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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꿉친구 지키기 프로젝트-35화 (35/52)

#35

“왜 안 하고 있어.”

물끄러미 흙더미만 바라보는 한준의 눈동자가 도르륵, 굴러 정연을 향했다. 시선이 마냥 말갰다.

“어떻게 할지 모르겠어.”

“아까 시범 보여 주시는 거 봤는데도?”

“잘못 만졌다가 이상하게 될까 봐….”

준아. 저기서 흙덩이를 냅다 길쭉하게 뽑아 놓고 그렇고 그런 모양이라며 낄낄거리는 너의 학우들이 진정 보이지 않는 거니? 음, 생각해 봤더니 보지 않는 편이 좋겠다.

은근히 몸을 돌려 그쪽으로 시선이 가지 않게 차단한 정연이 열심히 회전 중인 물레 표면에 슬쩍 손을 가져다 댔다. 손톱 아래로 축축한 흙이 끼고 덩어리의 중간이 옴폭 패였다. 한준은 흙덩이의 모양이 이상하게 될까 봐 걱정한 애치고는 정연을 저지하지 않고 눈만 말똥말똥 뜨고 있었다.

잠시의 조물딱거림을 마치고, 손끝에 묻은 진흙을 바슬바슬 문질러 털어 내며 물었다.

“내가 이거 만져서 이상하게 됐는데. 이제 나 싫어할 거야?”

아닐 걸 알고 하는 질문에 한준은 착하게도 열심히 고개를 저었다. 아냐, 안 그래. 정연이는 해도 돼! 아주 제가 하면 큰일 – 사고 - 이고 정연이 하면 큰일 - 위대한 일 - 이라는 내로남불적 태도였다.

얘는 누가 뺏어간 것도 아닐 텐데 왜 본인 한정으로만 자신이 없을까. 정연이 저 얼굴이었더라면 매일 아침 거울을 보고 하루를 시작하기만 해도 기고만장해지는 걸 참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니 그런대로 건방지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하는 마음에 아주 버릇이 없어질 정도로 오냐오냐 키웠다고 생각했는데. 말랑한 건 천성이라 어쩔 수가 없나? 흙 묻지 않은 새끼손가락을 들어 진흙보다 더 말랑하고 매끄러운 한준의 볼따구를 꾹 눌렀다.

“그럼 너도 그냥 하면 되는 거지. 이상하게 되면 뭐 어때.”

유치한 수법이었지만, 한준에게 가장 잘 먹히는 수단이기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한준은 조금 머뭇거리다가도 천천히 물레 위로 손을 옮겨서, 쿡, 하고 빙글빙글 돌아가는 흙덩이를 찔렀다. 손가락이 아주 조금의 망설임을 표하듯 겉을 긁다가 속으로 쏙 파고들어 깊은 자국을 남겼다. 빙글빙글 돌리는 낚시대를 보는 고양이마냥 빤한 시선으로 집중하나 싶더니 종알거린다.

“말랑말랑해….”

“그래서 기분 좋아?”

응, 하고 대답하고는 헤실헤실 웃는 얼굴이 물 먹은 흙덩이보다 더 말랑말랑했다. 한 번 주물럭거리고 나니 두 번째는 쉬운 모양인지 제법 힘주어 만지면서 모양을 만들기 시작하는 모습에 한숨 놓았다. 한준은 좀 덤벙거리는 데다가 덤벙거리다 일어난 사고들 탓에 조금 겁이 많을 뿐이지 손재주가 나쁜 건 아니니 이제 잘하겠지.

그럼 이제 내 걸 수습해야 할 시간이다.

잠시 방치해 두었던 제 몫의 물레로 돌아간 정연이 흙덩이 위로 손을 올렸다. 심오한 예술 세계의 표현까지는 바라지도 않으니 시간 맞춰 완성이라도 하려는 생각에 부지런히 손을 놀리고 있는데, 제 몫을 다 만들었는지 얼쩡거리던 반 친구 하나가 지나가다 헉, 소리를 냈다. 아니, 헉 소리를 낼 정도야? 조금 물레로 빚었다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찌그러진 부분이 있긴 하지만, 헉 소리를 낼 정도냐고. 정연은 조금 욱했다.

분명히 시범을 본 대로 손 모양을 따라 하는데도 진흙은 정연의 손을 피하는 것처럼 찌그러질 뿐이었다. 도저히 물레에 넣어서 구워 낼 모양새가 되지 않아서, 몇몇 애들을 도와주던 장인 선생님에게 도움을 청한 후에야 정연의 흙덩이는 그릇 모양을 찾을 수 있었다.

“이상한 일이구나. 너처럼 자세가 반듯하면 이게 안 될 이유가 없는데….”

하하, 정연은 어색하게 웃으며 기물에 손이 닿지 않도록 밑판을 받쳐 들었다. 아마도 그다지 잘 기억나지 않는 ‘한정연’의 설정 중에 [미술을 끔찍하게 못함] 같은 것이 적혀 있는 게 분명했다. 그냥 네가 못하는 거 아냐? 하고 묻는 마음의 소리는, 그냥 한 대 콱 쥐어박아서 조용하게 만들기로 했다.

우여곡절 끝에 완성하고 끝이 뾰족하게 잘린 나무젓가락으로 이름을 새겨 넣은 그릇들은 나중에 구워서 학교로 배달될 거란다. 열심히 만든 것을 두고 가는 것이 아쉬운지 뒤를 자꾸 돌아보는 한준이 넘어지지 않게 발밑을 확인하면서 슬슬 잡아끄는 것은 정연의 일이었다. 아마 평생 해도 질리지 않을.

***

딱 이 정도로만 계속 별일 없으면 좋겠다.

키 낮은 건물들과 울퉁불퉁한 돌담, 걸을 때마다 먼지가 폴폴 이는 흙바닥을 풍경으로 부지런히 꺅꺅거리며 뛰어다니는 애들을 바라보던 정연이 길게 하품했다. 이 한옥은 언제 지어졌고 무슨 양식인지 구구절절이 설명하기보다는 애들이 돌아다니면서 직접 보는 편이 좋겠다 싶었는지, 점심을 먹고 난 후로는 자유 시간이 길게 예정되어 있었다.

원래 수학여행이라는 것이 이렇게 느슨한 일정인지 비교해 보려 해도, 중학교 시절이고 고등학교 시절이고 이런 행사에 제대로 참여해 본 적이 별로 없는 정연으로써는 요원한 일이었다. 뭘 해도 상관없다면 버스 안에 들어가서 잠이나 자고 싶은데.

“연이 너는 어디 가고 싶어? 은주네는 한복 대여해 주는 곳 가서 입고 돌아다닐 거래.”

그래도 옆에서 부지런히 조잘거리는 한준을 두고 잘 수 있을 리가 없다. 잠을 깨려 주머니에 있던 사탕을 하나 까 입 안에 밀어 넣고 뺨 안쪽에서 데굴데굴 굴렸다. 사탕 위에 박힌 아몬드가 혓바닥을 들척지근하게 긁었다. 한복 대여라, 아, 일러스트에서 한준이 한복을 입고 있었던 건 그것 때문인가.

“난 어디든 괜찮은데. 너도 한복 같은 거 입고 싶어?”

“음…….”

뭔가 가늠하듯이 정연을 한참 바라보던 한준이 살짝 손을 잡아끌었다. 응, 보고 싶어. 하고 새살거리는 소리가 발걸음 사이로 들렸다. ‘입고 싶어’가 맞는 말 아니냐 물었더니 그냥 웃는다. 뭔가 생각이 있겠지, 하고 흙모래 위로 남는 작은 발자국을 따라 걸었다. 기운차게 정연을 끌고 간 것치고는 방향이 정반대라서 도중에 다시 되돌아와야 했지만, 그런 건 사소한 일이고.

한준이 뻗은 손끝이 온갖 알록달록한 천들 사이를,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듯 사각사각 스치고 지나갔다. 보풀과 먼지 냄새 사이로 파랗게 환한 향이 섞였다. 정연은 왜 우리 애에게 한복 화보 촬영 길거리 캐스팅이 들어오지 않았는지 고민하느라 또 삼십 초 정도를 멍하니 흘려보내야 했다. 그러면 학교물이 아니라 아이돌물이 되어버리니까 그런 걸까. 그래, 장르 수호는 중요하지. 암.

정연이 머릿속으로 카메라를 이리저리 돌려 가며 화보 각을 재고 있자니 한준이 이쪽을 확 돌아보았다. 으악. 눈부셔.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을 뻔했다가 수상해 보일까 봐 참은 정연에게 다가와서는 옷걸이에 걸린 한복 하나를 척 내민다. 별 무늬는 없지만 청량한 색이 제법 예쁜 옥색 두루마기였다.

“이거 입고 싶어?”

너한테는 좀 커 보이는데, 비슷한 거 찾는 거 도와줄까? 하고 말을 꺼냈더니 고개를 도리질 친다.

“연이한테 어울릴 것 같아서.”

옷에 별 관심도 없던 애가 유심히도 고른다 싶더니, 제 것이 아닌 정연의 것을 고르던 모양이었다. 한준이 입으면 질질 끌릴 것이 뻔한 크기도 정연이 입으면 딱 맞을 정도다. 어떻게 우리 애는 옷도 잘 고를 수가 있는 거지? 말도 안 되는 재능이다.

그런 주접이나 속으로 떨어 대는데 한준은 정연의 얼굴을 힐끔힐끔 보다가 입기 싫으면 안 입어도 괜찮아아, 하고 말끝을 늘리며 내민 옷을 거둬 갔다. 그런 물에 젖은 햄스터 같은 시무룩한 표정을 두고 볼 수 있을 리 없어서, 정연은 후다닥 가방을 벗고 두루마기를 걸쳤다.

“이거 봐, 소매 딱 맞는다. 잘 골랐네.”

어울려? 하고 몸을 슬쩍 돌리는 시늉을 했더니 한준이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도 촉촉한 강아지 눈처럼 반질거리던 눈동자가 유난히 반짝거렸다.

“응, 예뻐!”

아니, 예쁜 건 너지. 반사적으로 반박할 뻔했던 정연이 얼버무리듯 입꼬리나 올렸다. 한준은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도 예쁘다고 할 애니까.

“다행이네. 그럼 이제 너 입고 싶은 것도….”

“한정연, 다 골랐어?”

말을 다 잇기 전에 누가 옷소매를 잡아끌었다. 먼저 와서 옷 고르던 애들 중 하나였다. 그러니까, 이름이 은주지. 평상시에 정연의 머리에 머리끈을 주렁주렁 매달아 놓던 무리 중에 있었는지 얼굴이며 이름이 낯이 익었다.

“응, 한준이 골라 줬는데. 왜?”

“너 다 입었으면 우리 고르는 것 좀 도와주면 안 돼?”

맞아, 좀 도와주라. 하고 뒤에서도 조잘거린다. 그걸 왜 굳이 나한테 물어봐, 굳이 물어보는 대신 시선만 주었더니 상대가 금방 이유를 내놓았다.

“준이 아빠가 제일 잘 봐줄 것 같으니까?”

“준이 아빠 같은 소리 하네….”

“엄마라고 할 수는 없잖아.”

아무튼 임시 반장이니까, 봐줘, 하고 막무가내까지는 아니지만 밀어붙여 오는 압박에 정연이 흘끔 한준을 보았다. 소란이 마냥 재밌다는 양 배실거리던 한준이 입 모양으로만 빠끔거렸다.

‘도와줄 거지?’

정연이 여기서 야멸차게 거절하리라고는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 말간 얼굴이었다. 너는 모르겠지만, 원래 내가 이런 데 끼고 그러는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은, 지금의 나는 무뚝뚝하기 그지없던 직장인 ‘정연’이 아니니까.

“골라 주고 올 테니까 너 뭐 입을지도 고르고 있어. 어디 가지 말고.”

한준이 얌전히 고개 끄덕이는 것까지 확인한 정연이 그럼 저쪽에 있는 초록색 치마 가져와 봐, 아니, 그거 말고, 금박 들어간 걸로… 하고 본격적인 훈수질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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