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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꿉친구 지키기 프로젝트-33화 (33/52)

#33

반장 일은 무슨 반장 일이 그렇게 바쁘다고 애를 못 챙기냐고 구박이라도 하고 싶지만, 이진아를 곁에서 지켜봐 온 결과 사춘기 애들 한 무더기를 챙기는 반장은 생각보다 번거로운 일이 많았고, 솔직히 한준은… 빈말로라도 똑 부러졌다고 말하기 어려운 아기 솜사탕은… 눈을 오 초만 떼어도 안 보일 정도로 길을 진짜 정말 잘 잃어버렸다.

아. 그냥 가지 말까.

어쩐지 거뭇해진 눈가를 한 채, 인터넷을 켜고 새삼스레 지금까지 북마크 해 둔 사이트 목록을 스크롤해 내린 정연이 입 안으로 중얼거렸다. 호신용 가스총, 응급용 호루라기, 아동용 위치 추적기, 잠긴 문 간단하게 따는 방법… 누가 보면 범죄라도 준비하는 줄 알 만한 단어들이 눈앞을 주르륵 스쳐 지나갔다.

지금까지 픽셀이 다 닳도록 본 것들이다. 정연이 세 자리 수의 변태와 치한과 스토커들을 격퇴하는 데 한몫 단단히 기여한 일등 공신들. 허리춤에 가스총을 차고 주머니에 전기 충격기를 넣고 한준의 신발이며 옷에 위치 추적기를 콕콕 붙여 놓고 나면 무슨 엿 같은 일이어도 헤쳐나갈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이 들고는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어쩐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그냥 뭔가가 불길하다는 핑계라도 대고 가지 말자 할까.

아니, 정연이 어떤 사소한 변명거리조차 대지 않고 딱 수학여행 가지 말자고만 해도 한준은 더 캐묻지도 않고 알았다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이유가 궁금하더라도 꾹 참았다가 며칠 후에, 몇 달 후에나 조심스럽게 물어보거나 그마저도 잊어버릴 게 뻔했다.

그렇기 때문에 섣불리 말을 꺼낼 수 없었다. 한준이 타고 난 성질이 순하고 말랑하다 해서 손해 보고 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양보하고 양보하다가 결국 포기가 삶의 일부가 되는 루트야말로, 게임의 배드 엔딩 루트는 아니어도 인생의 배드 엔딩 루트 아닌가.

앞으로 여행 갈 일은 많겠지만, 중학교 삼학년 수학여행은 딱 한 번일 텐데 그걸 왜 한준이 이유도 모르고, 실은 이유 같지도 않은 게임의 스토리 때문에 포기해야 하는가.

그러니까 수학여행은 가야 하는데, 가야 하는데… 풀 수 없는 난제에 갇힌 정연은 제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문 긁듯 괴랄한 소리를 냈다. 그날 저녁에는 알락꼬리여우원숭이의 울음소리 비스무리한 신음이 방문 밖으로 내내 새어 나왔다.

결국 밤을 샌 정연이, 함께 등교하자는 한준을 어머니의 출근 차에 먼저 태워 보내고 혼자 향한 곳은 반장이 입원한 병원이었다. 퀭한 얼굴을 본 반장의 ‘네 장사 밑천은 어디에 두고 왔느냐’는 비난을 듣는 둥 마는 둥 넘긴 정연이 흐느적거리며 보조 침대에 앉았다.

“어제 와 놓고 왜 또 왔어?”

“그냥. 어젠 빈손으로 왔으니까.”

팔뚝에 걸고 온 비타민 음료수 한 패키지를 건네주었더니 누굴 환자로 아느냐며 툴툴대는 소리가 돌아왔다.

“세간에서는 다리 부러진 사람을 보통 환자라고 하지….”

그런 말이나 하며 오는 길에 산 선인장 화분을 마저 건넸다. 이번에도 태클이 걸려 오겠거니, 했더니 이번에는 의외로 별말 없이 손바닥만 한 화분을 받아다가 창가에 올려 둔다. 그걸 보다가 입꼬리를 비죽거린 반장이 비는 사운드를 만회하려는 양 다른 걸로 시비를 걸었다.

“올 거면 준이랑 같이 오지, 어쩐 일로 혼자야. 한준 껌딱지가.”

한준 껌딱지라니. 물론 한준의 안위를 위해 붙어 다니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열여섯 살짜리에게 필요한 만큼의 거리는 두고 있다고 자부하던 정연은 조금 꽁해졌다. 엄연히 말하자면 떼어 놓고 다니려고 해도 살짝 와서 다시 붙고는 하는 건 반장이 아기 찹쌀떡이라고 부르는 한준이 아니던가. 그러나 일일이 해명해도 들어 줄 것 같지 않아 에두른 변명을 던졌다.

“그냥. 한준 있으면 너는 아파도 안 아프다고 할 것 같아서.”

그 말에 반장이 눈을 멀뚱히 굴렸다. 그러고는 자기가 왜 그러겠냐는 둥, 아기 딸기모찌찹쌀떡의 간호를 받을 귀중한 기회 아니냐는 둥 부산을 떨었다. 그런 사람이 어제 자기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서 울먹이는 한준을 자기는 하나도 안 아프고 브레이크 댄스도 출 수 있다는 말로 쩔쩔매며 달래나. 정연은 짧게 코웃음 쳤다.

“수술은 언제 하는데.”

“오늘 저녁에.”

“무섭진 않아?”

“무섭기는 뭐가….”

그렇게 말하면서 눈가를 찡그리는 반장의 얼굴에 아주 짧은 순간의 불안이 스친 것을, 16년 동안 남의 얼굴만 살피면서 산 정연이 놓칠 리 없었다.

한순간 가슴이 뜨끔했다.

눈치채기도 전에 가슴을 콕 찌르고 지나간 것은, 아이가 다쳤는데 병원비부터 떠올리고 마는, 그런 자신을 새삼스레 다시 돌아보고 만 부모의 심정 비슷한 죄책감이었다. 애가 다쳤는데 미래에 일어날 나쁜 일밖에는 걱정하지 못하는 본인에 대한 자조.

문득 정연은 철없게도 미안하다 사과하고 싶어졌으나 아직 어린 애에게 건넬 만한 말은 아니었기에 꾹 삼켰다. 대신 고르고 고른 문장을 겨우 내뱉었다. 할 수 있는 말 중에 가장 십 대 다운 말.

“집 갈 때 같이 갔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 가정. 너에게도 조금 신경을 썼다면 다치지 않았을까.

그 말에 반장은 동그란 눈을 슴벅이다가, 뒤늦게 코웃음을 쳤다. 이게 웃네. 남의 속도 모르고. 정연이 따라 실없이 웃자니 뭘 웃어, 하는 핀잔과 함께 톡 쏘는 말이 돌아왔다. 어느새 끼어 올린 팔짱이 야무졌다.

“잘난 체 대장 한정연 씨, 네가 아무리 잘난 척해도 말야, 어? 네 힘으로 어떻게 세상일들을 다… 어떻게 할 수는 없어. 과보호는 한준한테 하는 걸로 충분하다구.”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마. 장엄하게 시작한 것 치고는 어물거리며 말을 끝낸 반장이 고개를 팩 돌렸다. 아이들은 가끔씩 말의 뒤편에 숨겨진 것을 어른보다도 기민하게 알아차리는 것만 같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저런 말을 하겠어. 잠시 눈도 깜박이지 않던 정연이 뒤늦게 눈꺼풀을 내렸다.

“…반장 어휘력 죽여주네.”

방금 어떻게라는 말 두 번이나 쓴 거 알아? 막 건넨 농담 아닌 농담에 반장이 으르렁대며 주먹을 들어 보였다.

“너도 죽일 수 있는지 한번 볼래?”

그제야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씩씩하게 동그란 얼굴이 눈에 제대로 들어왔다. 정연은 잠시나마 근심거리를 잊고 그 애의 다리 깁스의 빈 자리에 낙서를 남기는 영광을 누렸다.

***

그때까지만 해도 기분이 꽤 괜찮아졌었다.

지각하지 않으려 빠른 걸음으로 오르던 등교길에서 어딘가 익숙한 얼굴을 보지만 않았더라도 더욱 나쁠 것 없는 하루였을 텐데, 불운하게도 세상은 정연의 오늘을 그리 깔끔하게 흘러가도록 안배해 두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정연은 펴질 날이 그리 많지 않은 미간을 다시 구기며 남자의 어깨를 거칠게 잡아챘다.

“아저씨. 여기서 뭐 해요?”

정연이 “개쓰레기새끼 목록”에 집어넣고 잊지 않으려 되뇌던 수많은 범죄자 목록 중 비교적 최근에 기재된 남자였다. 지하철 치한. 전봇대 근처에 붙어서는 학교를 오가는 애들을 위아래로 몰래 훑으며 서성이던 남자가 뒤늦게 정연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말을 더듬었다. 한 차례 난처함이 스쳐 지나간 자리에는 뻔뻔함이 깃들었다.

“하, 학생, 그게 아니라… 회사가 이쪽이라서.”

당연하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을 구라였다.

“골 때리네, 이거….”

순경님한테 분명 우리 못 따라오게 해 달라고 했는데. 교복 보고 찾아온 건가. 뻐근한 목을 몇 번 돌린 정연이 남자의 멱살을 쥐듯 정장 옷깃을 잡고 골목 안쪽으로 질질 끌었다. 벽에 던져 넣듯 밀치는 내내 어, 어, 하는 당황한 소리만 내 대며 반응하는 멍청함이 더 열 받았다.

“지금 길 좀 지나갔다고 사람 이렇게 대해도 되는 거야? 여기 대한민국 법치 국가야!”

“저도 알아요.”

그걸 아니까 지금 당신 목숨이 붙어 있지. 금방 어깨며 팔을 과장되게 퍼득이며 정연을 밀쳐 내려 부산을 떠는 통에 아예 멱살을 잡아다가 바닥에 던졌다. 몸을 일으키려는 남자의 손목을 어디서 사람 좀 잡아 본 모양새로 지그시 밟은 정연이 교복 재킷 안쪽에서 무엇을 꺼내 남자에게 겨누었다.

온통 새까만 총 한 정이었다.

“지, 지, 진짜 총도 아니잖아!”

“당연히 아니죠. 저는 누구랑 달리 준법 시민이거든요.”

바보 같은 소리를 다 한다 생각하며 가스총 총구를 남자의 눈가로 바싹 가져다 댔다. 얄팍하고 누런 눈꺼풀이 슬쩍 밀려 올라갔다.

“가스총이어도 눈 가까이에는 사용하면 안 된다던데. 왜 그런지 아저씨 눈으로 확인해 볼래요?”

“너, 너, 후회할 일 하는 거다, 지금!”

발밑에 깔린 주제에 윽박지르려 드는 태도에 비웃기조차 지겨워진 정연이 무미건조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반듯한 머리칼이 성기게 이마를 훑었다.

“눈깔 반쪽 없이 살아야 하는 건 당신인데 왜 내가 후회를 하지….”

달칵, 방아쇠 당기는 시늉을 하며 말 그대로 눈알을 후비듯 짓누르는 총구에 남자의 배가 어긋난 호흡으로 펄떡이며 튀었다. 물 밖에 던져진 고기처럼 퍼덕이는 몸을 능숙하게도 짓누르고 말을 이었다.

“아저씨, 우리 그렇게 더럽게 놀지는 말죠. 어린애들 꽁무니나 쫓아다니다가 그런 꼴 됐다고 하면 어디 가서 개 쪽팔릴 거 아녜요.”

아저씨도 체면이 있고 사회적 지위라는 게 있을 테니까. 실은 남자에게 그런 것 따위는 없을 거라 생각하는 주제에 정연이 숨구멍 틔워 주듯 읊조렸다. 남자가 정신없이 머리를 위아래로 끄덕이다가 총구가 눈꺼풀 안을 파고들까 겁이 나는지 침을 흘리며 고개를 움츠렸다. 아스팔트 바닥에 대가리를 대고서 자꾸만 뒤로 고개를 물리려 하는 모양새가 필사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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