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침으로 축축한 양말을 다시 남자의 입에 욱여넣은 정연이 종종걸음으로 아이들에게 돌아가 사탕을 한 알씩 건넸다.
“진짜 배고파서 못 참겠을 때 먹어.”
어쩌면, 정말로 운이 나쁘다면, 비가 그칠 때까지 여기서 못 나갈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
머리가 아팠다.
단순한 비유법이 아니라, 정말로. 머리가 아프다. 아이들에게 사탕을 쥐여 준 정연의 몸이 일순간 그대로 옆으로 넘어갔다. 왜 세상이 빙글빙글 돌지. 그러고 보니 나 이마에서 피 났지.
정상은 아닌 상태로 이것저것 하며 돌아다녔으니 몸이 항의하고 있는 모양이다. 내가 나 혼자 살려고 그랬냐. 다 몸뚱이 보전하려고 한 거지. 소소하게 농담을 생각해 봐도 몸은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손끝 하나 까딱할 수 없게 된 정연을 본 한준과 최서희가 후다닥 앞으로 다가왔다.
“연아, 괜찮아?!”
한준이 조금 기겁하며 정연의 이마를 짚었다. 자그맣고 말랑한, 원래라면 분명 따뜻할 텐데도 지금은 어쩐지 시원한 손이 이마를 더듬거렸다. 목 안에서 절로 앓는 듯한 신음이 흘렀다.
“엄청, 엄청, 엄청 뜨거워. 어떻게 해!”
괜찮아. 그냥 긴장이 풀려서 그런 걸 거야. 깜짝 놀란 한준을 다독여 줘야 하는데, 빗물에 온통 깊숙이 잠겨 가는 것처럼 정신이 흐려지고 몸이 한 치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정연은 정신을 잃었다.
***
한준은 오두막 천장에 뚫린 구멍을 통해 하늘을 바라보았다. 마치 하늘이 실은 커다란 수영장이고, 그 밑에 구멍이 송송 뚫려 버린 것처럼 비가 줄기차게 쏟아지고 있었다. 그런 몽상을 습관적으로 내뱉으려 입술을 떼었다가, 옆에 있는 사람을 보고 그만두었다. 옆에 있는… 이름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강아지똥이라고 불리는 아이는 정연만큼 다정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이것은 핑계다. 설령 어느 다른 누가 굉장히 다정해 보였다고 하더라도, 한준은 오직 정연에게만 제 이상한 생각들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한준은 제가 조금 이상한 이야기를 했을 때, 무슨 그런 생각을 다 했냐는 양 한쪽 눈썹만 치켜올리고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옅게 웃으며 하늘에서 비가 왜 내리는지 차근차근 설명해 주는 정연의 목소리가 좋았다. 그러면서도 단 한 번도 한준을 바보 취급한 적이 없이 다정했다는 점이 좋았다.
그러나 한준이 열심히 끌어 비 새지 않는 곳으로 겨우 몸만 옮겨 둔 지금의 정연은 열이 끓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들만 단발적으로 내뱉고 있었다. 그 앓는 소리가 꼭, 철창 안의 닭이나 개 같은 아픈 동물이 내는 소리와 닮은 것 같아 한준은 겁이 덜컥 났다.
정연이는 내가 아플 때 어떻게 했더라, 먼저 밥을 먹여 주고, 그다음에는 보시락거리면서 약상자에서 필요한 약을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려 주었다. 아, 의사나 약사 선생님도 아니면서 필요한 게 뭔지 척척 아는 점마저도 좋았는데. 하지만 이곳에는 욕실 선반을 열면 보이던 약상자가 없다. 무엇이 당장 필요하고 아닌지 분별해 줄 정연도 지금은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아서, 한준은 뜨끈뜨끈해지는 눈 밑을 파닥이는 손짓으로 식히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때 강아지똥이 제 웃옷을 벗어서 바닥에 던졌다. 깜짝 놀란 한준이 움찔하는 사이, 그 애는 바깥으로 나서려는 양 문을 열었다. 어디 가려는 건지, 불안한 마음에 한준은 그 애를 덥석 붙잡았다.
“저기, 연이가 그랬는데, 산에서 조난을 당하면 움직이지 말고 그 자리에 있으랬어.”
잠시간 대답이 없던 강아지똥이 뒤늦게, 쟤 이름이 연이야? 하고만 물었다. 그러곤 또 준이 대답하기도 전에 제 할 말만 툭 던졌다.
“너는 걔가 시키는 대로만 해?”
“하지만 연이가 하는 말이 맞으니까, 항상.”
천장에서 샌 빗물이 강아지똥의 머리 위로 똑 떨어졌다. 새까만 머리칼을 신경질적으로 쓸어 넘긴 그 애가 끄트머리 날선 눈으로 정연을 바라보았다. 채도 높은 눈동자가 샛노랗게 반질거리는 모습이 조금 무서워서, 한준은 조금 움츠러들었다.
“맞긴 뭐가 맞아, 저렇게 엉망인 애가 하는 말이. 난 나갈 테니까, 넌 여기 있든가.”
한준은 저에게 밉고 매운 말만 하는 강아지똥이 조금 미워졌다. 하지만, 그래도 바깥으로 보낼 순 없었다. 밖에는 비가 아주 많이 오고, 이곳은 모르는 산인데다가 길도 험난해 보였고, 무엇보다도.
“네가 길 잃으면 연이가 걱정할 거야.”
그래도 갈 거야? 하고 물었더니 그제야 그 애가 멈칫했다. 그러면서도 내내 문을 바라보며 머뭇거리는 것이, 꼭 정연을 저렇게 두고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켕긴다는 모양새였다. 그 모양새가 저와 크게 다르지 않아서, 조금 용기가 난 한준이 제안했다.
“…같이 연이가 먹을 거라도 찾으러 갈래?”
멀리는 못 가지만. 덧붙인 단서에 생각하듯 눈을 굴린 강아지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옷 벗어.”
강아지똥이 무뚝뚝하게 읊조렸다. 젖으면 감기 걸리니까. 저가 옷만 벗으면 힐끔힐끔 곁눈질하는 또래 아이들 탓에 남 있는 앞에서는 옷 안 벗는 습관이 든 한준이 조금 머뭇거렸다. 그렇지만, 자신이 아닌 정연에게만 줄곧 꽂혀 있는 무감한 시선은 한준의 맨몸이 남들에 비해 하얗다거나 해서 다른 반응을 보일 것 같지 않았다.
망설임의 끝에 결국 한준도 제 웃옷을 벗어 반듯하게 개어 정연의 옆에 두었다.
아니나 다를까, 강아지똥은 한준의 몸을 힐끗 보고도 별 관심도 없어 보이는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이러니까 꼭 평범한 남자애가 된 것 같다. 내심 옷을 다 벗고 뛰어노는 또래 애들을 동경하던 한준은 조금 신이 났다.
자그마한 기쁨에는 꼭 연이도 같이 갈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바람이 따라붙었다. 전부 정연이 깨어 있었다면 한준이 옷을 벗는 순간 기함하며 만인의 눈을 두 손가락으로 찔러 실명시키고 다닐 거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순진한 생각이었다.
그렇게 급조된 정연 먹이기 특공대가 문을 열고 나섰다. 추적추적 쏟아지는 비를 맞고 걸으며 한준이 종알거렸다.
“가서 버섯 찾자. 책에서 산에서 찾은 버섯 중에 색깔이 알록달록한 건 독버섯이지만 하얀 건 먹어두 된다고 그랬어.”
대부분은 그렇지만 절대적인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그 사실까지는 몰랐던 최서희는 납득했고, 그렇게 재앙은 시작되었다.
***
으븝. 텁텁한 입에 무언가가 쑤셔 넣어지는 듯한 느낌에 정연이 끙끙거렸다. 뭔가 푹신푹신하고 비리고, 흙 맛이 나는, 스펀지? 아니, 버섯인가. 간신히 그것의 정체를 짐작하며 입을 우물거리자 소곤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아, 먹는다.”
“야아, 너무 가까이 붙지 마.”
“싫어.”
한준이랑 최서희. 아. 둘이 같이 있으면 안 되는데. 제게 뭘 먹인 건지에 대한 의문도 잊고 간신히 눈을 가느스름하게 떠올린 정연이 떨어져, 외치려던 찰나 한준이 외쳤다.
“연이는 나랑 가까이 있는 게 제일 좋다고 그랬어!”
그 얘기가 지금 왜 나와.
“그래서 뭐, 난 걔가 이름도 붙여 줬어.”
그러자 느닷없이 최서희가 으스대듯 턱을 들었다. 마른 뱃가죽이 공기를 한껏 담고 은근슬쩍 불룩하게 내밀어지기도 했다. 그에 대항하듯 한준이 단풍잎마냥 조막만 한 손을 꾸욱 말아 쥐었다.
“나도 별명 있어. 정연이가 맨날 나 보구 내 새끼, 내 새끼 한단 말야!”
“너 모르는구나. 새끼는 무지무지 나쁜 말이야.”
아니, 아냐. 그 새끼가 그 새끼가 아니라고.
“아냐, 새끼는 귀엽다는 뜻이야!”
“아니거든. 나쁜 말이거든.”
그렇게 따지면 똥이 더 나쁜 말이야. 아냐, 새끼가 더 나쁜 말이야. 고만고만하게 작은 녀석들이 아옹다옹하는, 똥과 새끼가 난무하여 연애의 기류라고는 이응 자도 흐르지 않는 모양새를 본 정연이 마음을 놓았다.
그래. 저 녀석들은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의 한준과 최서희가 아니라, 세상에서 제일 예쁜 내 새끼와 남의 집 강아지똥이었다. 그러니까 내버려 두고 조금은 쉬어도, 큰일이 생기지는….
정연이 다시 가물거리는 눈을 떴을 때에는 어쩐 일인지 둘이 제법 사이좋게 머리를 모으고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뭐야. 그 새 사이가 좋아졌나. 여전히 연애의 기류는 보이지 않는 모습에 정연은 잠시 그 모양새를 지켜보았다. 언제라도 연애의 낌새가 끼어들면 바로 훼방을 놓을 셈이었다.
“연이가 계속 떨어. 추워서 그런가 봐.”
“사람한테는 지방이 의외로 많다던데, 저거라도 태울까?”
아니, 그런데 잠깐만. 네가 말한 ‘저거’가 혹시 납치범이니?
“그치만 성냥이 없는걸.”
“옷에서 담배 냄새 나잖아. 그럼 라이터도 있겠지.”
“너 똑똑하다…!”
훈훈하게 이어지던 대화를 듣던 정연이 정색했다. 아니, 아니. 사람을 태우면 안 되지. 왜 그 부분에서는 태클을 걸지 않는 거야. 준아, 너는 말려야지.
저건 사람이 아니라 쓰레기지만, 쓰레기라도 해도 안 타는 쓰레기라고. 환경을 보호합시다. 지구를 지킵시다… 할 말은 많은데 혀가 돌아가지 않던 정연이 악몽이라도 꾸는 것처럼 끙끙 앓았다. 묶어 둔 남자의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 옷 주머니를 뒤지며 라이터를 찾던 두 꼬마가 그 소리에 헐레벌떡 정연의 옆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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