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아니, 머리카락 색이랑 너무 똑같으면 단조로우니까 좀 밝은색으로 입어.”
“귀걸이랑 어울리게 하려면 이쪽 자수 박힌 걸로 해. 모처럼 눈에 띄는 귀걸이인데 아쉽지 않게.”
“빨간색도 너한테 어울리기는 하는데, 형우는 청초한 인상이 좋다고 했으니까 신경 쓰이면 좀 연한 색을 입는 것도 괜찮겠다.”
나는 형우 같은 거 전혀 좋아하지 않지만 마침 살구색 치마가 마음에 드니 입겠다는, 연애 시뮬레이션으로 치자면 츤데레의 정석 같은 애까지 옷을 갈아입으러 탈의실로 들어갔다. 이제 다 됐지? 먼저 다 갈아입은 애들을 보니 알록달록한 색에 눈이 환하다. 당사자들도 꽤 만족하는 모양이고.
이거, 수백 개의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을 거치며 공략 캐릭터의 협소한 마음을 꿰뚫는 의상 선정을 여러 번 경험해 본 짬바가 완전히 녹슬진 않은 것 같다. 마지막으로 게임한 지 십몇 년은 지났지만. 신나게 셀카를 찍느라 바쁜 애들을 뒤로한 채 묘하게 뿌듯한 마음으로 남성용 한복이 걸린 쪽으로 돌아섰다.
“한준, 너는 다 골랐어?”
그렇게 돌아본 곳에는, 잠시간의 들뜸을 비웃듯 아무도 없었다. 한준이 오래오래 만지작거리고 있던 색색의 도포들만 인기척에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었다. 절로 바보처럼 입이 벌어졌다.
“어, 어….”
어디 갔어!!
정연이 속으로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는 것도 모르고 뒤에 있던 애들은 평탄하게 조잘거렸다. 막 옷을 갈아입고 나온 여자애만이 충격으로 금방 뒤로 넘어갈 것처럼 부들부들 경련하는 정연에게 넌지시 말을 걸었다.
“한준? 아까 화장실 간다던데.”
“아니, 그걸 왜 나한테 말을 안 하고, …혼자 갔어?!”
“너도 가만 보면 되게 이상해. 그럼 걔가 다섯 살도 아닌데 화장실을 그냥 가지 허락받고 가?”
“혼자 갔냐니까!”
“야, 그럼 화장실을 혼자 가지 떼로 가냐고.”
세상에는 화장실을 떼로 가지 않으면 순식간에 수상한 사건에 휘말리고 마는 애도 있거든. 헬리콥터 부모를 보듯 뜨악한 얼굴을 하는 상대에게 그런 걸 설명할 겨를이 없어서 정연은 가방만 들쳐 맨 채 그대로 그 자리를 뛰쳐나갔다. 딸랑, 입구에 달아 둔 종이 거칠게 울리는 소리가 곧 야외의 소음에 섞여들었다.
급하게 길 가운데까지 나와 주변을 둘러보아도 알록달록한 옷을 챙겨입은 사람들이 하도 많은 탓인지, 아니면 한준이 멀어진 탓인지 선명한 노란색 가방이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다. 이대로 놓치는… 일이 일어날 리가 없다. 정연이 한준을 키워 온 게 벌써 몇 년 차인데.
침착하게 휴대 전화를 꺼낸 정연이 위치 추적 어플을 켰다. 아주 잠시 렉이 걸린 화면에는 곧 깜박이는 붉은 표시가 떴다. 좋아. 아직 멀리 가지는 않았다. 방향을 확인하고 바로 뛰기 시작했다. 땅을 박찰 때마다 일어나는 진동으로 심장이 불쾌할 정도로 울렁거렸다.
설마, 이 잠깐 떨어진 사이에 무슨 일이 생겼겠어, 하는 생각과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시니컬한 생각이 충돌했다. 그 탓에 일어난 잡음을 감당하는 것까지 언제나처럼 정연의 몫이었다. 그렇게 머리를 부여잡고 커브를 돌았을 때,
공기가 변했다. 한순간에 주변의 모든 소음이 멀찍이 밀려나는 것만 같은 감각과 함께 익숙한 뒷모습이 눈에 들어오고, 언제 골라서 챙겨 입고 나갔을지 모를 연분홍 두루마기가 바람결에 살랑거렸다. 어슷쌓기로 쌓인 오래된 돌담과 그 위의 기와마저도, 꼭 게임에서 과거 회상 CG로 나왔던 모습과 모든 것이 똑같은 듯한, 기분이 든다.
아니, 그러니까. 똑같으면 안 된다고!
정연은 평온을 가장하는 듯한 적막을 깨고 소리쳤다.
“한준!”
“정연아?”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뒤를 돌아보는 모습을 굳이 눈에 담을 필요는 없었다. 눈을 질끈 감은 채 그대로 뛰어들어 한준에게 팔을 뻗었다.
정확히는 한준과 한준의 위로 드리워진 그림자 사이로.
사람의 그림자였다.
벽 너머에서 떨어져 내린 것은 그야말로 ‘아가씨’였다.
한복 대여점에서 이삼만 원을 주고 빌리는 치마와는 광택이 다른 진홍색 비단 치마가 하늘을 배경으로 잘못 피어난 꽃처럼 바람을 먹고 둥글게 부풀었다. 계절을 모르고 물씬 퍼진 찔레꽃 향을 정연은 그대로 팔을 뻗어 낚아챘다.
겉보기보다 두꺼운 몸이 얽히고, 무게가 없어야만 할 것 같은 향과 달리 몸을 짓누르는 하중이 꽤 묵직했다. 세상 빛이라고는 죄 삼킨 것마냥 새까만 머리칼이 나풀거리며 꽃 냄새를 흩어 두면 그 아래로 창백하고 둥그런 이마, 섬세하면서 부드럽게 뻗은 코, 세세하게 뻗은 속눈썹, 그리고 놀란 듯이 조금 크게 뜨인 두 눈.
아, 예쁘기는 또 더럽게 예쁘네. …무도회장 계단에서 신데렐라가 넘어지면서 추돌 사고를 거하게 낸다면 이런 느낌일까. 아니, 얘는 한복을 걸쳤으니 동양풍 신데렐라인가.
땅에 자빠진 채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다 보니 불쑥 강한 힘으로 몸이 일으켜졌다. 갑자기 일어난 사달에 깜짝 놀란 얼굴을 한 한준이 어린애 들어 올리듯 정연의 몸통을 잡고서는 벌떡 일으켜 세운 것이다. 얼떨결에 저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애에게 일으켜진 정연이 얼떨떨하게 고개만 뒤로 젖혔다.
“연아, 괜찮아?!”
“어, 괜찮아….”
신데렐라든 잠자는 숲속의 공주든, 뭐가 와도 역시 한준이 제일 예쁘긴 하다. 떨어지는 사람 하나를 온전히 받아 내기가 쉬울 리가 없어서, 신데렐라의 팔꿈치에 가슴팍을 호되게 부딪혔던지 뒤늦게 저려 오는 고통에 끙 소리가 절로 났다.
팔에 힘이 풀린 탓에 정연에게 잡혀 반쯤 몸을 일으키고 있던 신데렐라가 주르륵 주저앉았다. 아. 쟤도 세워 줘야 하는데. 설마 흙바닥에 앉혔다고 앙심 품지는 않겠지. 여전히 제 몸을 반쯤 끌어안듯 꽉 붙잡고 있는 한준의 팔을 톡톡 쳐 풀어낸 정연이 몸을 숙였다.
“저기……,”
말을 걸기 무섭게 멀리서 아가씨, 어디 계십니까-! 하고 우레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그사이에 장포를 머리끝까지 푹 뒤집어쓴 동양풍 신데렐라가 어깨를 움츠리고 조금 떨었다. 굵직한 목소리는 아직 꽤 거리가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사소하게 떠들 상황은 안 될 것 같다. 잠시 표적을 바꾸려 고개를 돌렸다.
“한준. 화장실은 찾았어?”
“어? 다녀왔어.”
“그럼 먼저 버스 있는 데 가 있어.”
“응? 응….”
그럼 그 사람은 어떻게 해? 너는 같이 안 가? 하는 걱정 어린 시선이 뺨에 닿았지만 정연은 드물게 그것을 못 본 척 고개를 돌렸다. 지금은 길게 대화할 시간이 없었다. 비록 한준이 섭섭하다는 양 손끝을 꼬물거리는 것이 뻔히 느껴졌지만, 그래서 가슴이 살짝 찢어질 것 같았지만… 머뭇거리던 발걸음이 자박거리는 소리로 멀어질 때까지 시선을 주지 않았다.
미안하다, 아기 찹쌀떡아. 네 앞에서 흉흉한 얘기 같은 걸 하고 싶지는 않다는 이 아버지… 아버지는 아니지만, 여하튼 나의 마음을 언젠가 알아줬으면 좋겠구나. 잠시 먼 산을 본 정연이 다시 쪼그려 앉았다.
“지금 저 사람들이 찾는 ‘아가씨’, 당신이죠?”
“…….”
답은 없지만 어깨가 움찔했다. 거짓말을 잘하는 성격은 아닌가 보지. 적어도 지금은.
눈에 띄게 움칠거리던 신데렐라가 갑자기 몸을 숙이나 싶더니 발치 땅을 손톱으로 긁었다. 흙 위로 급하게 휘갈긴 글씨들이 적혔다.
[도망]
[못 본 척 해줘]
그러고는 비틀비틀 일어서 제가 남긴 글씨를 발로 문질러 지우고서는 정연을 스쳐 지나갔다. 담장 위에서 떨어지는 걸 받아 준다고 받아 줬는데도 어딘가 다친 것처럼 위태로운 걸음이, 저러다간 잡히는 것도 시간 문제지 싶다. 눈을 한 번 굴린 정연이 상대가 뒤집어쓴 장포 자락을 슬쩍 잡아당겼다.
“…이미 봤는데 못 본 척하는 건 안 되겠고, 조금 도와줄게요.”
“…….”
그 말에 가던 걸음이 멈췄다. 무슨 말이냐는 반문도 없이 물끄러미 정연을 바라보는 시선이 탁했다.
“그 상태로 도망치면 금방 잡힐 테니까. 옷에 손 좀 댈게요.”
나직이 허락 아닌 허락을 구한 정연이 신데렐라의 허리춤에 손을 가져다 댔다. 빠르게 치마끈을 풀어낸 정연이 벗겨 낸 비단 치마를 제 허리에 덥석 둘렀다. 모양이고 뭐고 풀리지만 않도록 못생긴 옭매듭을 단단하게 묶은 정연이 제 두루마기를 벗어 와중에도 멍한 낯을 한 신데렐라의 어깨에 던지듯 덮었다. 길이가 긴 것이라 하얀 속치마 바람이 어느 정도 가려지는 모양새였다.
장포를 들춘 채로 제가 눌러쓰고 있던 캡 모자까지 신데렐라의 머리에 푹 눌러씌운 정연이 제 작품을 빠르게 한 번 훑어보고는 고개를 주억였다. 이 정도면 가까이서 들여다보는 정도가 아니면 못 알아보겠지.
마지막으로 신데렐라의 몸을 폭 덮고 있던 장포까지 거둬 들고 제 짧은 머리가 가려지도록 대강 둘러맸다. 사락거리는 옷자락의 분내를 어색해할 새도 없이 훌쩍 담벼락에 올라탔다. 기우뚱, 한 번 기우나 싶던 몸이 금방 균형을 잡았다. 겹겹이 벽 너머로도 보일 만치 불쑥 튀어나온 옷자락에, 멀리서 저기다, 하는 외침이 들렸다.
“대충 저- 쪽으로 도망칠 테니까 반대쪽으로 가요.”
눌러쓴 모자 탓에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신데렐라가 정연을 멍하니 올려다보다 일어서서 비틀비틀 자리를 떴다. 반비례하듯 왁왁거리는 굵직한 소리들과 발 구르는 소리가 어느 정도 가까워지는 것까지를 확인한 정연이 휘파람을 한 번 불었다.
좋아. 어그로는 확실히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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