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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꿉친구 지키기 프로젝트-18화 (18/52)

#18

입술을 꽉 깨문 정연이 바닥에 떨어진 두 켤레 운동화를 찾아 묶인 다리를 이리저리 흔들어 보다가, 찾아서는 제 등 저편으로 넘기려 용을 썼다. 십여 분은 될 듯한 사투 끝에 겨우겨우 운동화를 손에 쥐었을 때엔 온몸이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그래도 어떻게든 줍긴 주웠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끔찍한 상황에서 그나마 다행인 점을 꼽자면, 납치범이 손가락까지 묶어 둘 정도로 꼼꼼한 범죄자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연은 손만 움직일 수 있으면 할 수 있는 일이 적지 않은 사람이었고.

저릿한 손가락을 어떻게든 움직여 운동화 두 개를 더듬거리던 정연이 매끈매끈한 질감으로 제가 몇 번 신겨 주었던 한준의 운동화를 분간해 냈다. 한 번도 구겨 신지 않아 반듯한 신발 뒤축을 더듬고, 깔창 아래로 손가락을 밀어 넣어 뒤적거렸다. 내가 여기 어디에 넣어 둔 것 같은데.

아.

찾았다.

위치 추적기.

위치 추적기.

왜 이런 게 한준의 신발 깔창 아래에 깔려 있냐고?

범죄 아니냐고?

천만의 말씀. 콤팩트한 크기와 높은 내구성이 강점인 이 위치 추적기는 한준의 어머니와 전부 합의를 마치고 설치한 물건이었다. 한준의 어머니의 귓가에 대고 중얼중얼 준이가 너무 착하고 예뻐서 누가 납치할까 봐 도저히 걱정돼서 못 살겠다 세뇌하듯 염불을 왼 결과, 한준만큼 마음 약한 한준의 어머니가 결국 못 이기는 척 그의 손을 들어 주었던 것이다.

그렇게 한준 추적단이 결성되고, 정연과 함께 위치 추적기를 고르던 한준의 어머니가 ‘정연이는 우리 준이를 정말 좋아하네’, 하고 놀리듯 말씀하시기도 했지만 사실이라 별 타격이 없었다. 애초에 한준을 안 좋아하는 쪽이 이상한 것 아닌가? 눈이 있고 코가 있고 뇌가 있고 심장이 있다면 말이다.

물론 정연은 눈이 있고 코가 있고 뇌가 있고 심장이 있었으므로 한준을 좋아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한준에게는 이런 것을 설치했다는 사실을 굳이 말하지 않았지만 한준이 알았더라도 응? 응! 괜찮아! 할 것이 뻔했으니 그 점은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니 고소에 대한 걱정은 잠시 미뤄 두고, 정연이 손가락으로 위치 추적기를 잡아 바닥을 향해 떨어트렸다. 탁, 하고 약하디약한 소리가 났다. 아흔 된 할아버지가 지팡이를 짚으셔도 이보다는 강력할 것이다. 이 정도 충격으로는 안 된다.

이를 악문 정연이 울리는 머리를 치켜들고 비틀비틀 몸을 세웠다. 바닥을 한참 더듬어 떨어진 위치 추적기를 찾아 쥔 후 벽에 등을 기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번은 할 자신이 없으니 제대로 던져야 할 텐데.

긴장으로 등 뒤에 식은땀이 끈적하게 고이는 걸 느끼면서, 정연은 손에 든 위치 추적기를 다시 한번 바닥으로 거세게 던졌다. 한 번 더 할 자신은 없었는데, 다행스럽게도 이번에야말로 파삭, 하고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이렇게 부서지면 준이 어머니에게 경고성 알람이 가게 되어 있는 구조였지.

한준의 어머니는 한준을 닮아, 아니, 한준이 어머니를 닮은 거겠지만 아무튼…, 무방비하고 상황 해석이 과하게 긍정적인 면이 있으셨다. 그런 그분 성격이라면 바로는 신경 쓰지 않으실지도 모르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녁까지 돌아가지 않으면 상황을 알아채고 경찰에 연락해 주실 것이다.

그럼 절대로, 어떻게 해도 한준과 최서희가 이런 캄캄한 트레일러에서 배를 곯으며 삼일이나 갇혀 있을 일은 생기지 않겠지. 길어 봤자 하루려나.

이 정도면 그래도 최악은 아닌 계획이었다. 적어도 정연은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납치당하기 이전에 남자를 제압할 수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아직 이 몸뚱이는 그런 험한 일을 하기에는 덜 여물어 약했다. 태권도로도 극복하지 못하는 체격 차이가 있는 법이니까. 그러니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될 텐데, 바스락거리며 제 옆으로 와 닿는 촉감에 정연이 눈을 깜박였다. 이걸로 됐다는 걸 아는 건 정연뿐이니 한준은 꽤 불안했던 모양이었다.

준아, 잠깐만, 하고 제지한 정연이 왼 손가락을 꼬물거려 제 옷소매 안쪽을 더듬었다.

긴 팔 옷소매 안에 붙여 둔 마스킹 테이프의 우둘투둘한 끄트머리를 손끝으로 찾아낸 정연이 테이프를 뜯어냈다. 이럴 때를 대비해 안에 넣어 둔 커터 칼날이 하나 있었다. 아무래도 납치범께서는 어린아이가 이런 편법을 쓰리라고는 생각도 못 한 모양으로 신체검사는 그리 꼼꼼히 하지 않아, 정연은 무사히 칼날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다만 손에 넣은 것과 잘 사용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었던 터라, 어두운 가운데 놓칠 뻔한 칼날을 실수로 움켜쥔 정연이 윽, 작은 소리를 냈다. 따끔거리는 것이 살짝 베인 모양이었다. 피 나나? 피 나면 걸릴 텐데. 어쨌건 놓치는 것보다는 나았다.

정연의 짧은 신음에 놀란 듯 한준이 힉, 하고 숨을 들이쉬었다. 그 걱정스러운 숨소리를 달래듯 괜찮아, 작게 중얼거린 정연이 작업에 착수했다. 손목을 묶은 줄에 날을 가져다 대고 갉듯이 앞뒤로 움직였다. 끊어지나? 이 새끼는 어디서 줄도 거칠고 두꺼운 걸 가져와 가지고, 손을 움직일 때마다 밧줄이 움직이고 거칠거칠한 표면에 손목의 연한 피부가 씹혔다.

그래도 칼날로 한참을 갉작이고 있자니 줄이 갈려 점점 얇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꼬물거리며 움직여 제게 기대 오는 어린 체온을 느끼자니 마음이 더 급박해졌다.

우리 애 피부가 얼마나 연약한데, 묶어도 이딴 걸로 묶어 두고 지랄인지. 한준의 손목을 빨리 자유롭게 풀어 줄 생각에 마음이 급한 정연이 마침내, 틱,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줄을 온전히 끊어 냈다. 손목을 단단히 얽고 있던 밧줄이 후두둑 바닥으로 떨어졌다. 자유였다.

오랫동안 같은 자세로 묶여 있던 팔이 저릿저릿하게 고통을 호소했다. 그제서야 어둠 속에서 더듬듯 제 이마를 문질렀더니 축축한 것이 한껏 묻어났다. 비릿한 냄새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땀은 아니고, 피인 모양이었다. 어릴 때도 한 번 이마가 깨졌던 것 같은데, 유난히 정연의 이마가 이런 수난을 많이 겪게 설계된 모양이었다.

으, 얼굴을 잔뜩 찌푸린 정연이 끊어진 밧줄을 주워 주머니에 주섬주섬 밀어 넣으며 무릎걸음으로 비틀비틀 일어났다. 이제 애들도 풀어 줘야지.

***

남자는 초조한 걸음으로 산길을 올랐다. 산지기에게 싼값에 넘겨받은 허름한 오두막은 아무도 모르는 깊은 산 안쪽, 절벽 아래의 우묵하게 파인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러니 아무도 찾지 못할 것이 뻔했다. 은신처로는 더없이 적합한 곳이었지만 열받는 점은 이 첩첩산중에서는 전화가 잘 터지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남자는 제 아버지의 사촌인가 되는 최서희의 조부, 윤용구 회장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굳이 올랐던 산을 다시 내려갔다 와야 했다.

그 콧대 높은 영감은 첫 전화는 받지도 않았다. 몇 번의 전화 끝에 네 손자를 내가 데리고 있다, 하고 한껏 변조한 목소리로 말했을 때에도 들은 척 만 척 전화를 끊었다. 누가 봐도 보이스 피싱으로 치부하는 모양새였다.

빌어먹을 보이스 피싱범 때문에 진짜배기 납치범도 보이스 피싱으로 오인받는 상황이었다. 누가 최서희인지는 몰라도 진짜로 아이 셋을 오두막에 가둬 둔 남자로서는 억울한 일이었다.

계속해서 전화를 무시하던 그는 남자가 그의 죽은 딸 윤서화의 이름을 대었을 때에야 조금 동요하는 듯 보였다. 윤서화와 그의 쓰레기 같은 남편 사이에 자식이 있다는 말을 들은 영감이 급하게 다른 전화기를 누르는 듯 삑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야 좀 믿을 만한가 보지. 너구리 같은 영감이 의심만 많아서는. 남자는 아랫입술을 손으로 뜯으며 영감이 비서에게 전화해 사실을 확인해 오라고 버럭 소리를 지르는 것을 음악처럼 음미했다.

그리고 영감이 이보게, 하고 말을 떼는 순간 전화를 끊었다.

그의 시궁창 같은 삶에서 가장 짜릿한 순간이었다. 언제나 그를 본체만체, 혹은 길거리의 쓰레기나 시궁쥐 보듯 스쳐 지나가던 그 고고한 윤 회장으로부터 그런 급박한, 조금은 비굴하기까지도 한 목소리를 이끌어 냈다는 저열한 만족감이 남자의 배를 불렸다.

이제 윤 회장을 한껏 애태워 몸값을 올릴 때였다. 남자는 다시 산길을 올라 오두막으로 향했다. 초장에는 콧노래를 흥얼거릴 정도로 기분이 좋았으나 곧 완전히 잡치고 말았다. 외진 산이라 그런지 길이 다듬어지지 않아 오르기가 쉽지 않았던 데다가, 설상가상으로 산을 오르던 도중 추적추적 비가 내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남자는 쌍욕을 중얼거리며 물을 먹어 미끈거리고 질척거리는 산길을 걸어 올라갔다. 그래도 이 생고생이 윤 회장이 제게 안겨 줄 빛나는 화폐들을 위한 것이라 스스로 되뇌자 참을 만한 것도 같았다.

문득 잡아 둔 애들이나 가지고 놀면 마음이 완전히 풀릴 것 같다고 생각한 남자의 얼굴에 비열한 웃음이 떠올랐다. 특히 저에게 맨 처음 최서희라 말했던 놈은 꼭 뺨을 후려 주고 싶었다. 뒤에 있던 녀석들은 하나는 순하고 하나는 음침해 보이는 것이 잘 꼬시면 선선히 따라올 것 같은데 그 녀석 탓에 일이 꼬이지 않았던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 어디 어른에게 싸가지 없게 눈을 사납게 뜨고 대드는지, 생각해 보니 그 모양이 윤서화 그 도도하던 계집애랑도 닮았다. 치켜 올라간 눈이 고양이를 닮았던 그 여자는 지 애비를 똑 닮아 언제나 사람을 무시하고는 했다. 보는 눈 없어 알코올 중독자와 결혼까지 한 주제에 웃기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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