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울면서 죄송합니다, 하고 빌 때까지 그 녀석을 혼쭐내는 상상을 하며 남자가 눈 안에 오두막을 담았다. 약을 그리 세게 쓰지 않았으니 지금쯤은 일어났겠군. 그래 봤자 묶여 있어서 할 수 있는 거라곤 무력하게 질질 짜는 것뿐이겠지만.
그러고 보니 개중에 별나게 예쁜 아이도 있었는데, 그 아이를 툭 건드리면 울 것 같은 연약한 얼굴이었으니 한 번 겁줘서 진짜로 울려 보는 것도 재미있을지 모르겠다.
갖은 망상과 함께 문에 걸어 두었던 판자를 들어 올린 남자가 안으로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적어도 남자 스스로는 그렇게 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남자의 생각과는 다르게 위협적인 걸음걸이는 첫걸음부터 무산되었다. 한 발짝을 뗀 순간 몸이 휘청거렸던 것이다.
뭐야, 이거?
무언가에 걸린 것 같았는데. 당황한 남자가 발밑을 확인하기도 전에 무언가가 남자의 발치에 매달렸다. 오두막 문 밖에서 새어 들어오는 희미한 빛에 아까 보았던 두 꼬마들의 얼굴이 비쳤다. 뭐야,
“뭐 하는 거야, 이 새끼들이!”
신경질적으로 발을 털어내려 해도 남자의 발치를 팔로 감아 주렁주렁 매달린 녀석들은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대체 줄을 어떻게 푼 거지? 그보다, 왜 둘뿐….
남자의 의문에 대한 해답은 금방 돌아왔다. 어둠 속에서 타다닥, 하는 가벼운 뜀박질 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무언가가 그에게 쾅 부딪혀 온 것이다.
정확히는 남자의 고간에.
졸지에 급소를 정통으로 얻어맞은 남자가 그대로 거품을 물고 뒤로 쓰러졌다. 거시기가 끊어지는 듯한 고통에 절로 눈물이 줄줄 흐르고 소금 맞은 지렁이마냥 몸이 비틀렸다. 제, 젠자앙… 단명의 숨결 같은 욕설을 뱉던 남자의 흐릿한 시야에 자그마한 운동화 한 켤레가 들어왔다. 그 재수 없는 애새끼가 감자만 한 주먹을 치켜든 채로 남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설마 저걸로 날 팬 건가. 아까 던졌을 때 깨진 건지 뭔지, 검은 머리칼 아래 이마에는 피가 덕지덕지 묻은 채 무표정하게 고개만 살짝 내리깐 모습이 공포영화 포스터 뺨쳤다.
자, 잠깐만. 남자가 반사적으로 휴전을 요청했다.
전 머리에 피가 덜 말라서 잠깐이란 단어를 몰라요. 냉정한 낯의 꼬마가 눈으로만 그렇게 말해 협상은 결렬되었다.
그리고 조그마한 운동화 하나가 치켜올려지나 싶더니, 잠깐만, 발은 왜?
남자가 상황을 이해하기도 전에 그 발이 가랑이 사이로 강하게 내리꽂혔다. 야무진 발길질의 끝에는 달걀 같은 무언가가 옹골차게 터지는 소리가 났다.
남자는 그렇게 정신을 잃고 말았다.
어쩌면 번식 능력도.
***
남자의 불운한 운명을 이해하기 위해, 이로부터 약 삼십 분 전의 상황으로 돌아가 보도록 하자.
열 살배기 주제에 소매 안쪽에 커터 칼 심을 마스킹 테이프로 감싸 숨기고 다니는, 남들이 보면 싹수가 노랗다 칭할 법한 열 살배기 정연이 겨우겨우 어둠 속에서 한준과 최서희의 손목을 풀어 준 그 순간으로.
할 일을 마친 정연은 끄응, 소리를 내며 바닥에 드러누웠다. 운동이라고 하기에도 뭐한 움직임에도 숨이 가빠지는 것이 역시 상태가 영 좋지 않았다. 그렇다고 애들 앞에서 티 내도 될 만한 것도 아니라, 정연은 바닥에 누워서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는 내면의 욕망을 무시하고 다시 몸을 일으켰다.
슬슬 어두운 환경에 익숙해져서 그런지 정연의 팔에 찰싹 붙어 있는 한준의 동그란 뺨 윤곽이 어슴푸레 보였다. 조금 뒤에는 맹금류의 눈처럼 어둠 속에서도 환히 보이는 샛노란 눈동자가 정연을 바라보고 있었고.
정연이 이제 괜찮아, 하고 운을 떼었더니 한준이 날름 제게 와 안기듯 무릎에 앉았다. 나이가 아무리 들어도 가볍게만 느껴지는 체중과 따끈한 온도가 상황에 맞지 않게 달가워서 내버려 둔 정연이, 어둠 속을 흘끗 바라보다 최서희를 향해 팔을 벌렸다. 혹시 저만 따돌린다고 생각할까 봐 예의상 내민 팔이었는데, 어쩐 일인지 생깔 줄 알았던 최서희마저 냅다 정연의 무릎 위에 앉았다. 그제서야 양다리가 뻐근하니 무거워졌다.
아이고, 다리 저리다. 속으로 불평하면서도 양팔로 두 아이를 추슬러 안은 정연이 줄을 풀어 주는 내내 아이들의 귓가에 몇 번이고 속삭였던 내용을 다시 확인했다.
“나쁜 아저씨가 억지로 끌고 가려 하면 어떻게 해야 해.”
“일단 드러누워!”
“…그리고 다리를 잡고 누운 채로 버텨.”
제가 읊어준 것과 한 치의 틀림도 없이 씩씩하게 쏟아진 대답들에 정연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가 바닥에 붙어버리면 그 개새… 아저씨는 키 때문에 너희를 바로 잡지 못할 거야. 그런데 누우면 발로 찰 수도 있는데, 그러면 아프겠지? 그러니까 무조건 바닥에 드러누워서 발로 못 차게 다리를 잡아. 알았지?”
아까부터 계속 머리가 어질한 탓에 등을 벽에 기댄 정연이 몇 번이고 당부하며 제 작업물을 내려다보았다. 아이들의 손목에 묶여 있던 밧줄을 모두 모아 연결하니 제법 길이가 되었다. 한쪽 끝은 한준에게, 다른 쪽 끝은 최서희에게 넘긴 정연이 위치를 지시했다. 발이 걸릴 만한 높이로, 문 양옆에 숨어서 팽팽하게 당기고 있어.
아이들이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되어야 할 텐데. 혹시라도 한준에게 집적거릴 수많은 추악한 어른을 퇴치하기 위해 어린아이의 몸으로 할 수 있는 호신술이라면 죄다 달달 외운 정연이었지만, 실전에 사용하는 것은 아무래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문을 열었을 때 바로 보이지 않을 구석진 어둠에 몸을 감춘 정연이 양 주먹을 불끈 들어 올렸다.
그래. 우선은 가랑이다.
이것이 바로 남자가 고간의 안위를 잃게 된 사연이었다.
***
도서관에서 매듭 관련 책만 주야장천 찾아 읽은 보람이 있도록, 납치범이 제아무리 구르고 뛰고 발광을 해도 안 풀릴 정도로 튼튼한 매듭으로 그를 꽁꽁 묶어 둔 정연이 손을 탈탈 털었다. 입을 틀어막을 밧줄까지는 남지 않아서, 남자가 내내 빽빽 소리를 질러대는 바람에 귀가 아파 대신 양말을 쑤셔 넣었더니 조용해졌다.
그래도 큰불은 껐다고 생각하며 하늘을 올려다보는 정연의 얼굴에 근심이 어렸다. 어째 일이 잘 풀리나 싶더니, 이번에는 날씨가 말썽이었던 것이다. 어느 때부턴가 부슬부슬 쏟아지던 비는 이제 숫제 주륵주륵을 넘어 콸콸콸 소리를 내며 땅과 나무를 때렸다. 상태 안 좋은 몸으로 애들까지 데리고 하산하려다가는 조난당하기 딱 좋을 날씨였다.
이벤트에서도 비가 왔다는 묘사가 있었던가? 본래의 한준과 최서희는 삼 일 내내 갇혀 있기만 했었으니 날씨가 굳이 묘사되지 않은 건가. 턱을 긁적이고 있자니 저편에서 꼬르륵, 하는 소리가 들린다. 한준이 볼을 조금 붉히고 있는 걸 보니 저 배에서 난 소린가 보다.
“아저씨. 여기서 버틸 예정이었을 텐데 먹을 건 안 가지고 왔어요?”
우리 애 배고프다는데. 깡패처럼 묻는 모습에 남자가 으브븝, 막힌 소리를 냈다. 아. 입을 막아 뒀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머리가 안 돌아가지. 드물게도 머쓱해진 정연이 하지만 별로 미안하진 않은 태도로 남자의 입에 말아 넣었던 양말을 꺼내 주었다.
입 안을 막던 침에 절은 양말로부터 풀려난 남자가 뱉은 괴성은 초장부터 욕설이었다. 이거 풀라거나 가만 안 둔다거나 하는 통상적인 인질의 대사가 간간이 끼어 있는 것 같은데, 솔직히 별로 귀담아듣지 않아서 정확히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다.
안 그래도 아픈 머리가 쟁쟁 울리는 기분에 정연이 다시 양말을 먹일까 고민하다가,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칼날로 남자를 꾹 눌렀다.
“제가 입에 물려 드린 건 분명히 걸레가 아니라 양말이었는데 왜 이렇게 입이 더러우세요. 걸레라도 찾아 물려 드려야 조용하시겠어요?”
피로 미끄러워진 커터 칼날이 남자의 팔을 가볍게 긁었다. 두꺼운 밧줄을 끊느라 한껏 무뎌진 것이라 아플 리가 없는데, 남자가 겁에 질린 듯 연신 입 안으로만 욕을 중얼거리며 눈동자를 한데 두지 못하고 헉헉거렸다. 겁이 어찌나 많은지, 그러다 기절이라도 할 것 같다는 생각에 정연이 혀를 한 번 차며 손을 거둬 주었다.
“그래서, 먹을 것 없어요?”
“어, 없어. 아래로 내려가서 구해 올 생각이었으니까.”
거짓말을 하는 얼굴은 아닌데. 가볍게 한숨을 내쉰 정연이 이번에는 남자의 주머니를 뒤졌다. 가죽 커버가 다 해진 스마트폰 하나를 발견해 꺼내려는 찰나, 그가 중얼거렸다.
“소용없어. 여긴 전화도 안 터지고 근처 사는 사람들도 못 찾아오는 곳이라고.”
그러니까 이거 풀고 아저씨랑 화해할까, 안쓰러울 정도로 꽁꽁 묶인 남자가 조금 비굴하게 물었다. 눈에는 이것 풀리기만 하면 죽여 버리겠다고 적어 놓고서 뻔뻔도 하다. 절로 새어 나오는 한숨을 한 번 내쉬고 발로 남자의 허리께를 툭 찼다.
“아지씨가 뭘 모르시나 본데, 세상 사람들이 다 아저씨처럼 대책 없이 살지는 않아요.”
정연이 한준에게 설치해 둔 위치 추적기가 왼쪽 신발에 하나, 오른 신발에 하나인데 못 찾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한쪽 신발이 벗겨지기라도 할까 봐 꼼꼼히도 심어 놓았다. 하나는 부쉈지만 하나는 남았으니, 그걸 기반으로라도 찾아오겠지. 그나저나, 언제 찾아올지가 문제인데.
쓸모없는 스마트폰을 뒤로 휙 던진 정연이 스마트폰과 함께 찾은 것만 손에 쥐었다. 노랗고 파란 포장지의 사탕 두 알이었다. 내 사탕! 빨간 포장의 커피 맛 사탕은 이미 먹어 버린 모양인지 은박 붙은 껍데기만 남아 있었지만, 이거라도 있는 게 어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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