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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꿉친구 지키기 프로젝트-25화 (25/52)

#25

그 뒤, 한준이 느릿느릿 아기 새 같은 목소리로 해 준 이야기를 종합하자면 정연이 모르는 나쁜 아저씨에게 납치를 당했었단다. 자기랑, 나랑, 잘 모르겠는 애 하나까지. 정황을 보아서는 강아지똥, 아니, 최서희와 한준에, 저까지 껴서 납치당했던 모양이다.

다행히 경찰 아저씨들이 금방 와서 구해 줬지만, 정연이 많이 아픈지 깨어나지 않아서 너무너무 걱정했다며 재잘재잘 이어지는 설명에 내내 고개를 주억이던 정연이 제 머리칼을 살며시 쥐어뜯었다.

진짜? 내가 그런 대사건을 기억 못 할 리가 없는데, 아니, 흐릿한 기억 중간에 웬 수상한 남자를 봤던 것 같기도 하지만… 어쩐지 떠올리려 할 때마다 머리가 시큰거리며 아파 왔다.

그래도 재잘재잘, 잘 이야기하는 걸 보면 납치 사건이 한준에게 악몽이 되지는 않은 걸까. 완전히 기억에서 지워버릴 만큼 무섭고 힘든 일은 아니었던 걸까. 그랬으면 좋겠다. 조잘거림 속의 적은 정보들로 기억의 공백을 어떻게든 메워 보려 부단히 애를 쓰던 정연이 한준의 가는 팔에 꽂힌 링거 줄을 다시금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우리 애는 주사 맞기 전에 삼십 분쯤 차근차근 마음의 준비를 시켜 줘야 하는데, 정연 대신 누가 그렇게 해 줬을까. 준이네 어머니가 오셨으려나, 걱정 많이 하셨을까. 줄줄이 이어지려는 생각을 끊어내려 농담처럼 질문을 던졌다.

“주사 맞을 때 안 울었어?”

“안 울었어….”

그래? 씩씩하네. 발간 눈가를 하고서 어물거리는 한준을 모르는 척 슬쩍 칭찬한 정연이 제 옆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평소라면 냉큼 침대에 뛰어들어 정연에게 마구 찰떡같은 뺨을 부볐을 한준이 어쩐 일로 우물쭈물 옆에 서 있었다. 나름 아프다고 신경 써 주는 건가. 다 컸네, 다 컸어.

미묘한 흐뭇함을 느끼고 있자니 앉으래도 앉지 않고 가만히 서 있던 한준이 손을 뻗어, 보들보들한 손끝이 정연의 이마, 거즈 위를 조심스럽게 훑었다. 상처에 어떠한 압박도 주지 않으려는 듯한 그 가벼운 손길에 저조했던 기분이 언제나처럼 슬며시 떠올랐다.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다쳤다면, 분명 너를 지키려다 일어난 일이겠지.

“만져도 돼. 괜찮아, 하나도 안 아파.”

가볍게 내뱉은 말에 으응, 하고 말끝을 늘이는 한준의 몸을 정연의 시선이 빠르게 훑었다. 저는 그렇다 쳐도, 한준은 아프다고 곧이곧대로 말하고 떼를 쓰는 성격이 아니었으니 어디 아파도 정연이 걱정할까 아닌 척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조금 헝클어진 보드라운 머리칼과 어쩐지 약간 살이 빠진 것 같은 어깨를 꼼꼼히 살피던 중, 동그란 손에 얼룩처럼 나 있는 발간 생채기들이 시선에 콕 박혀 들어왔다.

“그런데 너, 손은 왜 그래.”

“손?”

톡 던져진 정연의 말에 한준이 고개를 갸우뚱하곤 제 손에 난 상처의 이유도 모르는지, 한참을 생각에 잠겨 손가락만 꼬물거렸다. 그 작은 손짓이 길게도 이어져, 정연마저도 본래 목적을 잊고 귀여운 꼬물거림에 정신이 팔리려는 찰나, 아. 하는 탄성이 터졌다.

“산에서….”

“산에서?”

저 역시도 기억이 잘 안 난다는 양 갸우뚱, 동그란 머리가 한 번 더 기울어졌다. 병원이라 집에서처럼 편히 씻지도 못했을 텐데 어느 한구석 떡 지지도 않고 결 고운 머리칼이 살풋 흘러내려 반듯한 이마를 가렸다.

“응, 산에서 친구랑 같이 있었는데.”

친구라면 설마 납치범은 아닐 테고, 최서희인가. 그래서 걔랑 같이 있었는데, 손에 상처 날 일이 뭐가 있다고? 재촉하고 싶은 마음을 눌러 참은 정연이 응, 하고 추임새만 넣었다.

“옷 벗고 놀았던 것 같아.”

“오, 옷을?”

응, 이렇게. 훌렁훌렁한 병원 환자복을 벗는 시늉을 한 한준이, 뭐 하고 놀았더라, 하면서 손만 다시 꼬물거렸다. 황당하고 당황스러워서 어, 어, 어… 하는 소리만 내는 정연을 눈치채지 못하고서 그렇게 한참 머리를 굴리다, 이번에는 허리를 숙이고 뭔가를 당기는 것 같은 시늉을 했다.

그 애로서는 나름 기억이 날락 말락 한, 나름대로 즐겁던 버섯 따던 모습을 재현한 것이었지만, 정말 부득이하게도 허리를 낫 모양으로 굽힌 그 모양새에서 최서희 루트의 별로 자세히 묘사하고 싶지 않은 모 일러스트를 연상하고 만 정연이 순간 애들이 아직 볼에 솜털 보송한 꼬마라는 것도 잊고 제 뒷목을 턱 잡았다.

지금 내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이 무슨. 이 무슨… 분기탱천해 말을 잇지 못하고 드라마 속 고혈압 환자마냥 억 억 하는 숨넘어가는 소리만 내던 정연이 그대로 뒤로 고꾸라졌다.

“여, 연아!”

한준이 내지른 비명이 쟁쟁히 병원 복도까지 울렸지만,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진정 비극적인 순간이었다.

그렇게 반쯤 기절했던 정연은 결국 참고 참던 눈물을 펑펑 터뜨리고 만 한준이 울며 모셔 온 의사 선생님이 차가운 청진기로 제 몸을 꾹꾹, 눌러 댈 즈음에야 정신을 차렸다. 사실 정신은 진즉 차렸는데, 제정신을 그즈음에야 차렸다는 이야기다. 정연이 눈을 질끈 감은 채 믿고 싶지 않은 현실과 싸우는 사이에 맥박도 재고 열도 재고 할 일이란 할 일은 죄다 야무지게 챙겨 하신 의사 선생님이 사무적으로 말했다.

“열은 많이 떨어졌네요.”

선생님. 지금 열 같은 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열 살짜리 주제에 세상 다 산 얼굴로 천장을 바라보며 긴 한숨을 한번 내쉰 정연이 얼굴을 베개에 푹 묻었다. 쌍시옷으로 시작하는 길고 긴 욕설이 비집어 나오지 않도록 입을 꾹꾹 눌러 막은 정연이, 뭉개진 소리로 웅얼거렸다.

“선생님, 제가요….”

“네에.”

“기억이 안 나요.”

“네?”

바스락거리며 차트를 넘기는 소리 사이로 의아하다는 양 되돌아온 물음에 베개에서 입을 뗀 정연이 다시 또박또박 말했다.

“기억이 안 난다고요.”

납치를 언제, 왜, 어떻게 당했는지. 그 산속에서 대체 무슨 말도 안 되고 소도 안되고 되어서도 안 될 일이 일어났는지, 하나도 기억이 안 나요. 그걸 알아야 미친놈을 미래에 한 대 때릴지 두 대 때릴지 거꾸로 매달아 버릴지 정할 수 있을 텐데, 기억이 안 난다니까요.

차마 뒷말까진 주절주절 늘어놓지 못한 정연이 머리를 붙잡고 다시 침대 위를 구르는 동안, 의사 선생님의 답변은 간명하게만 돌아왔다.

“그런가요. 큰일이네요.”

기억을 잃었다는데 너무 무성의한 반응 아닌지, 나름 납치당했다가 돌아온 피해자로서는 당연하게도 빼꼼 고개를 드는 반감에 정연이 침대 시트에 묻었던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애치고는 제법 매서운 기세였으나 그도 잠시, 정연은 금방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안경 너머로 정연을 바라보는 의사 선생님의 눈은, 그 눈은… 병원에 온 애들한테서 어머, 기억이 하나도 안 나요! 그런 아침 드라마적 대사를 깨나 들어 봤다는 눈이었다.

그 나이에는 한 번 그래 보고 싶을 만도 하지, 어른인 내가 이해해야지, 하는 그런 너그럽고 지친 사회인의 표정. 거울에서 아침 점심 저녁으로 세 번쯤 보던 바로 그 얼굴에 분통을 느끼기 전에 어쩐지 공감을 먼저 느끼게 되는 제 자신이 싫었다.

아니, 무슨 생각 하는지는 알겠는데.

진짜 기억 안 난다고요. 선생님!

***

아무리 그래도, 나름 머리가 성대하게 깨진, 혹은 그런 것으로 추정되는 환자에게 저런 믿음 없는 얼굴은 좀 너무하지 않나. 정연이 그렇게 조금씩 차오르는 억하심정을 느낄 때쯤, 그 불만의 기류를 눈치챘는지 가볍게 헛기침을 한 번 한 의사가 차트를 넘겼다.

“큰 문제는 아닐 거예요. 환자분이 잠들어 있는 사이에 머리 쪽 사진을 찍어 봤는데 별다른 손상은 보이지 않았거든요. 원래 어린 환자분들 중에 열이 심하게 오르면 그때 일은 기억을 못 하는 경우도 있고요.”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사무적이고 삭막하기 그지없는 위로에 정연이 코끝을 찡긋 찌푸렸다. 거참, 안심되는 말씀이네요. 입 밖까지 튀어나오려 혓바닥을 간지럽히는 비아냥을 삼키고 고개나 대충 주억거린 정연이 툭 던지듯 물었다.

“그럼 저 이제는 멀쩡한 건가요?”

“며칠 동안은 좀 어지러울 수 있어요. 그 외에 배가 아프거나 토할 것 같으면 콜 눌러서 말하면 되고요.”

정연 쪽에서는 보이지 않는 차트에 볼펜으로 휘갈기듯 몇 가지를 체크하던 의사가 끝에 한 마디를 덧붙였다. 기다리고 있으면 곧 부모님 오실 거예요. 글쎄. 과연 그럴까. 정연이 반사적으로 바쁘실 텐데, 하고 중얼거리자 짧은 헛웃음이 돌아왔다.

뭐 그런 걸 걱정해요, 하는 말의 뒤편에는 어린애가. 라는 덧말이 숨어 있을 것이었다. 저는 딱히 어린애가 아닌데. 그렇다고 굳이 반박할 이유도 찾지 못한 정연이 등을 느슨하게 침대에 기댔다.

“그럼 부모님 오셔도, 제가 기억 안 난다거나… 그런 말 했다고 말하지 말아 주세요.”

“그럼요. 비밀 보장도 의사의 의무인걸요.”

진중하게도 말한 의사가 마침표처럼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얼굴에 걸린 미소는 역시나 훌륭한 사회인의 것이라서, 정연은 무심코 확신하고 말았다.

이 사람. 100퍼센트 말한다.

젠장할.

***

그렇게 정연에게 모든 신뢰를 잃은 의사가 자리를 비우자 정연 홀로 덩그러니 남았다. 가만히 누워 있자니 시야에 가득 들어오는 하얀 천장에 눈이 다 시려질 지경이라, 정연은 곧 얇은 홑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한준 탓에 가던 치과를 제외하자면 병원에 온 것도 오랜만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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