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소꿉친구 지키기 프로젝트-28화 (28/52)

#28

“네, 마지막으로 한 번만요.”

정연은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납치 사건이 있었던 그 골목으로 돌아갈 것이다. 실상 분명한 목적 같은 것은 없었다. 정연이 모르는 사이에 이벤트가 끝나 버린 그 골목에는 아무도 없을 것이 분명했으니까. 그렇지만, 그래도. 확인 정도는 필요할 것 같았다.

혹시 이제 와서 안 된다 하시진 않겠지, 슬금 눈치를 살피는 정연에게 돌아온 물음은 꽤 의외의 것이었다.

“…무섭지 않겠어?”

무서울 리가. 스물일곱 살 먹고 겪을 일 못 겪을 일 다 겪어 본 정연에게 고작 아무것도 없을 골목길에 들어서는 게 무서울 리가 없었다. 그래도, 지금은 스물일곱 살이 아니니까. 잠시 목덜미를 긁적이듯 만지던 정연은 이런 상황에서 열 살짜리 애가 할 법한 대답을 생각하다가, 툭 던지듯 대답했다.

“괜찮아요. 엄마가 같이 있으니까.”

제가 말해 놓고도 괜히 근질거리는 기분에 발뒤꿈치를 바닥에 콩 찧었다. 언제 들어가 숨어 있었는지 모를 모래알이 신발 깔창으로 굴러 나와 발바닥을 깔깔하게 찔렀다. 제 말 이후로 오묘하게 이어지는 정적 속에서 몸 둘 바를 모르던 정연은 제 신발이나 벗어 한 번 털까 고민하다 그냥 그대로 내버려 뒀다. 골목길인 만큼 느릿느릿 움직이던 차가 결국은 멈춰 섰기 때문이다.

“여기가 맞니?”

카메라 프레임 같은 창문 너머로 빗물을 맞아 글자는 다 지워지고 곰팡이마냥 색만 남은 전단지 잔뜩 붙은 이 전봇대가 보였다. 이 전봇대를 지나쳐 가면, ‘그’ 골목이 나올 것이다. 그것은 정연이 기억하고 있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정연은 별다른 망설임 없이 맞아요, 중얼거리고는 차에서 내렸다. 뒤로 따라 들리는 달칵, 차 문 열리고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느릿느릿 골목길 안으로 종종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멈췄다.

한 발짝 들어선 것만으로도 주변이 온통 고요해지는 골목 안쪽에는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수다 소리도, 전화벨 울리는 소리도, 고양이의 높은 울음소리도, 이따금 심술처럼 바닥의 작은 돌을 차 내는 소리도 없이 나팔처럼 입을 벌린 능소화들만 조용히 익어 가고 있었다.

벽을 타고 담쟁이처럼 붙어 바람에 출렁이는 노랗고 붉은 꽃들, 탁하게 붉은빛 도는 낡은 벽돌들까지, 전부 게임 속 스크립트에서 묘사하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이 장소의 주인이 없다는 것만 빼면. 사람도 고양이도 하나도 없이 삭막한 골목의 끝에는 쓰레기 몇 개만 간간이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흐릿한 기억에도 불구하고 어색하게 여겨지는 그 모양새를 가만히 바라보던 정연을 스치고 간 바람이 제법 서늘했다.

당연하지만, 이곳에 온다고 갑자기 납치 사건의 기억이 갑자기 돌아온다거나 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 모양이다. 거참, 치사하게.

한숨을 한 번 깊게 내쉬었더니 그대로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다. 기운 없이 등을 벽에 툭 기댄 정연이 결국 골목길 구석에 쪼그려 앉아 무릎에 뺨을 괴었다. 그래서, 정연은 한준을 지키지 못한 걸까. 미래의 재앙이 되어 돌아올 사건을 막지 못했으니까.

물론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벌어질 러브러브를 빙자한 유혈 낭자 이벤트를 막을 자신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미리미리 방지해서 한준에게는 꼭 평범한 학교생활을 즐기게 해 주고 싶었는데.

틀어진 계획에 조금의 침울함을 느끼자니 어쩐지 낮아진 시야로 꼬질꼬질한 손톱이 온통 깨져 있는 작은 손가락 열 개가 눈앞에서 달랑거리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미래에 한준의 목을 조르리라고는 상상되지 않는 그 조막만 한 손. 일러스트 속의 미끈한 양아치 얼굴과는 다르게 조금 더 어리고 동그랬을 얼굴은 기억나지 않는데, 딱 그 손만이 기억에 남았다.

그것이 영 찝찝해서, 다시 바닥이 꺼져라 한숨을 뱉은 정연이 꼭 기도하는 모양새로 두 손을 모았다.

하느님, 부처님, 알라… 알라님이라고 해야 하는지 알라신님이라 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신이랑, 천지신명이시여. 그리고 주님보다 위대한 건물주님의 심화 버전인 최서희네 할아버님.

그 강아지똥 좀 공주랑 같이 잘 먹고, 잘 자게 해서 씩씩하고 착하게 키워 주세요.

그래서 고등학교도 한결 고등학교 말고 좀 좋은 곳으로 보냅시다. 미국이라던가, 영국이라던가, 만년 피곤한 삶에 찌들어 사는 사람도 햇살맨이 된다는 캘리포니아라던가. 되도록 이 도시에서도 멀고 한국에서는 더더 먼 곳으로.

그래서 친구도 사귀고, 여자친구든 남자친구든 한준 아닌 사람이랑 교제도 좀 하고. 양아치 짓 하지 말고 꼬박꼬박 공부도 하게 말이에요. 프린세스, 아니 프린스 메이커 한번 기깔나게 해 봅시다. 도덕성도 잘 챙기고, 업보는 좀 줄이고. 예?

되도록 행복하다고 사람을 죽이고 사랑한다고 사람을 죽이는 미친놈이 되지는 않게, 잘 좀 키워 주세요.

우리 집 솜사탕의 목숨이 걸린 일입니다….

그렇게 속으로 중얼중얼 기도 아닌 기도를 왼 정연이 내리감았던 눈을 떴다. 골목길 안 삭막한 풍경에는 여전히 아무도 없었다. 저 있을 곳이 이 낡은 골목길밖에는 없다는 듯 한껏 몸 웅크리고 앉은 아이가 없었다. 좋은 일이었다. 후에는 어떻게 될 일일지 모르지만, 지금은.

사람도 짐승도 없이 낯설게 허한 풍경이 당연한 것이 될 때까지 시선을 준 정연이 이내 뒤돌아 골목을 나섰다. 이번 이벤트는 이렇게 끝났으니까, 다음에는, 다음번에는 조금 더 잘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에야말로, 꼭. 더 준비해야 할 것을 생각하며 바쁘게 머리를 굴리다 보니 손끝에 무언가 닿는 감각이 들었다.

전봇대 근처에 서서 저를 내내 지켜보던 어머니의 손이 정연의 손을 어설프게, 하지만 미끄러져 빠지지 않을 정도의 힘을 주어 쥐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빳빳해지려는 손가락을, 조금의 노력 끝에 굽혀 그 손을 마주 감싼 정연이 고개를 올렸다. 그래, 우선은.

“이제 가요, 엄마.”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

아침 일곱 시 즈음의 지하철에는 사람이 버글버글했다. 제법 서늘해진 가을 공기마저도 좁다란 차량 안, 붐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후텁지근하게 데워져 불쾌감의 이유가 되었다.

밤새도록 술집을 전전하다 이제야 귀가하는지 구겨진 정장에서 술과 토사물 냄새가 펄펄 나는 중년 직장인들을 피해 어깨를 뒤틀던 남성이 문득 코끝을 스치는 상쾌한 향에 고개를 틀었다. 모 음료수 광고에서나 나올 법한 파랗고 하얀 섬마냥 속이 싸하게 시원해지는 향.

근원지는 문가에 바짝 붙은 작달막한 소년이었다. 사슴처럼 가느다랗게 빠진 새하얀 목덜미가 근처 중학교의 교복 셔츠 카라 위로 비죽이 삐져나와 있었다.

무언가에 홀린 듯, 옷가지에 가려 들여다볼 수 없는 속살로부터 출발해 보송해 보이는 갈색 머리칼 사이로 사라지는 늘씬한 선, 사내애치고 좁다란 어깨, 손잡이를 잡으려 한껏 들어 올린 얇은 팔과 섬세한 손끝, 흉터 하나 없이 매끈한 귓불 따위를 훑어본 남자가 인파에 밀린 척 앞으로 한 발짝을 디뎠다. 몸이 지나칠 정도로 바짝 붙었다.

옷 너머로 체온까지 느껴질 정도로 붙은 거리에 소년은 몸을 한 번 움츠리고 손잡이를 쥐지 않은 손으로 제 가방끈을 꽉 움켜쥐었으나, 그 외의 별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소년이 소란이라도 부릴까 은근히 긴장하고 있던 남자로서는 안도할 만한 일이었다. 하기는, 아무리 곱다래도 사내애가 되어 가지고는 다른 남자에게가 좀 붙어 선 것만으로 펄쩍 뛰며 소리를 지르기에는 부끄러울 것이다. 그럴 나이였다. 그러니 나만 운수 좋게 됐지.

마른침을 삼키듯 목울대를 한 번 울린 남자가 이번에는 대놓고 손바닥을 그 애의 어깨에 붙였다. 팔뚝을 슬쩍 타고 내려가는 가칠거리는 손에 짧게 힉, 하고 숨을 참는 듯한 소리가 났으나 그게 고작이었다. 조금 더 과감해져도 아무 반응 못 할 것이 뻔했다.

남자가 남은 손까지 가져다 대려던 그때, 자그마한 소년의 옆에 서 있던 남자가 허리를 살짝 숙이고는 소년의 귓가에 제 입을 가져다 댔다. 아니, 키가 훤칠해 처음에는 정장인가 싶은 옷이 잘 보니 교복이었으니 남자라기보단 소년이 어울릴 나이일 것이다.

설마 봤나. 아니, 제깟 것이 봤으면 어쩌겠어. 혹여 여기서 대거리를 하게 되더라도 사람이 많아 실수로 부딪힌 것을 가지고 뭐 유난을 떠느냐 대꾸하면 될 일이었다. 지하철 안에서 남의 팔이나 허리에 손을 댄 것 정도로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남자는 경험을 통해 알았다.

꼭 직접 추행하는 것만이 아니더라도 닿자마자 비명을 지르는 까탈스러운 것들에게 내가 댁을 뭐 하러 만져, 그 얼굴로 주제를 알아야지, 하고 느물거리는 것 또한 남자의 일상이자 즐거움이었다. 채 참지 못한 분노와 수치심에 부들부들 떠는 얼굴들은 언제 보아도 입맛을 돋우는 별미와 같았다.

유난히 새하얗고 작은 이 소년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남자가 입맛을 다시는 사이 옆자리의 소년은 다시 고개를 세웠다. 그러고는 바짝 붙은 하얀 소년과 남자에게만 겨우 들릴 자그마한 소리로 숫자를 세었다.

“셋, 둘….”

하나. 걸리는 곳 없이 나직하게 낮은 그 목소리가 기어코 하나를 세었을 때, 몸을 비튼 흰 소년이 남자를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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