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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꿉친구 지키기 프로젝트-37화 (37/52)

#37

정연은 그 순간부터 전력을 다해 뛰기 시작했다. 비록 상대가 ‘아가씨’를 못 잡아가면 왕창 깨질 것이 분명한 가여운 집사인지 보디가드인지 뭔지 하는 직종의 사회인이더라도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노 양심 플레이어였기에, 한정연도 정연도 딱히 가진 적 없는 리틀 몽키 어쌔신의 영혼을 우주적 차원에서 끌어모아 검게 번들거리는 기왓장을 탁, 탁, 탁, 밟았다.

키 낮은 한옥 지붕과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휙휙 스쳐 지나갔다. 대낮의 한옥 마을은 그 나름의 명성에 걸맞게 사람이 오지게 많았고, 당연하게도 지나는 자리마다 소란이 일었다.

“엄마야!”

죄송하지만 아빠는 안 찾으시나요. 섭섭하시겠습니다.

“무슨 드라마 촬영하나 봐.”

“퓨전 사극 같은 거?”

아, 이건 좀 그럴듯했다. 게임 중에서도 이 캐릭터 때문에 소란이 일면 그 가족들이 드라마 촬영이니 뭐니 하는 말로 은폐했다는 얘기가 나왔던 것 같고. 작게 찰칵거리는 소리에 얼굴이 비치지 않도록 장포를 꽉 눌러 쓰고, 온갖 술렁거림은 귓전으로 넘겨 들으며 뛰었다.

넘어지지 않으려 신경을 곤두세운 탓인지, 몇 겹이 되어 버린 옷 탓인지 선선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땀이 맺히고 숨이 턱 끝까지 찼다. 아지랑이처럼 일렁거리는 시야 앞으로 방금 본 얼굴이 스쳤다. 정확히는, 그 새까만 눈동자가.

점심이 막 지난 시간의 쨍한 햇살조차 조금도 비치지 않는 것만 같던 그 눈에서 정연은 억눌리고 짓밟힌 분노를 보았다. 싹틔우지 못하고 타인의 거름이 된 감정의 잔해들을 보았다. 땅속에서 한껏 썩어 가 결국 염증이 되고 고름이 되다 불붙이면 타오를 기름으로 썩어갈 마음들을 보았다. 평생 무언가를 빼앗기며 살아온 사람의 눈이었다. 언젠가 본 것만 같은, 그런 눈이었다.

굳이 기억에 흐릿하게 남은 일러스트며 스크립트를 떠올릴 수밖에 없도록 판에 박힌 상황이 연출되지 않았더라도 정연은 그 소녀의, 아니, ‘소년’의 눈을 본 순간 깨달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사람은 ‘이상성 프로토콜’의 공략 캐릭터라고.

***

한번 상상해 보자.

지독한 사이비 집안에서 평생을 억눌려 자란 아이가 있다고 치자. 이를테면 하나뿐인 형의 창창한 장래를 위해서는 다음으로 태어나는 게 아들이 아니라 딸이어야 한다는 개 같은 사이비 선무당의 점 때문에 평생을 여자아이인 척 살아가도록 강요받는다는 불합리 속에서 십몇 년을 꼬박 살아온 소년.

열여덟 살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집안의 행사를 틈타 도망쳐 나온 어린애. 하지만 제대로 뛰어 본 적이 없어서 얼마 못 가 붙잡힐 것이 뻔한.

그 불행한 ‘아가씨’가 결과가 정해진 짧은 도망이자 자유의 사이에 반짝반짝하고, 수상한 종교 행사 따위와는 조금도 관련이 없을 것만 같고, 상냥하고 다정하며 듣기 좋은 말만 해 주는 사람을 만난다면, 그 사람을 어떻게 여기게 될까?

A. 사랑에 빠진다.

B. 죽도록 미워한다.

당연히 A 아냐? 선택지 어디 아픈 거 아니냐? 싶겠지만, 실제로 일어나는 꼴을 보면 상황이 꽤 복잡하다.

가출한 ‘아가씨’, ‘이화영’을 마주친 한준은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도망치지 말고 서로 대화해 보면 분명히 가족들도 마음을 알아줄 거예요.’

그 놀라우리만치 천진한, 그리고 생전 처음 들어 본 다정한 말을 듣고 마음이 동한 화영은 돌아가나, 가족들은 결국, 결코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누구라도 탓하고 싶었던 이화영은 제 모든 불행의 이유를 한준에게 돌리기 시작한다.

그때 만난 것이 네가 아니었더라면, 그 상냥한 말들에 속지 않았더라면, 네가 나를 도와줬더라면, 너 때문에 기대하게 되지 않았더라면…,

전부 지금과는 달랐을 거라고.

누구도 미워할 수 없도록 짓눌려 자란 이의 첫 원망이란 첫사랑보다도 지독한 것이라서, 이화영은 고등학교에서 다시 만난 한준을 지독하게 괴롭히게 된다.

그것이 바로 세 번째 공략 루트의 시작이었다.

아니, 근데 그게 왜 내 새깽이 탓이야?

순간 울컥하는 마음에 바닥을 박차는 발이 거칠어졌다. 물론 한준이 한 말이 과도하게 순진한 면이 있긴 하지만, 그게 우리 애 잘못인가? 근본적인 잘못은 걔네 할머니나 형에게 있는 거 아냐? 왜 동대문에서 뺨 맞고 와서 애먼 남의 햄스터 뺨을 때려? 물론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이니 어떻게든 플래그를 세워야 했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말 몇 마디 좀 한 거 가지고!

한 걸음마다 분노를 실어 달리다 보니 어느새 한옥 마을에 들어설 때 지났던 돌다리였다. 며칠 전 내린 가을비로 높아진 수위 탓에 불어난 강물이 암청색으로 출렁거렸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저기다, 하는 외침이 들렸다. 다리를 건너면 다시 무채색 건물이 즐비한 도심이니 이 꼴을 하고서 도망치기에는 여의치 않다.

그래, 그깟 플래그, 내가 꺾어 주마. 집에 돌아가는 게 문제라면 안 돌아가면 되는 거 아냐. 어디 한 번 끝내주는 가출을 해 보자고.

정연은 이를 바득바득 갈며, 그대로 돌난간을 짚고 넘어 강 안으로 뛰어들었다.

***

“너, 너, 너도, 내, 가 바보라고, 새, 생각하지.”

도저히 여자라고 착각할 수 없는, 목 안쪽을 긁어내리는 것만 같은 낮고 음울한 목소리가 고요한 방 안에 내려앉았다. 길고 검게 늘어진 머리칼이 준의 뺨을 간지럽혔지만, 준은 도저히 웃지 못했다.

“그, 그래도, 사, 상관없어.”

더는 몸에 맞지 않는 치마를 억지로 걸친 남자는 온몸을 떨며 울고 있었다. 지나치게 마른 손목을 타고 흘러내린 물기가 발치로 뚝뚝 흘러내려 깨끗한 바닥을 더럽혔다. 웅덩이로 고인 붉은 액체는 길을 만들며 흘러 준의 발치까지 닿았다. 그것이, 그것으로부터 오는 죄책감이 바로 사슬이었다. 준을 이곳에서 도망치지 못하게 하는 유일한, 형체 없는 목줄.

“내가, 이, 이 지옥에 갇혀 있는 동안은, 너도, 못, 가.”

나랑 있자.

그 말만은 한 번 더듬지 않은 남자가 치켜든 칼이 곧 번쩍이는 섬광이 되어 내리꽂혔다.

준은 그것을 피하지 않고 눈을 내리감았다.

***

이화영에 대해 기억나는 것들을 간략하게 늘어놓자면 다음과 같다.

대대로 신앙을 유산처럼 물려받는 사이비 집안의 막내 손자. 여장 남자. 점차 커져 가는 덩치와 낮아지는 목소리 때문에 반강제로 목소리도 잃고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는. 음침한. 대인공포증. 우울증. 낮은 자존심과 자존감. 강한 자기방어 본능.

그러니까, 종합하자면… 한정연과 최서희를 비교적 클래식한 타입의 얀데레로 분류할 수 있다면, 이화영은 평생 억압당한 채 살아온 영향인지 소위 오타쿠들이 말하는 ‘멘헤라’ 타입의 얀데레였다. 현대어로 번역하자면 대략 극단적 불안정 애착 집착형 인간.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어’가 모토인 여타 미친놈들과는 다르게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죽어 버리겠어’라는 표제어를 내민. 살인이나 폭력이 주를 이루는 다른 루트와는 다르게 이화영 루트에는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엔딩이 가장 많다. 참으로 참신한 미친놈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 만큼 언뜻 보자면, 혼자 내버려 두면 한준에게 가는 피해 없이 알아서 자멸할 것 같아 보이지만….

문제는 이 자식 루트만 타면 떨어지는 낙엽에도 갑자기 슬퍼지고는 하는 한준의 작고 소중한 멘탈이 빡빡 대머리 깎듯이 우수수 흩어지다 못해 바닥을 찍는다는 것이었다. 물론 다른 루트를 탄다고 딱히 멘탈이 온건하지는 않았지만, 비교적 그랬다는 이야기다.

한 치라도 삐끗하면 배드 엔딩 - 베드 엔딩이 아니라 - 에 돌입하는 탓에 정연은 비명을 지르면서 한준의 멘탈 수치를 올려 주는 음악 수업만 사천 번 정도는 돌려 들어야 했다.

게다가 스토리 진행 내내 자기는 온전히 피해자라는 양 애처롭게 굴어 놓고 다른 사람을 아예 안 죽이는 것도 아니라는 것도 소소하게 마음에 걸린다. 물론 죽이는 대상이 보통 제 형이나 할머니라는 점에서 정당방위로 볼 만한 여지가 눈곱만큼 있기는 했지만.

어떤 이유로건 한 번 사람을 죽인 사람은 언제건, 누구건 꼭 다시 사람을 죽일 거라는 게 정연의 지론이었다. 사람을 문 뱀은 피 맛을 알아서 자꾸 사람을 물기 때문에 꼭 잡아야 한다는 옛이야기처럼.

그러니까 이화영 루트는 사전에 차단하는 것이 맞는 일이었는데….

“…엣, 취!”

이제 와서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던 것 같기는 하다.

따닥따닥 위아래로 부딪히는 이빨 사이로 자꾸 기침이 튀어나왔다. 진짜 너무 추웠다. 낮 공기는 아직 따뜻하던데 물은 벌써부터 차가워서, 정연은 오들오들 떨면서 뭍으로 기어 나왔다.

물풀처럼 척척하게 젖은 머리를 북북 털었다. 길고 거추장스러운 치맛자락은 저 물 안에 벗어 두고 왔는데도 물먹은 옷이 묵직하게 발을 잡아끌어 자갈이 운동화 밑창에서 오래도 자그락거렸다. 짐을 꽉꽉 욱여넣은 가방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무거운 짐짝이었다. 그나마 방수라 젖지 않아서 다행이지.

가방 속, 지퍼 백에 넣어 두었던 마른 옷으로 갈아입고 비틀비틀 기슭까지, 그리고 사람 드문 틈을 타 도로 다리 위까지 올라오면서 몇 번이고 되뇌었다. 약간 오바한 감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건 필요한 일이었다.

후회하지 말자. 비록 집에 돌아가서 엄청난 감기에 걸리더라도 말야…. 그러한 정신 승리가 어느 정도 유효했는지 지나왔던 길을 눈으로 더듬어 버스가 세워져 있던 곳까지 돌아가는 길에는 이런 생각까지 들었다.

감기 한 번 걸리고 미래의 미친놈과 한준을 떼어놓은 거면 오히려 개이득 아냐, 하고.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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