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정연아, 나 보여?!”
“나는 보여?”
“이거 몇 개로 보여?”
“몇 개야?”
병아리마냥 삐약삐약 어찌나 할 말이 많은지. 손가락 세 개. 두 개는 어디로 갔니, 준아. 삐약거리며 쏟아지는 소음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어쩌지 못하고 양팔을 뻗었다. 그렇게 아이들이 반항할 틈도 없이 허리를 끌어다가 양옆에 끼고 누웠다. 어른보다는 아이가 체온이 높다더니, 제법 따끈따끈했다.
“밖에, …나가면 안 돼.”
“응.”
“아저씨 풀어 주지도 말고….”
“응.”
한준이 꼬박꼬박 대답하는 동안 들은 체도 하지 않던 최서희가, 정연의 눈 위로 제 손을 덮었다.
“너, 그만 말하고 자.”
안 그래도 잠들 것 같다. 그것도 영면. 이런 말을 하면 한준이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아 입 밖으로 내지 못한 농담이었다. 눈꺼풀 위로 덮인 미약한 온기를 느끼며, 눈을 몇 번 깜박인 정연이 마지막으로 당부했다.
“너, 희… 어디 가지 말고, …여기 있어.”
그 말만 하고 정연은 까무룩 정신을 놓았다.
그 뒤로는 꼭 엉망인 꿈이라도 꾼 것 같다. 한준의 얼굴이 눈앞에 비칠 때도 있었고, 최서희가 바로 코앞에서 저를 들여다보고 있을 때도 있었다. 머리가 아플 때도 있었고 배가 아플 때도 있었다. 노란색과 갈색, 흐린 하늘의 비둘기색, 빗물에 무너지는 거미줄, 빗소리와 목소리가 분간할 수 없이 조각으로 깨져 뒤섞였다. 혀 위로 바나나와 버터를 꼭 반절씩 섞은 것 같은 사탕 맛이 났던 것도 같고, 아이들이 조금 더 조잘거렸던 것도 같았다. 꼭 키보드를 빠르게 두드리는 것 같은 무수한 소리들 속에서 정연은 잠들었다 깨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구조는 오지 않는 것만 같았다. 그것이 조금 슬펐다가, 절망스러웠다가, 화가 났다가, 숨이 막혔다. 그러나 그 모든 순간 옆에 타인의 체온이 있었다. 그래서 견딜 만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정연은 오래도록 잠을 잤다.
***
여름비가 내리던 어느 날, 온통 산에 둘러싸인 작은 마을의 파출소에 특이한 연락이 들어왔다. 두 아이들이 그곳의 산에서 길을 잃은 것 같다는 신고였다. 아이의 안전을 위해 설치했다던 위치 추적기의 신호가 그곳에서 끊겼으니 무슨 일이 생긴 것 같다는 전화를, 소장은 처음에는 좀 우습게 여겼다.
산이라니. 워낙 길이 험하고 원래 그곳에 살던 사람도 길을 잃을 만큼 지리가 복잡한 탓에 늙은 산지기가 은퇴한 이후로는 아무도 들지 않는 산에 대체 도시에 살던 애 둘이 들어올 이유가 뭐던가. 찾아보기는 할 텐데, 시중에서 파는 위치 추적기 같은 건 오류가 생길 때도 있으니 너무 절대적으로 믿지는 말라는 미온적인 대응이 이어졌다.
적어도 국내 굴지 기업의 수뇌인 윤용구 회장의 분노가 벼락처럼 떨어지기 전까지는 그랬다.
제 손자가 사라졌다며, 제 손자를 납치한 놈의 차가 어느 산 앞에서 멈췄는지까지 알고 있는데 너희는 아직도 애를 못 찾느냐는 구박이 십 분 간격으로 비서를 통해 매타작처럼 떨어지기 시작했다. 내 손자 찾아내라 어찌나 달달 볶아 대는지 그 지역 파출소의 몇 안 되는 순경들은 내리는 비만큼이나 진땀을 줄줄 흘려야 했다.
윤용구 회장의 손자라면 금수저도 아니고 다이아몬드 수저일 텐데, 그런 도련님이 왜 이런 산골 구석까지 흘러들어 와 어디 평지도 아니고 산에 갇혀 있는지는 도통 모를 일이었다.
왜 재벌 3세 도련님이 별 연도 없어 보이는 꼬마 둘과 함께 납치되었는지는 몰라도, 함께 있는 모습을 목격했다는 목격담이 몇 있었기에 결국 처음 신고했던 아이 부모의 설명을 토대로 아이들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내가 뭐라 그랬냐며 분노하는 부모들과 사람 인생 하나 말아먹기가 국밥 한 그릇 말아 먹는 것보다 쉬울 대기업 회장의 압력을 이기지 못한 구조대는 결국 산사태에 휘말릴 위험을 감수하고 산으로 진입했다.
그러나 위치를 전부 알고 있는 것과 진입이 가능한 것은 별개의 일이었던 터라, 그들은 비가 그치고 나서야 겨우 산 깊숙한 곳 절벽 아래에서 다 허물어져 가는 오두막 한 채와 그 밖에 묶인 채 오들오들 떨고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윤영우라는 남자는 자신이 금전을 목적으로 아이들을 납치했다고 반쯤 울부짖으며 시인한 후 경찰로 인도되었다.
아이들은 오두막 안에서 발견되었다. 납치되었다던 세 아이들은 오두막 안에서 서로 붙잡듯 뒤엉킨 채 잠들어 있었다. 아이들 모두 경미한 탈수와 탈진, 그리고 뭘 잘못 먹었는지 배탈 증세가 보여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개중 한 아이는 이마를 다치고 심한 감기에 걸리긴 했지만 다행히 목숨이 위험할 만큼의 부상은 없었다.
그에 두 아이들의 부모가 안도의 눈물을 터뜨린 것은 그리 놀랍지 않은 일이었으나, 인정 없고 깐깐하기로 유명한 윤용구 회장이 제 손주를 보겠다고 병원까지 흐트러진 차림으로 달려온 것은 조금의 구설수에 올랐다.
그렇게 작은 시골 마을을 뒤흔들었던 납치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아이들이 납치된 지 정확히 삼 일째의 일이었다.
***
그 애는 종종 자신에 대해서 생각했다.
길고 긴 생각은 언제나 학교에서 지나가듯 배웠던 빅뱅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했다. 한 점이 폭발하듯 확장되어 우주가 생겨났으며 지금도 끊임없이 넓어지고 있다는 믿기 어려운 그 이야기에 대해서 생각할 때면, 그는 결국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하고는 했다. 자신은 정확히 그 반대에 속한다는 결론이었다.
우주가 셀 수 없는 별들을 담고 자꾸만 넓어지는 동안 자신은 혼자 끊임없이 줄어들고 한 점으로 오그라들어 결국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사라져 버릴 것이라는 어느 직감.
술 취한 아버지를 피해 벽장에 숨던 어느 밤에, 혼자서 오고 가는 아침의 등굣길에서, 학교를 빠지고 돌아다니던 사람 북적한 오후의 시내에서 그 애는 언제나 그런 생각을 했다. 누구에게 말하면 비웃을지 모르나, 아무도 몰라 아직은 비웃음을 사지 않은 망상이었다.
그렇게 모든 공간과 시간을 누비던 동안 아무도 그 애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언제나 술에 취해서 그를 ‘야’나 ‘새끼’라고 불렀고 학교에서는 모두가 그가 없는 사람인 것처럼 설설 피했다. 옷이 지저분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지금보다 어렸을 때에는 아랫집 할매가 종종 찾아와 그 애의 옷을 빨아 주었지만 할매는 나이가 들면서 자주 오지 않았다. 인제 무릎이 시려서 가파른 계단 오르기가 고되다고 했다.
그 애는 남이 자신을 피하거나 말거나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상관없다고 말했다. 에그, 딱한 것. 그렇게 말하며 제 머리를 쓰는 투박하게 주름진 손안이 바로 그 애를 위한 자리였기 때문에, 그 애는 별로 외롭지도, 완전히 사라지지도 않았다. 할매의 무릎 위나 평상의 옆자리에 있을 때면, 제가 무엇이든 어느 크기이든 그리 신경 쓰이지 않았다.
파랗게 철 녹슨 대문이 꽁꽁 잠겨 아무리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날이 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하루 반나절을 기다려도 할매가 돌아오지 않아서, 그 애는 결국 담벼락을 탔다. 담장 너머로 웃자란 감나무를 쥐어뜯듯 용을 써서 겨우 고개를 안으로 비죽 들이밀었다. 한바탕 뒤집혀진 흙 마당에는 할매가 쓰고 나면 싹싹 닦아 반질반질 윤이 나던 반상이며 아끼던 옷가지 몇이 잘못 난 풀처럼 떨어져 있었다.
그에 깜짝 놀란 그 애는 떨어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덜 영근 풋감 몇 개가 같이 떨어져 박살이 났다.
지나가다 그 꼴을 본 아주머니 하나가 혀를 쯧쯧 차며 그 집 할머니 떠났단다, 하고 일러 주었다. 그 동네에서 입 싸기로 유명한 아주머니는 그 애가 묻지 않은 사연을 늘어놓았다. 몇 달 전부터 큰아들인가가 사업 하나 한다고 손 벌리고 다니더니, 쫄딱 망해 부인이고 할매고 데리고 밤중에 싹 도망갔단다.
그럴 리가 없었다. 어린 자신을 앞에 앉혀 두고 제 아들놈이 어찌나 속을 썩이는지 온종일 한탄하던 할매였다. 그 애가 할매, 그냥 나랑 살아. 하면 이빨이 빠져 쪼그라든 입술로 흐물흐물 웃으며 그러마, 하던 할매가 저를 두고 홀라당 갈 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 애는 아주머니의 말은 들은 체 만 체 넘기고서 반나절을 더 잠긴 대문 앞에 쪼그려 앉아 기다렸다. 그래도 할매는 오지 않았다. 그다음 날도, 다다음 날도.
기다리는 하루가 지날 때마다 그 애는 더 지저분해졌고 더 작아졌으며 더 조용해졌다. 머스마가 왜 이래 얌전하나, 하며 저를 툭툭 치고 자꾸만 말을 걸고 학교 얘기며 숙제 얘기를 꺼내 결국은 꼬리 밟힌 고양이마냥 발칵 성질을 내게 하던 할매가 제 자리에 없어서, 이제는 아무도 저를 부르지 않았다. 할매가 늘상 밥을 주던 고양이 하나만 빈집 대청마루 아래를 들락거렸다.
할매는 그 고양이를 항상 공주라고 불렀다. 자식놈이라고는 아들내미들밖에 없던 할매 눈에는 암컷인 녀석이 꼭 공주처럼 곱다고 했다. 할매 무릎에 누가 앉을지를 두고 녀석과 죽어라 다툴 때마다 그 애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공주는 무슨, 눈을 그렇게 까뒤집고 손톱이 그리 날카로운 공주가 어디 있나. 마귀할멈이 따로 없고만. 그렇게 매번 속으로 불평하면서도 그 애는 할매를 따라 그 꼬질꼬질한 고양이를 공주, 공주 하고 불렀다.
공주 저리 가, 공주 미워, 할 때나 쓰던 그 호칭은 할매가 떠나고 나서야 마침내 진짜 의미를 가졌다. 새침한 얼굴을 한 녀석이 촉촉한 코끝을 그 애의 정강이에 비빌 때면 마음에 뚫려 있었던 커다란 구멍이 조금 메워지는 것도 같았던 탓이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