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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꿉친구 지키기 프로젝트-30화 (30/52)

#30

그 꼴을 내버려 둘 수는 없으므로, 정연에게는 이게 중학생 인생인지 자경단 인생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매일매일 변태를 잡아 족치라는 사명이 주어졌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정연과 한준이 지금껏 퇴치한 변태들로 바벨탑까진 아니어도 불국사 다보탑 정도는 두어 개 뚝딱 세울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다른 일도 아니고, 제 소꿉친구를 지키는 일이었으니까.

문득 동글동글한 정수리며 내년이면 고등학생이라는 게 거짓말 같을 정도로 솜털 보송한 뺨을 내려다본 정연이 잠깐만, 하고는 손을 뻗어 한준의 턱 아래로 구겨져 있던 넥타이를 적당히 당겨 고쳐 맸다. 순하게도 장단을 맞추느라 살짝 턱을 들어 올린 한준이 깜박인 속눈썹이 둥근 뺨 위로 길게 잘 익은 밤색 그림자를 드리웠다.

사춘기는 어디에 가져다 버렸는지 반항기의 기색이라곤 없이 손 타는 모양새가 짠하니 애틋했다. 한준의 교복을 단정하게 정리해 준 정연이 꼭 손가락 두 마디만 한 햄스터를 쓰다듬듯 보드라운 갈색 머리카락을 샥샥 쓰다듬었다. 손길에 부응하듯 고개를 살짝 기울인 한준이 가만히 정연의 손안으로 머리를 부볐다.

아, 이번 얼굴은 치명상이겠다. 알면서도, 정연이 살며시 예쁘게 눈을 올려 뜨려는 한준의 긴 속눈썹 따위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자니,

뒤쪽에서 우다다, 뛰어오는 소리가 들리다 쾅, 정연의 몸에 충돌했다. 일순 휘청이는 시야에 마음이 평온해졌다.

아. 이것 참 나이스 타이밍이긴 한데.

이거 혹시 트럭인가. 나 이세계로 날아가야 하는 걸까… 정연이 그런 택도 없는 생각이나 하며 조금 비틀거리고 있자니, 곧이어 뾰족한 외침이 들렸다.

“한정연!”

격렬한 몸통박치기로 정연을 멈춰 세운 것은 위로 돌돌 올려 묶은 머리며 안경이 유독 둥그런 반장이었다. 아직은 그리 추운 날씨도 아닌데 교복 재킷 안으로 야무지게 껴입은 노랑 후드티 탓에 몸 형태마저 동그랗게 둔둔했다. 그러다 굴러가겠다고 말하면 한 번 더 몸통 박치기를 당하게 되는 것은 아닐지 잠시 고민하고 있자니, 쪼마난 반장이 저보다 반 뼘 정도 쪼마난 한준을 정연에게서 뺏어가듯 꼭 끌어안고는 냅다 외쳤다.

“한정연! 멜로 눈깔 삼천 년 압수!”

그런 눈깔 한 적 없거든. 반사적으로 태클을 건 정연이 혹시 진짜 그랬나? 싶어 미간에 꾹 힘을 주었다. 그사이 이게 무슨 일인지 눈만 댕글댕글하게 뜨고 미어캣마냥 뒤편을 보려 고개를 갸웃거리던 한준이, 부딪혀 온 사람의 정체를 확인하고는 익숙하게 몸에 힘을 뺐다. 위기감이라고는 전혀 없는 얼굴에 마치 파도를 타는 수달마냥 평온한 기색이 어렸다.

그 얼굴을 확인한 정연은 우리 집 강아지가 이웃집 이모에게도 애교를 부려 허전해져 버린 가장의 마음으로 홀로 팔짱을 꼈다. 딱히 외롭지는 않다. 정말이다.

“그럼 반장은 몸통 박치기 압수. 내가 이제 받아 주기에는 뼈가 시려서.”

“정연이 몇 살이야? 틀니 일주일 압수.”

“그건 또 왜….”

그 와중에 왜 틀니는 몇천 년 아니고 일주일만 압수하느냐 물었더니, 틀니는 그만치 뺏으면 굶어 죽을까 봐 일주일만 뺏는단다. 열여섯 살은 아닌데 그렇다고 아직 틀니 압수를 당할 나이도 아닌 내면을 가진 정연은 그 애매한 배려에 조금 서글퍼졌다.

“틀니 없어서 굶어 죽는 게 아니라 다 압수당하고 알거지 돼서 굶어 죽겠다….”

미묘한 아련함까지 스민 그 말에, 콩트 아닌 콩트 내내 반장에게 폭 안겨서는 동글동글한 눈만 이리저리 굴리던 한준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연이는 걱정 안 해도 괜찮아…! 다 압수당하면 내가 먹여 살릴게.”

나긋나긋하니 조그만 목소리와 달리 진지한 눈빛이 제법 비장하게 진심임을 피력하고 있었다. 왜 그렇게까지 소년 가장같은 말투로 말하는 거야. 그 고사리 같은 손으로 어떻게 날 먹여 살릴 건데. 졸지에 솜사탕의 살살 녹는 노동력을 착취해 삶을 연명하는 무능한 가장으로 전락한 기분에 절로 눈가가 시큰해졌다.

그게 뭐가 그리 재밌다고 한정연 표정 좀 봐, 하며 깔깔 웃은 반장이 한준의 머리 위로 뺨을 부볐다.

“우리 준이야말로 아기니까 그런 걱정 안 해도 돼.”

“그런 걱정 안 해도 되는 건 맞는데, 아기는 무슨. 중3이나 됐으면 다 컸지.”

매일같이 속으로 한준을 아기 솜사탕이라고 부르는 주제에 정연이 괜히 태클을 걸었다. 그리고 반장에게는 아무런 대미지가 없었다. 정연의 말은 깔끔하게 무시한 반장이 한준의 복슬복슬 보드라운 머리칼에 뺨을 한 번 부비고는 놓아주었다. 마시멜로같이 보얀 뺨을 내려다보는 눈에서 아주 꿀이 떨어진다.

“깜찍이 늦겠다. 빨리 들어가. 한정연 너는 이따 점심시간에 나 좀 보고.”

“나?”

“응, 너.”

그리고 정연에게는 칼이 떨어졌다. 정연이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도 보지 않고 반장은 쌩하니 교문을 향해 달려갔다.

요즘 애들은 참 성격도 급하지. 괜히 한숨을 내쉰 정연이, 한차례 휩쓸고 간 반장 탓에 다시 부슬부슬해진 한준의 머리칼을 질리지도 않고 잘 만져 정리해 주었다.

지나치게 예쁜 얼굴과 말랑말랑 물떡 같은 내성적인 성격 탓에 한창 성장기의 역변을 겪고 있는 애들 사이에 끼어 있으면 이질감이 드는 한준을, 본래 또래 애들은 우상화하거나 이런저런 소문을 붙여 구설수에 올리기 마련이었다.

그런 탓에 본디 한준에게는 ‘한정연’ 외의 친한 친구가 한 명도 없어야 할 일이었는데, 그래도 운동의 효과인지 정신 교육의 성과인지 조금은 씩씩한 중학생이 된 한준에게는 제법 친구다운 친구가 몇 생겼다.

그중에서도 유별나게 한준을 챙기는 것이 반장, 이진아였다. 아직도 계산이 영 느린 한준이 줄을 설 때나 숙제를 낼 때 꾸물거리는데도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 주곤 하는 것이 장했다.

다만 문제 아닌 문제를 꼽자면, 한준에게는 과할 만큼 착하게 굴면서 정연에게는 꽤나, 심하게, 많이 냉정하다는 것이었는데. 정연이 생각하기에는 그게 전부 얼굴 탓인 것 같았다. 이 면상이 취향이 아닌가 보지.

아무리 그렇대도 ‘한정연’의 낯짝도 그리 차별당할 만큼 못나지는 않았고 되레 반반한 편인데. 아무래도 반장은 요샛말로 대쪽같은 얼빠인 모양이었다. 그럴 만은 하지만, 한준 얼굴에 익숙해지면 나중에 연애는 어떻게 하려고. 정연이 그렇게 남의 미래까지 좀 걱정하는 사이 학주의 쩌렁쩌렁한 고함이 들렸다.

“1분 남았다. 뛰어! 거기 끝에서 오는 놈들! 걷지 말고 뛰어!”

늦게 들어오면 운동장 다섯 바퀴다! 그런 엄포에 주변 애들이 꺅꺅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그 인파에 쓸려 정연도 한준의 손을 붙잡고 떠밀리듯 뛰었다. 복작복작한 사이에 끼어, 넘어질 듯 휘청거리며 교문으로 파도에 밀린 모래알처럼 정신없이 굴러 들어가면서도 한준은 어쩐지 웃고 있었다.

‘평범한 학교생활’이라는 것이 좋아서 그렇게 웃었나.

모를 일이다.

***

형광등을 켜지 않은 탓에 창문으로 들어온 햇빛만이 어슴푸레하게 교실 안을 밝혔다. 뒤로 기울인 의자가 삐걱대는 소리, 아이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소리 사이로 가방을 책상 옆에 걸고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댄 정연이 한준이 앞자리에 앉는 걸 확인하기가 무섭게 드르륵, 쾅. 하고 앞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니들이 어둠의 자식들이냐? 불 좀 켜고 살아라, 불 좀.”

아, 나 중학교 다닐 때도 저런 소리 들은 것 같은데. 정연이 살짝 추억에 잠기는 사이 탁, 탁 형광등 스위치가 눌렸다. 눈이 따끔해지도록 밝아진 교실에 눈이 절로 찡그려졌다.

“이번 주 금요일까지 교우 관계 강화 주간인 거 알지. 마니또 편지랑 선물 아직도 안 준 사람은 반장한테 내일까지 꼭 내고, 아. 부모님한테 수학여행 동의서 사인도 받아 오고. 없는 놈은 두고 간다.”

예에….

변성기가 찾아와 굵직굵직한 대답이 심드렁하게 터져 나오다가, 동의서를 안 받아 오면 학교에서 자습해야 한다는 담임의 말에는 우우, 야유가 터졌다. 그 부산스러운 사이로 정연은 홀로 아무것도 없는 손안을 움켰다. 이미 어머니의 사인을 받아 제출해 버린 지 오래인 수학여행 동의서만 떠올리면 미묘하게 불안해졌다.

그야, 중학교 3학년의 수학여행에서, 한준은 또 다른 ‘공략 캐릭터’라고 쓰고 ‘미친놈’이라 읽는 인물을 만나니까.

그것도 이번에는… 참… 참신하게… 미친… 녀석일 예정이었다. 차라리 평범하게 제정신이 아니면 쥐어패 쫓아내면 그만일 텐데, 이번에는…….

그냥 안 간다고 할 걸 그랬나. 아니, 그래도 인생에 한 번뿐인 수학여행인데. 수학여행 가기 한 달 전부터 두근두근해하며 짐을 싸 두던 한준의 옆에서 같이 쪼작쪼작 챙겨야 할 것을 일러 주던 내내 정연은 내내 갈까, 말까, 던질까, 말까… 고민을 반복했지만, 정연은 언제나 그랬듯이 그 기대에 찬 얼굴을 배반하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대비를 단단히 했으니 괜찮을 것이다. 괜찮아야 했다.

속으로 몇 번이고 결의를 다진 정연이, 주먹을 말아 쥐는 사이 수업 종이 쳤다. 담임이 퇴장하고 첫 수업부터 수학이 들어왔다. 그래, 우선은 수업부터 들어야지. 수학여행은 아직 일주일이나 남았으니까.

그렇게 결연한 마음으로 펜과 교과서를 꺼낸 정연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정연은 수 자나 학 자 들어가는 과목과는 영 연이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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