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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꿉친구 지키기 프로젝트-22화 (22/52)

#22

털은 지저분하고 발바닥은 흙먼지로 새까맸지만, 적어도 녀석은 여기 이곳에 있었다. 안으면 따뜻했고 할퀴면 따가웠다. 짐승과 흙과 풀 진액의 냄새가 났다. 품에 안고 스읍, 숨을 깊게 들이마시면, 저도 여기에 있다는 사실이 그제야 실감이 났다.

그래서 그 애는 어느 순간, 할매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란 사실을 받아들인 순간 이후로 종종 제 식사를 남겨 공주에게 주었다. 때로는 학교에서 받아 온 빵과 우유였고 때로는 먹다 남은 잔밥이었다.

받아먹을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고, 공주는 제 마음대로 굴었지만 그 애는 꼭 제가 먹을 것의 반절을 그 조막만 한 짐승의 몫으로 남겨 두었다. 어쩐지 꼭 그렇게 해야만 할 것 같았다. 그 반질거리는 눈동자에라도 저가 비치지 않으면, 정말로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

어느 날은 아버지가 또 술을 먹고 지랄을 했다. 크게 새로운 일은 아니었지만 이번에는 유난히 그 정도가 심했다. 술에 취한 그가 그 애의 가슴에다 빈 소주병을 집어 던진 것이다. 다행인지 병이 깨지진 않았지만 보라색 멍이 들 것처럼 명치께가 아릿하고 숨 쉬기가 힘들었다.

그 애는 아버지가 다시 술이나 퍼마시다 처잘 때까지 몸을 말고 힘든 숨을 할딱였다. 그렇게 자빠져 잠든 아버지의 배가 불룩하게 튀어나왔다가 들어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바닥에 널린 술병을 보았고 아버지가 또 제 내키는 대로 집어 던져 깨진 병 조각을 보았다. 그러다 큼지막한 파편 하나를 주워 들었다.

그 애는 그것을 아버지의 배 위에 대고 들고 있었다. 숨을 들이켜서 한껏 부푼 두둑한 뱃살이 깨진 조각 끝에 찔릴락 말락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다가, 내내 바라보다가, 때로는 손이 베이는 줄도 모르고 힘을 주었다가 결국 바닥에 내던지고선 밖으로 뛰쳐나왔다.

꼭 공기 같은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그 애를 터지기 직전까지 사정없이 짓누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또 공주가 필요했다. 뭐든지 좋으니 꽉 끌어안거나 세게 내팽개치지 않으면 자신은 이대로 사라질 것 같았다.

온 마을을 빙빙 돌아 어느 빈집 마루 아래서 공주를 겨우 찾았을 때, 그 애는 그제서야 숨 쉴 것만 같았다. 그래서 제 고양이의 고약한 성질도 잊고 냅다 손을 뻗었다.

공주는 정신없이 저를 안아 들려는 우악스러운 손길을 피해 몸을 뒤틀고는 잽싸게 다리 밑으로 빠져나갔다. 날래게도 도망가는 그 뒤를 쫓다가, 그 흰 고양이가 도로를 건너듯 뛸 때쯤에야 정신을 차렸다.

위험해, 자각도 없이 소리치자 입안이 마르고 여름 땡볕에 목뒤가 뜨거웠다. 한 걸음 크게 건너뛸 때마다 배가 당겼는데도 멈추지 않고 뛰었다. 네가 없으면 안 돼. 네가 다치면 안 돼. 너마저 없으면, 나는.

그렇게 뛰어들어간 어느 허름한 골목에서 겨우 공주를 잡았다. 조그만 것이 성질부리느라 제 손을 콱 깨물었다. 넌 누구 닮아서 성격이 이렇게 더러워, 하고 구박을 주고 싶었지만 그러면 괜히 화만 더 살 것 같아서 참았다. 말 못 알아듣는 짐승에게 괜히 위험하니 어쩌니 소곤거리기나 하며 그 목덜미를 쓰다듬고 있는데, 뒤에서 난데없이 돌 구르는 소리가 났다.

그렇게 돌아본 곳에는 남자애 하나가 덩그러니 서 있었다.

유난히 사람이 없던 그 골목의 어귀에, 꼭 잡지에서 잘못 오려 내 붙인 것처럼 어색하게 들어선 그 남자애가 처음으로 그 애를 보았을 때. 그래서 차가워 보이는 눈매에 얕은 파장이 일고 입술이 무엇을 말하듯 움직이는 모습을 보았을 때 그 애는 꼭 자신이 불린 것 같다 생각했다. 이제는 겨우 점에 불과한, 끝없이 사라지고 작아지는 자신을 그 애가 부르고 있다고.

기실 그 모르는 아이의 시선이 아주 다정한 것도 아니었는데도 그랬다. 회빛이 도는 눈동자는 불쌍한 아이를 보는 눈도 아니었고, 지저분한 아이를 보는 눈도 아니었다. 그 눈은 그저 꼭 굽이쳐 흘러가는 구름이나 땅을 박차고 흐르는 냇물을 볼 때에도 그런 온도이고 그런 색일 것만 같았다.

당연히 존재하는 것들을 보는 눈.

그 순간 숨통이 트이듯 여름 냄새 밴 공기가 쪼그라들었던 폐를 풍선처럼 부풀려 메웠다. 그제야 지금은 볕이 쨍한 여름의 오후가 되고 이곳은 넝쿨진 능소화가 가득한 붉은 벽돌길이 되었다. 습관적으로 쓰다듬던 공주의 털이 얼마나 북슬북슬한지, 그것이 제 손가락에 어떻게 감겨드는지 새삼스레 그 감촉이 낯설었다. 그렇게 세상이 조금 더 선명해졌다.

그렇게 남의 세상을 온갖 색으로 메워 놓고 저 홀로 여전한 무채색의 눈동자와 다시 시선이 부딪혔을 때에는 마침내 잊었던 것 같은 제 이름이 떠올라서,

아. 누군가의 시선으로 태어나는 우주도 있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최서희는.

알 것 같았다.

***

하지만 다시 냉정하게 생각해 보자면, 그건 꽤 바보 같은 감상이었다.

그렇게 불쑥 최서희의 세계에 나타난 그 애는, 사실 정말로, 정말로, 정말로 이상한 녀석이었던 것이다.

그 애는 저에게 그렇게 관심이 있는 것 같지도 않은 눈을 하고서, 저를 만난 다음 날에 굳이 밴드를 챙겨 와 상처가 난 손에 꼼꼼히 붙여 주었다. 들뜬 곳 한구석 없이 단정하게 붙인 밴드를 확인하고서는 저 혼자 은근히 자랑스러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고선 고양이를 예뻐하는 건 좋지만, 할퀴고 물게 두지는 말라고 조곤조곤 충고까지 붙였다. 손에 난 건 병 조각에 베인 상처인데.

최서희는 굳이 말하지 않고 고개만 대충 주억였다. 그 애의 깨끗한 옷가지나 때 끼지 않은 손톱, 반듯한 얼굴에 대고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저와는 어울리지 않는 아이라 그런지, 그 앞에서는 저절로 말수가 줄었다.

최서희의 그런 비협조적이고 불퉁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그 애는 처음 본 날 이후로 매일 골목길 찾아오기를 멈추지 않았다. 일없다는 얼굴을 하고서 올 때마다 사탕 한 알을 최서희의 손에 쥐여 주고 공주 간식을 챙겼다. 제가 불쌍하다며 군것질거리를 쥐여 주는 동네 이웃들은 때때로 이유도 없이 미워지곤 했는데, 사탕을 쥔 그 작은 손은 어쩐지 미워지지 않았다.

언제나 이 모든 게 당연하다는 표정을 한 그 얼굴에 홀린 건지 뭔지, 정신을 차려 보면 받을 것 다 받고 손까지 잡혀 있었다. 최서희의 손을 쥐고서 심드렁하게 상처를 보살피던 그 이상한 애는, 어느 오후엔 심지어 난데없이 손톱깎이를 가져와선 긴 손톱을 죄다 깎아 두기도 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일에 그 애는 잘도 신경을 쏟았다.

정말이지 이상한 애였는데, 생각해 보자면 길게 기른 손톱마저 사라지면 심술부리는 동네 왈패며 아버지를 할퀴고 쥐어뜯을 거의 유일한 수단마저 없어진단 걸 뻔히 알면서도 열 손톱 짧뚱하게 깎이는 내내 개처럼 얌전히 앉아 있던 저도 만만치 않게 이상한 것 같았다.

어느 날부터 최서희는 학교가 끝나기도 전 마지막 교시부터 몰래 교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곤 어디 평상이나 늘어진 나무 그늘에서 늘어져라 낮잠 자는 공주를 찾아 안아서는 왜 저를 깨웠냐며 마구 할퀴어대는 고약한 성질머리 받아 주며 골목길로 뛰었다.

그렇게 골목길에 공주를 끼고 앉아 가쁜 숨을 고르고 있자면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애가 온다는 것을, 최서희는 알았다. 조금 왼쪽으로 비켜 앉아 있으면, 그 애가 아주 당연한 일처럼 오른쪽에 자리 잡는단 것도 알았다. 그곳이 최서희와 그 애의 자리였다.

그렇게 최서희는 자리까지 만들어 가며 그 애를 기다리다가도, 막상 얼굴을 보면 자꾸 그 애를 피해 공주에게 시선을 돌리곤 했다. 저 눈은 저를 궁금해하는 기색 하나 없었는데도, 그 눈이 언젠가 최서희가 절대로 타인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은 부분들까지 읽어 내고 말 것 같다는 기묘한 예감이 있었다.

그렇게 전부 이상한 일투성이였다.

그 모든 이상한 일이 너무 당연하게 이루어져서, 최서희는 어느 시점까지 그 애가 제 이름을 한 번도 묻지 않았다는 사실도, 제가 저 애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 없다는 것마저도 모르고 있었다.

아니, 그 긴 시간의 끝에 딱 하나 안 것이 있었다.

그 애의 근본을 알 수 없는 용감함. 아무 곳에도, 적어도 그 애 자신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는 무모함. 최서희는 조금 질린 채 그 애가 제 몸 갈아 가며 싸우는 모습을 보았다. 그 애는 뭐에 베였는지 상처가 나는 손으로 거친 밧줄을 잡고 꼬았다. 이마에서 나는 피는 신경도 쓰이지 않는다는 것처럼 태연한 표정으로 재잘거렸다. 그러곤 피 맺힌 주먹으로 또 자기 몸집의 두 배는 되는 남자에게 덤벼들었다.

그리고 이겼다.

최서희가 언제나와 같이 입을 꾹 다문 채, 모든 일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동안 그 애가 모든 일을 끝냈다. 그 애가 옆에 달고 온 꼬마와 최서희가 한 일이라고는, 신발을 벗어 던진 것과 그 애가 세운 계획대로 움직여 손끝 하나 다치지 않고 살아남는 것뿐이었다.

뭐 이런 애가 다 있어. 애초에 수상한 어른이 최서희가 누구니, 했을 때 나 몰라요 하고 갔으면 될 일 아닌가. 모르는 사람이 이름 묻는다고 납죽 대답하는 녀석이 어디 있고, 또 거기에 대고 남의 이름 사칭하는 녀석은 또 어디 있나.

그런 녀석이 바로 여기 있었다.

최서희는 그 애가 쓰러지고 일어나고 다시 쓰러지는 내내 속으로 몇 번씩이나 물었다. 뭐 이런 애가 다 있어. 넌 대체 뭐야? 어떻게 사람이 그래? 어떻게 그렇게 싸울 수가 있어? 무엇에게도 상처받지 않을 것 같은 얼굴을 한 그 애의 이마에는 피딱지가 검붉게 앉았고 손등에는 언젠가 제 손톱이 낸 생채기가 자리 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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