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겁을 줄 대로 준 정연이 그러면 우리 약속 좀 하죠, 하고 운을 뗐다.
“앞으로 아침에 이 부근에서 지하철 타지 말고요.”
“으어, …어, 그래, 이것 좀.”
“저 애 근처나 학교 100m 안으로 접근하기라도 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가 너는 죽이고 빵 간다. 본래도 낮은 편인 목소리가 부러 성대 안쪽을 긁듯이 거칠어진 채 남자의 귓가에 속삭여졌다. 겉가죽만 사람의 것을 뒤집어쓴 것처럼 체온 한 점 느껴지지 않는 반듯한 눈썹이, 그깟 저열한 말을 중얼거렸을 것 같지 않은 단정한 눈매가 유독 서늘했다.
자꾸만 위쪽으로 뒤집어지려는 눈동자를 추스르던 남자가 헐떡거리며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사람 말을 잘 알아들은 것 같은 모양새는 아니었지만, 더 하다간 비명이라도 지르겠다 싶은 생각에 정연이 느리게 남자의 손목을 밟았던 발을 물리고 마지막으로 가스총까지 얼굴에서 멀찍이 떼어 주었다.
남자는 이쪽을 다시 돌아보지도 않고 허우적거리며 달아났다. 경황이 없는지 털어 내지 않은 발자국이 옷소매에 선명했다.
저러다 어디서 쪽이나 당하라지.
그 뒷모습이 완전히 멀어지도록 서 있던 정연이 곧 가스총을 옷 안쪽으로 잘 갈무리했다. 겪을 일 못 겪을 일 다 겪어 본 정연에게, 있는 거라곤 비틀린 심보와 비대한 자기애밖에 없는 중년 남성 하나 겁주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저대로 기가 죽어서 당분간, 아니, 영원히 이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으면 좋을 텐데. 미친 새끼들 속내란 정연이 영영 이해도 짐작도 못 할 종류의 것이므로 확신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행여 예측할 수 없는 뒤틀린 심기로 남자가 무슨 험한 일을 벌이더라도, 이 정도까지 속을 긁어 둔 만큼 표적은 정연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정도는 정연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범주의 일일 테고.
지금은 그걸로 충분하다.
그제야 머릿속이 찬물을 끼얹은 듯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숨을 깊게 들이마신 정연이 깎은 지 얼마나 지났다고 덥수룩하게 자란 뒷머리를 한 번 문지르며 회색 골목 밖으로 나섰다. 그럼 이제 차분하게 학교부터 가 볼까….
정연이 그렇게 몇 걸음 걷기가 무섭게 멀찍이서 때르르릉, 하고 종 치는 소리가 울렸다.
아. 지각했네.
***
덜컹, 과속방지턱을 지나치는지 버스가 크게 들썩이는 통에 선잠에서 깼다.
잠에서 덜 깬 채 바라본 긴 창밖으로는 가로수며 논들, 드문드문 공장 같은 흰 건물들이 훽훽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도심을 완전히 벗어난 풍경이 어쩐지 낯설었다. 졸릴락 말락 한 기분을 깨고 싶지 않아 눈을 반절만 뜬 채로 휴대 전화 화면만 슬쩍 확인했더니 출발한 아침 시간으로부터 벌써 두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그렇게나 잔 건가.
새벽부터 짐을 다시 점검한다 어쩐다 혼자 부산을 떠느라 잠을 제대로 못 잔 상태였으니까 그럴 만도 하지.
아니, 그게 전부였으면 버틸 만했을지도 모르지만, 수학여행 가는 버스가 출발하자마자 멀미 때문에 토 나온다는 애를 보고 경악하며 비닐봉지를 가져다 받치는 건 예삿일이었고, 화장실이 급하다는 애를 조금만 참으라며 달래면서 5분마다 오늘 우리 어디어디 가냐고 묻는 애들에게 행선지를 알려 주는 건 언제 도착해? 하고 묻는 자식들에게 어어 다 왔어, 하고 성의 없이 대답하던 매체 속 부모님의 마음을 체감할 수 있는 경험이었다.
정연으로서도 손에 꼽을 만치 유독 피곤한 경험이었다. 반장은 어떻게 이러고 살았담.
깨어난 줄 알면 또 부려 먹겠지. 얼른 잠들어 버리는 게 상책이다.
그렇게 눈을 질끈 감고 다시 잠들려니 버스가 덜컹일 때마다 뺨에 느껴지는 보드라운 감촉이 애매하게 신경 쓰였다. 뭐지, 대형 병아리인가. 저도 모르게 거기 대고 한 차례 볼을 부빈 정연이 슬그머니 눈을 떴다. 당연하지만, 그렇게 확인한 보들보들 감촉의 근원은 대형 병아리가 아닌 한준의 갈색 머리칼이었다. 정연의 어깨 위로 머리를 기댄 채 천사처럼 곤히 잠들어 있는. 뺨이 어린애처럼 따끈따끈한.
동년배들 등쌀에 못 이겨 너덜너덜 피로해진 채, 이것이 진정 중학생 수학여행 버스인가 유치원 통원 버스인가를 고민하다 말고 결국 한준의 동그란 머리 위에 뺨을 기댄 채로 까무룩 잠들어 버린 정연을 따라 정연과는 또 다른 - 아마 기대일 - 이유로 잠 못 든 한준도 눈을 붙인 모양이다.
창으로 스민 햇살이 부드럽게 내리깔린 속눈썹 사이를 훑고 볕뉘처럼 뺨과 턱을 희붓하게 수놓아도 눈만 조금 찡그리지 일어날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손 뻗어 눈가를 살짝 가려 주고 나서야 찡그린 미간이 펴지고 숨소리가 걸러졌다.
거 참 누가 애 아니랄까 봐 흔들리는 차 안에서 잘도 잔다. 애도 아니면서 세상모르고 잠든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아마 부산스러운 하루가 될 테니 조금이라도 더 재워 두고 싶은 마음에 여전히 손차양을 드리워 준 채로, 한준에게 기댔던 고개를 슬그머니 들었다. 그러나 깨우지 않으려 조심한 것이 무색하게 잠시 후 끄응, 하고 강아지 같은 소리와 함께 한준의 길게 늘어진 속눈썹이 깜박 들어 올려졌다.
상황 파악을 하듯 다갈색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나 싶더니, 눈이 마주치자 잠투정도 없이 살풋 웃는다. 손끝이 간질거려 오는 탓에 슬쩍 눈을 내리깔았다. 참 방심할 틈새 없이 반짝거리는 얼굴이었다.
“잘 잤어?”
“잘 잤어. 연이는?”
잠든 척해서 귀찮은 일 전부 피하기 전략을 0.5초 만에 포기한 정연이 나도 잘 잤지, 하고 마주 답하고 한준의 헝클어진 머리칼을 손끝으로 슬슬 한 번 정리해 주었다. 그러면서 슬쩍 확인해 본바, 다행스럽게도 한준의 머리카락은 축축한 구석 없이 보송보송했다.
역시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 공략 캐릭터의 신체는 자면서도 침을 흘리지 않는 걸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자고 일어난 정연의 베개나 입가가 젖어 있었던 기억이 따로 없으니 아마 그런 모양이다. 휴. 햄스터의 머리 위에 침을 흘리며 자는 극악무도한 범죄자가 될 뻔한 위기를 모면했군. 속으로 가슴을 세 번쯤 쓸어내리고서 물었다.
“기대서 자면 깨우지, 왜 안 깨웠어. 무겁잖아.”
“아냐, 안 무거웠어! 괜찮아.”
저보다 한참이나 키 큰 놈 머리통을 두 시간 넘게 머리 위에 얹어 뒀는데 안 무거웠을 리가. 미심쩍은 눈을 하고서 한 번을 더 물었다.
“진짜로 안 무거웠어? 목 안 아파?”
“으응, 하나도 안 아파.”
참 나, 그렇게 말하는 애 목이 옆으로 기울어진 채로 비딱하다. 정연은 더 묻는 대신 묵묵히 그 굳은 목과 어깨를 조물거렸다. 살살 주무른다고 주물렀는데도 간지럽다며, 그 와중에도 다른 애들이 깰까 봐 작은 소리로 꺅꺅거리는 한준의 어깨가 다시 몰랑몰랑해질 즈음, 앞자리에서 담임이 몸을 일으켰다.
“다 왔다. 자는 애 있으면 깨워라. 쓰레기 치우고!”
우렁우렁한 그 말에 제 손에 조금 힘이 들어간 것을, 한준이 결국 참지 못하고 간지럽다며 소리 내 웃음을 터뜨린 후에야 깨달았다. 미안, 미안, 하고 놓아 주면서 팔을 뻗어 좌석 위 칸에서 가방 두 개를 끌어 내렸다.
다시 가방 속 내용물을 다 꺼내 필요한 것이 잘 있나 확인하고 싶은 것을 눌러 참으며 제 가방을 둘러메고 한준의 품에도 노란색 백팩을 폭 안겼다. 키 클 것을 고려해서 조금 큰 사이즈로 산 백팩은 아직도 한준이 품에 안기에 버거울 정도로 컸다.
“비상금 어디 있는지 기억해?”
“가방 앞에 들은 지갑이랑 잠바 안주머니, 그리고 신발 밑창!”
“맞아. 그건 진짜 급할 때만 써야 하는 거니까, 가방 어디에 벗어 두지 말고 잘 매고 다녀.”
“연이도 참, 당연히 안 두고 다니지.”
“떨어지지 말고 나나, 다른 사람이랑 꼭 같이 다니고.”
알아, 알아, 하고 정연의 끈질긴 잔소리에도 귀찮은 기색 없이 고개를 끄덕여 주는 한준의 얼굴은… 그러니까 ‘얼굴만은’ 언제나 그랬듯이 퍽 믿음직스러웠다. 하늘이 두 쪽 나도 실수 같은 건 하지 않을 것 같은 진실한 얼굴을 한 한준에게 정연은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까지도 모르는 사람을 따라가면 안 된다느니, 남이 아는 척해도 함부로 말 섞어 주지 말라느니 전화번호를 알려 주면 안 된다느니 하는 말들을 늘어놓았다. 열 번 장담을 시켜도 아홉 번은 잊어버리는 것이 제 소꿉친구인 탓이다.
지금까지 한준이 모르는 사람에게 베푼 친절이 주제 모르는 요상한 집착으로 돌아올 뻔한 것만 해도 열 손가락은 꼬박 채우고도 남았다. 정연이 적정선에서 잘라낸 탓에 한준은 아마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열 번 말해서 안 되는 일이라면 백 번 말해 주면 된다. 그럴 마음도 있고 시간도 충분했으니까. 애초에 한준이 어떻게 행동하더라도, 정연이 수습하면 그만인 일이니까.
먼저 버스의 계단을 내려간 한준이 슬그머니 손을 뻗어 뒤따라 내리는 정연의 손가락에 검지를 걸었다. 그 작고 말랑한 감촉을 마주 감싸 쥐면서, 정연은 다시 한번 의지를 다졌다.
자, 지금부터는 실전이다.
…하고, 바짝 긴장한 것이 무색하게 수학여행의 오전 일정은 평범하게 지나갔다. 하기는, 도자기 공예 체험 중에 무슨 큰일이 일어나기도 어려운 일일 것이다.
몇십 년간 공방을 운영했다는 장인 선생님의 시범을 보고, 물레며 흙덩이를 하나씩 받아 띄엄띄엄 떨어져 앉았다. 흙먼지 날리는 걸 막으려는 탓인지 트여 있는 한쪽 벽에서 햇빛이 고스란히 들어오고 자란 풀들이 바삭바삭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감촉이 이상하다며 돌돌돌 돌아가는 물레 위의 흙덩이에는 손도 못 대고 손가락만 꿈지럭거리던 애들도 나름대로의 적응을 마쳤는지 소매를 걷어 올린 팔뚝까지 흙을 다 묻혀가며 열중이었다.
옷을 더럽히지 않으려 제 손만 빤히 내려다보던 정연이 고개를 든 것은, 옆자리에 앉아 있던 한준이 이상하리만치 조용한 것을 알아차린 탓이었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