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낡고 지친 사회인의 얼굴을 한 간호사 선생님이 제 팔뚝을 붙잡고 지혈하고 있지만 않았어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분함에 발만 한 번 구른 최서희가 다시 물었다.
“나랑 같이 있던 애, 어디 있어?”
애라. 그러고 보니 둘이 더 있었다 했지. 무슨 말인지 알았다는 양 고개를 끄덕인 노인이 폴더폰을 꺼내 들었다. 화면이 잘 보이지 않는지 눈을 꾹 찌푸린 노인이 느릿느릿 전화번호를 누르고, 어, 정 비서. 그때 찾았다던 애들 어디 있나, 물었다.
그 과정이 어찌나 느릿하던지, 잘하는 건 기다리는 것밖에 없던 저답잖게 마음이 급해진 최서희는 전화기만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할매도 큰아들인지 썅노무새끼인지 모를 놈한테 전화 걸 때는 꼭 저러더니, 어른들은 다 왜 저래?
그렇게 반쯤 저주하듯 속으로 꿍얼거리다 보니 팔이 꾹, 눌리는 감각이 들었다. 그쪽을 힐끔 보았더니 어느새 최서희의 팔에는 노란색 동그란 반창고가 꾹 눌려 붙어 있었다. 상한 구석 하나 없이 동그란 새 반창고 표면에는 반질반질하고 동그란 펭귄 캐릭터가 그려져 있었다.
최서희는 어쩐지 그것이 못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새인지 아닌지도 모를 북극에 사는 동물 그림보다는 제 손에 감긴 반창고에 그려져 있던 삐뚤빼뚤 못난 그림이 차라리 나았다. 누구한테 준다 그래도 안 가질 것처럼 생긴 그 그림이야말로 제 것 같았다. 생각을 따라 조로록 손으로 내려간 노란 눈동자가 순간 어둔 데 던져진 고양이 동공처럼 확 부풀었다.
반창고가 없었다. 어디 갔지. 비 오는 산에서 잃어버렸나. 비를 한창 먹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럴 만도 했지만….
본래 잃어버린 것에 너무 크게, 그리고 오래 골몰하지 않던 최서희였지만, 이번에는 아물어버린 상처와 사라진 반창고가 이유도 모르고 신경 쓰여 전화기 노려보는 것도 잊고 한참 손마디를 문질렀다. 반듯한 손톱 끝으로 문지른 자리가 발개질 즈음에야 통화를 마친 노인이 최서희를 돌아보았다.
“그 애들은 지금 다른 병원에 있다는구나.”
“왜. 아파서?”
병원 한 단어에 열이 펄펄 끓던 몸과 흐릿하던 은색 눈동자를 떠올린 최서희가 손장난을 멈추고 제 주먹을 꾹 쥐었다. 많이 아프대? 최서희의 손짓과 목소리에 희미하게 밴 감정을 알았는지 노인이 빠르게도 고개를 저었다.
늙은 손이 최서희의 어깨 언저리를 도닥이고 두드릴 것처럼 내밀어졌다가, 저도 모르는 사이 움찔하는 작은 몸을 보고는 금방 물러섰다. 억지로 곧게 편 구부정한 허리 뒤로 두 손이 숨었다.
“감기랑, 가벼운 배탈이라더구나. 금방 나을 게다.”
“그럼 보러 갈래.”
“나중에 다시 만나게 해 주마.”
그렇게 말을 맺고서야 손수건을 꺼낸 노인이 아까 흘린 눈물로 흠뻑 젖어 있던 얼굴을 한 번 닦고는 꼭 어린아이처럼 코를 한 번 훌쩍였다. 저럴 땐 코를 풀어야 시원해지는데, 어른이라 그것도 모르나. 등신, 아니, 바보 같아. 누가 검사하지도 않는 생각을 공연히 정정한 최서희가 괜히 조그만 턱을 슬쩍 치켜들었다.
“난 나중에 말고 지금 보고 싶은데.”
“네가 병원에 있는 것처럼, 그 애들도 지금 병원에 있단다. 아픈 곳을 낫게 해 주는 중이야.”
그러니 지금은 할아버지랑 같이 가자꾸나. 그렇게 말한 노인이 최서희의 앞에 손을 내밀었다. 최서희가 그 손을 멀뚱히 내려다보는 동안 간호사 선생님이 퇴원하시게요? 하고 물었다. 제 할아버지라고 주장하는 남자와 간호사 선생님은 집에 주치의가 있으니 그 양반에게 봐 달라 하겠다느니, 퇴원 수속을 밟아 드리겠다거니 하는 뜻 모를 대화를 나눴다. 그러거나 말거나 최서희는 불퉁했다. 마른 뺨이 심술로 조금 부풀어 오르기도 했다.
한창 말을 잇다가 겨우 최서희의 불만 어린 얼굴을 알아챈 노인이 아이의 앞에 몸을 숙이고 앉았다. 옅게 노란빛 도는 탁한 갈색 눈동자와 샛노란 눈동자가 허공에서 톡, 부딪혔다. 제 엄마도 꼭 저런 눈이었을까. 모르는 일이었다.
“가기 싫으니?”
“…….”
“이 할애비랑 함께 가면 네가 원하는 건 뭐든지 다 먹고, 가지고, 하게 해 주마.”
원하는 것, 노인이 어린애 꾀듯 하는 말에 눈앞에 얼굴 하나가 아른거리다 사라졌다. 하지만 살아 있는 건 주고받고 할 수 없다던데. 그 외에는 원하는 것이 생각나지 않아 노인의 손을 심드렁히 내려다보기만 하는 최서희의 모습에 노인이 한 마디를 더 붙였다.
“집에 가서 식사도 하고, 의사 선생님도 만나자꾸나. 다시 만났을 때 건강해야 네 친구들도 안심하지.”
걔 내 친구 아닌데. 그래도, 맞기는 맞는 말이었다. 그 애는 최서희의 상처만 보면 밴드로 싸맨다 어쩐다 공을 들이곤 했었으니까. 제 몸 하나도 제대로 간수 못 하는 주제에. 제 이마에서 나는 피보다 남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빗물 한 방울이나 신경 쓰던 바보 멍청이가 바로 걔였다.
제 비쩍 마른 팔뚝과 반창고가 붙은 팔, 채 지우지 못한 핏자국과 버섯을 딸 때 생겼는지 발갛게 난 손끝 생채기들을 내려다본 최서희가 차오르던 심술을 꾹꾹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럼 잠깐 갔다가 다시 올 거야. 공주도 챙겨야 하고….”
그리고, 누구 기다려야 해. 최서희가 다짐하듯 한 말에, 노인은 몇 번이고 고개를 주억여 답했다. 네가 바라는 것이면 무엇이든 해 주겠다는 것마냥. 물론 어른들은 항상 거짓말을 하므로 온전히 믿을 수는 없겠지만, 제게 몇 번이고 그리 해 주겠다 반복하는 모양새가 할매를 찾고 공주를 찾아 동네를 돌던 제 것마냥 간절해서. 그래서 조금만, 아주 조금만 믿어 주는 거야.
최서희가 찔끔, 아주 찔끔 손을 내밀었다. 늙은 나무처럼 옹이 진 노인의 손이 아이의 얇은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금방 깨질 것을 다루듯 조심스러운 그 손길마저 온전히 기껍지 못하고, 그저 지금은 잠들어 있을 누군가를 떠올리게만 했다. 노인의 손에 이끌려 온통 눈 시리도록 새하얀 병원의 통로를 빠져나가며 최서희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너, 나중에 말고 빨리 만나러 와.
나한테 와.
꼭.
***
아. 낯선 천장이다.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새하얀 격자무늬 천장에 본능적으로 모 애니메이션의 패러디 대사 같은 것이 튀어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일반인 코스프레를 멈추지 않는 나. 장하다.
잠시 자화자찬을 마친 정연이 흐릿한 시야를 닦아내려 손을 올리다 멈칫했다. 왼 팔뚝 안쪽에 웬 링거 줄이 생뚱하니 꽂혀 있었다. 뒤늦게 습, 들이마신 숨에선 희미한 소독약 냄새가 난다. 병원인가. 정연은 조금 멍청하게 눈을 깜박였다.
내가 왜 병원에 있지.
상황을 파악하려 멍하니 눈동자만 굴리던 정연이 문득 따끔거려 오는 이마에 눈살을 조금 찌푸렸다. 더듬어 보니 어쩐지 익숙한 모양새로 커다란 거즈가 이마를 덮고 있었다. 이러니까 꼭 다섯 살 때로 돌아온 것 같기도 한데, 제 손 크기를 보아하니 지금은 열 살이 맞고. 정말로 뭐지.
혹시 자다가 외계인에게 납치당한 건 아닌지 깊고 깊은 생각에 잠겨 이마를 문지르다 못해 머리칼을 쥐어뜯고 있자니 문밖으로 링거대 돌돌 미는 소리가 들렸다. 자박자박, 신발을 조금 끌며 걷는 가벼운 발걸음 소리도 함께였다.
장소는 바뀌었지만 익숙한 발소리다. 그것을 못 알아들을 리 없는 정연은 서둘러 잔뜩 헤집어 헝클어진 제 머리칼을 손으로 슥슥 빗어 내리고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던 팔다리를 끌어 올렸다. 어쩐지 온몸에 힘이 들어오지 않았지만, 이 정도면 아이 한 명 속일 정도로는 멀쩡해 보일 테다.
영문도 모르고 발발 떨리는 다리를 은폐하려 재빨리 이불까지 덮은 정연이 분주하던 고개를 베개에 누이고 평소 같은 표정으로 제 발치만 내려다보고 있으니 통통, 들으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모를 자그마한 노크 소리가 두 번 울렸다. 그러고는 답이 돌아오기도 전에 슬쩍 문을 열어 안을 빼끔 본 다갈색 눈동자가 정연의 것과 한 번 마주치고는, 제 자리에서 한 번 펄쩍 뛰었다.
그 모양새에 말을 걸기도 전에 아무 일 없었다는 양 문이 콩 닫히고, 시치미 떼듯 노크 소리가 다시 두 번이었다.
이미 다 들켰는데. 다 커 가지고는 아직도 머리만 숨기면 다 숨은 줄 아는 것만 같은 그 모양새가 귀엽고 웃겨서, 정연은 아픈 머리로도 옅게 웃었다. 웃으면 수명이 는다던데, 그렇게 한준이 연장한 제 삶이 십 년은 꼬박 넘을 것이라 정연은 너그럽게 한준의 부산스러움을 모른 체해 주기로 했다.
“들어와도 돼.”
허락이 떨어지자 다시 조심스레 문이 열리고, 안 그래도 자그마한 한준이 제 키보다 한참은 큰 링거대를 양손으로 꼭 쥐어 밀며 뽀작뽀작 걸어왔다. 귀에 콩깍지가 껴서 걸음 소리가 그리 들리는 게 아니라, 구깃구깃한 환자복 아래 하얀 발에 신겨진 병원용 실내화가 꼭 그런 소리를 냈다. 저런 걸 신고 용케도 넘어지지 않고 여기까지 왔네. 아니, 그보다도.
왜 아직 열 살밖에 안 된 애가 병원에서 저런 흉악한 링거를 맞고 있는 걸까.
순간 정연이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고 얼굴을 꾹 구겼다가, 제 눈치를 슬슬 봐 오는 한준에 금방 애써 표정을 폈다. 그래도 낯빛이 영 좋아지지 않는 것이 저 스스로도 느껴져서, 결국 앞머리를 만지는 척 슬쩍 손으로 제 얼굴을 가린 정연이 찬찬히 물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너랑 내가 왜 병원에 있어? 할 말은 많았지만 가장 먼저 물을 말은 정해져 있었다.
“괜찮아?”
그 투박한 질문 한 마디에, 한준이 으응, 괜찮아, 하고는 온 얼굴로 웃었다. 둥글게 휜 눈 밑 애교살이 창백한 병원 벽을 뒤로 하고도 오롯이 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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