줄 알고 걱정했어. 흐트러지는 말끝에 울음기가 섞였다. 그러면서도 울지 않으려는 양 코만 훌쩍거리는 것이 장했다.
“잘 보고 있었네. 잘했어. 그리고 아저씨는 어디로 갔어?”
“밖에 나갔는데, 여보세요, 하고 몇 번 말하다가 말았어. 그 뒤로는 아무 소리도 안 들려.”
혹시 납치라도 당하면 주변 상황을 잘 파악하라 몇 번이고 되새긴 정연의 말을 따라서 한준은 내내 눈과 귀와 온 신경을 곧추세우고 있던 모양이었다. 기특함에 머리라도 북북 쓰다듬어 주고 싶은데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정연은 말로라도 잘했어, 몇 번을 중얼거렸다.
아, 그런데 내가 방금 잘했다는 말만 몇 번을 한 거지. 새삼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는 기분에 고개를 한번 뒤흔든 정연은 그제야 제 이마가 축축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땀인지 피인지 모를 액체가 이마에 흥건했다. 조금 찝찝한 기분에 고개 흔들기를 멈추고 속삭였다.
“그럼 잠깐만, 신발… 한쪽만 벗어서 이리 줘. 내 목소리 들리는 쪽으로.”
어두운 가운데에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바닥에 닿은 이마가 지끈거리며 아파 오는데도, 저처럼 팔을 묶인 한준이 저편에서 꾸물꾸물하며 발로만 운동화를 벗으려 낑낑대고 있을 광경을 생각하니 조금 웃음이 나서, 정연은 제가 제정신인지 잠시 의심했다. 그래도 귀여운 걸 어떻게 해.
한준이 있는 쪽 반대편, 쌕쌕거리는 숨결이 들리는 쪽에 있는 게 아마 최서희겠지. 녀석은 꼼짝도 않고 상황을 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기절해서 숨만 겨우 쉬고 있던가.
그렇게 조금 기다리고 있자니 무언가가 툭툭, 정연의 근처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부딪히는 소리가 두 번이었다.
한쪽만 달라고 했으니 한준이 두 쪽 다 벗어 던진 건 아닐 테고, 누구에게 달라고 콕 집어 이름을 말하지 않았더니 최서희도 저에게 하는 말인 줄 알고 신을 벗어 던진 모양이었다. 왜? 하고 한 번 물어보지도 않고 시키는 대로 냅다 신을 벗어 던졌을 두 꼬마를 생각하니 비식비식 웃음이 났다.
그렇게 얼굴 근육 좀 움직였다고 이마가 욱신거리며 당겼다. 눈꺼풀 위로 뜨끈하고 축축한 것이 흘러내리는 느낌이 났다. 아이고, 이러다 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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