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
그래. 죄송하기는 한데,
죄송은 했는데,
이건 좀 너무하지 않나?
거실 한복판에 드러누운 채 뺨을 미지근한 바닥에 붙인 정연이 홀로 작게 툴툴거렸다. 물론 저는 기억나지 않는다고는 해도 어쨌든 대형 사고를 쳐 놓고 큰소리칠 만큼 뻔뻔하지 못했으므로, 이는 한준이 화장실에 가 잠시 혼자가 된 사이를 틈탄 불평이었다.
영 찌뿌둥한 몸을 한 번 쭉 펴 굴리자 한준이 펼쳐 두고 간 수학 문제집이 발끝에 채이고, 여름이 다 끝나 가도록 여전히 밝은 볕이 끝까지 내린 블라인드 틈새로 스며들어 마룻바닥이며 정연의 뺨 위로 하얀 줄무늬를 드리웠다. 요 한 달간 한 번도 직접 쐬지 못한 볕이었다. 정연이 집에 꽁꽁 감금당한 탓에.
물론 자물쇠도, 족쇄도, ‘나에게서 도망칠 거라면 다리는 필요 없지’ 시추에이션도 없고, 감시역도 말랑콩떡 같은 한준뿐인 허술하고 소소한 감금이었지만, 슬프게도 정연은 문만 열고 나가면 되는 이 소소한 감금으로부터 한 달째 빠져나가지 못했다.
이 감금이 게임에나 나올 법한 미친놈들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제 어머니와 한준에 의한 감금이었던 탓이다.
정연은 미친놈들 대가리를 야무지게 후릴 자신은 있었지만, 눈만 떼면 일이 생기니 신경증이 다 생길 지경이라는 어머니의 한탄과, 제가 조금이라도 눈에 안 보이면 겨우겨우 시켜 놓은 눈물 참기 훈련이 무색하게 눈물부터 그렁그렁 매달고 보는 한준의 얼굴에 대고 어떻게 반항이라도 해 볼 자신은 없었다. 그것이 패배의 원인이었다.
그래서, 결국 남은 여름 방학 기간 정연의 하루 일정은 매일같이 지나치게 단순한 것이 되고 말았다. 에어컨 빵빵한 집 안에서 하루 종일 인삼 양갱이니 홍삼즙이니 멍게니 하는 온갖 보양식을 빨아 먹으며, 제게 찰싹 달라붙은 채 한 손으로 삐뚤빼뚤 방학 숙제를 끄적이는 한준의 얼굴이나 구경하기.
평화롭기 그지없는 모양새가 황제 감금은 아니어도 왕자 감금쯤은 되는 모양새라, 전복버섯죽을 먹던 정연이 몸에서 안 받아 주는지 한 번 게워 냈던 날을 빼고는 정말 아무 일 없는 하루들이 느릿느릿 흘러갔다.
그렇게 한 달 정도 아무 일도 없이 집 밖에 나가지도 않고 빈둥거리기나 했더니, 마음속 한구석에서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하지 않나, 하는 털 난 양심의 속삭임이 들렸다. 아니면 한창 놀고 뛰어다니기를 좋아할 나이인 한정연의 속삭임일 수도 있고.
뭐, 그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니까.
줄무늬 햇볕과 뜨뜻미지근해져 가는 바닥 사이에서 호떡처럼 몸이나 뒤집고 있자니, 화장실 안에서 쏴아아, 수도 트는 소리가 들렸다. 곧 나오겠거니, 하고 있자니 물소리 사이로 소곤거리는 듯한 물음이 하나 톡 튀어나왔다.
“연아, 밖에 있지?”
그렇게 묻고는, 정연이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화장실 문밖으로 빼꼼 불안해 보이는 작은 얼굴이 슬쩍 비어져 나온다. 뭐가 그리도 급한지 손에 흥건한 물기도 채 닦지 않은 한준이었다. 감금 사건 직후에는 조금 살이 내려 갸름했던 뺨이, 정연이 옆에서 마구 찔러 먹인 온갖 보약들 탓인지 제법 통통함을 되찾았다. 그에 약한 뿌듯함을 느낀 정연이 고개를 까딱였다.
“응, 있으니까 천천히 수건에 손 닦고 나와.”
어디 있는지는 알지, 하고 느릿느릿 손을 흔들어 주었더니 그제서야 안심했는지 도로 화장실 안으로 고개가 쏙 들어간다. 한준 성격마냥 보시락보시락, 작고 보드랍게 수건 스치는 소리가 났다.
저도 슬슬 준비해야겠단 생각이 든 정연도 느릿느릿 몸을 일으켜 펼쳐진 문제집을 닫고 연필이며 지우개를 필통에 갈무리했다. 소파 밑에 구겨지듯이 반쯤 들어가 있는 가방을 잡아당긴 정연이, 지퍼 바깥으로 비죽이 튀어나온 흰 천을 잡아당겼다. 빳빳하게 다린 태권도복이 그새 구깃구깃했다. 한준 사이즈에 딱 맞는 새하얀 도복을 팡팡 털어 구김을 펴며 정연은 비죽이 조금 웃었다.
그래, 길고 긴 감금 생활은 오늘로 끝이었다. 오늘은 한준이 그동안 쉬었던 태권도 학원에 마침내 돌아가는 날이니까.
겸사겸사 정연도 꼽사리 껴서 나가는 날이기도 하고. 물론 어디로 갑자기 튀어 나가거나 수상쩍은 곳으로 혼자 들어가지 않겠다는 약속을 손가락 걸고 꼭꼭 흔드는 것도 모자라 계약서까지 작성하고 나서야 얻어 낸 외출 허락이었다. 그것도 어머니 손을 꼭 잡은 채로 다녀야 한다는 조항까지 추가된.
당연하지만 처음 그 소리를 들었을 때 정연은 세 살배기 어린애도 아니고 다 컸는데 그 모양으로 어른을 대동하고 돌아다니긴 멋쩍단 마음에 그러면 굳이 안 나가도 된다, 저는 집에 있겠다 말을 바꿨으나 어머니는 강경하게 회사가 일찍 끝나는 날 같이 나가자고 꾹꾹 눌러 말할 뿐이었다.
정연이 그 단호함을 이기지 못한 것은, 무척이나 당연한 일이었다.
손을 보송보송하게 닦은 채 화장실에서 총알처럼 튀어나온 한준이 정연에게 부딪히듯이 안긴 나머지 정연이 무력하게 뒤로 발라당 넘어가 버린 것만큼이나 당연한 일.
그렇게 정연은 한 차례 얼싸안다가 쏟아져 버린 가방을 갈무리한 후에야, 그제야 집 바깥으로 나올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건물 입구를 빠져나오자마자 볕이 온통 하얗게 쏟아지고 풀 냄새가 짙었다. 엊그젠가 드드드, 하는 기계 소리가 들리더니 그새 잔디를 깎은 모양이었다.
찡한 볕이며 향에 자신도 모르게 눈을 조금 찡그렸더니, 그새 무슨 걱정을 한 건지 마주 잡고 있던 한준의 말랑한 손에 힘이 더해졌다. 슬금슬금, 동그란 고개까지 살살 기울여 가며 이쪽 눈치를 살피는 게 누가 봐도 아프고 약한 사람을 살피는 모양새라 웃음이 절로 나왔다. 누가 누굴 걱정하는지.
“괜찮아. 그냥 오랜만에 나와서 그래.”
그래도 걱정하는 마음이 제법 기특한 정연이 걱정을 덜어 주듯 당부하고는 부러 씩씩하게 잡은 손을 끌었다. 빌라 앞 화단을 따라 몇 걸음 걷자 곧 익숙한 차량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 진짜. 이렇게 이른 시간에 나와도 괜찮은 건가. 휴일도 아닌데.
공연히 걱정을 사서 하느라 걸음이 늦어지는 정연을 이번에는 한준이 졸졸 잡아당겨 차로 향했다. 제법 어른인 체를 하려는지 문도 열어서는 정연이 먼저 타기를 기다리는 모양새가 앙큼해서, 그제야 정연은 회사 정규 근무 시간에 대한 걱정을 잊고 다시 조금 웃었다.
그렇게 둘 다 차 안으로 몸을 쏙, 들이자 운전석에 앉아 있던 정연의 어머니가 고개를 살짝 뒤로 틀어 까딱였다.
“정이 이모, 안녕!”
“엄마, 안녕.”
파란 나뭇잎이 떨어져 쌓이듯 소복소복 쌓이는 인사 위로 그래, 안녕. 하는 삭막한 인사가 따라붙었다. 이제는 무관심이 아니라 낯섦이라는 것을 아는 목소리였다.
그렇게 셋이서 태권도 학원에 가는 내내 널찍한 차 안은 조용할 일이 없었다. 그리 멀지도 않은 곳에 가는 동안 내내, 한준이 쉴 새 없이 조잘거렸기 때문이다. 그 나이대 사내애답게 째지는 듯한 목소리가 아니라, 아기 새 지저귀듯 보들보들한 목소리라 정연에게도 정연의 어머니에게도 딱히 불만은 없는 일이었다.
하여튼, 그 조잘거림의 주제는 딱 하나였다.
“정이 이모랑 계속 꼭 붙어 있어야 해. 모르는 사람 따라가면 안 되구, 그리구….”
정연의 안전 점검.
내가 어쩌다 이런 콩알만 한, 물론 진짜 콩알보단 훨씬 크지만 누가 봐도 아직 조막만 한 어린애한테 걱정을 다 듣는지 조금 어이가 없으면서도, 지은 죄가 있는 정연은 다 도착해서 내려야 할 때까지도 조잘거림을 멈추지 않는 한준에게 일일이 그러마 하고 고개를 주억여 주었다.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는지, 차에서 내리면서도 한준은 꼭 으름장을 놓듯 한 마디를 더 붙였다. 참새마냥 동그란 눈이 더없이 진지했지만, 안타깝게도 본인이 의도한 것처럼 엄격해 보이진 않고 귀엽기만 했다.
“나 몰래 어디 가면 안 돼, 알았지?”
누가 보면 이산가족이라도 되는 줄 알겠다. 시니컬한 생각이 먼저 드는 것은 습관이었지만, 그것을 저 말랑한 솜사탕 앞에서만은 입 밖으로 내지 않는 것 또한 정연의 습관이었다.
“내가 너를 두고 어딜 가.”
몇 분째 이어지는 이 당부에 장단을 맞춰 주느라 마주 비장하게 말한 정연이 한준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고 있자니, 앞자리 쪽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한 번 들렸다. 꼭 오이랑 싸우는 고양이 영상마냥 하찮게 귀여운 것을 보고 웃음을 참는 것 같은….
정연이 백미러 쪽으로 훽 시선을 옮기자, 무슨 일 있었냐는 양 시치미 떼듯 언제나처럼 운전용의 검은 선글라스 아래로 차가운 얼굴이 보였다. 그래봤자 입꼬리는 방금 머금었던 웃음기로 슬금슬금 떨리고 있었지만.
당신 원래 이런 거 보고 웃는 사람 아니잖아!
좀 머쓱해져서 마음속으로만 딴지를 건 정연이, 상황을 무마하듯 한준을 몇 번 도닥이고는 얼른 밖으로 보냈다. 차가 떠날 때까지도 손을 강아지 꼬리마냥 붕붕 흔드는 한준에게 마주 손을 흔들어 주면서.
그 긴 인사를 끊지 않으려는 양, 차가 느릿느릿 출발했다. 안 온 지 고작 한 달이 지났는데 그새 기억에서 조금 흐릿해져 버린 길의 모습이 차창 너머로 느리게 움직였다.
한 명이 내린 것만으로도 다시 조용해지고 만 차 안에서, 정연의 어머니가 공기를 환기시키듯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물었다.
“…정말로 그쪽에 가 보고 싶니.”
무슨 얘기를 하려 그러나 했더니, 한준을 태권도 학원에 내려놓고 갈 행선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정연은 당연하다는 양 고개를 한 번 까딱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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