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저는 한준이구, 중학교 삼학년이에요. 누나는, 아, 누나라고 불러도 되나….”
“…….”
“연이가 겉모습만 보고 나이를 재는 건 예의 없는 행동이라고 했지만, 저보다 키가 크니까….”
“…….”
왜.
“아, 연아! 왔어? ”
“…….”
왜 여기 있는데.
대답도 없는 사람 상대로 조잘조잘 떠들어 대던 한준이 이쪽을 보고는 활짝 웃었다. 그도 잠시, 이내 폴짝 뛰어올라 왜 머리카락이 젖었느냐니, 감기에 걸리면 어떻게 하냐느니 주변을 뱅글뱅글 돌기 시작하는 탓에, 정연은 조금 울고 싶어졌다. 지금 네가 그런 걸 궁금해할 상황이 아니다, 이 아기 햄스터야….
아니, 왜 저 갈 곳으로 알아서 도망쳐야 했을 이화영이 여기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준 딴에는 심각해 보이는 사람 분위기를 풀어 준다고 재롱부리듯 재잘댔을 것이 뻔했다. 그걸 알아서 뭐라 구박 한마디조차 꺼낼 수가 없던 정연이 심란한 마음과 축축한 손으로 한준의 머리칼이나 벅벅 훑어 놓았다.
일전에 눌러씌웠던 모자를 그대로 푹 눈가까지 가리도록 쓴 신데렐라… 그러니까 이화영(추정)이 정연이 있는 쪽을 한 번 보는 둥 마는 둥 하다 고개를 돌렸다. 낯을 가리는 건지 단순히 성격이 나쁜 건지 가늠하기 어려운 태도였다.
“별일 없었어. 그냥 강 좀 구경하다 발을 헛디뎌서, 그런데 저… 분은 왜 여기 있어.”
목소리 낮춰 소곤거리는 모양새에 영문도 모르는 한준까지 따라 소곤거렸다. 사뭇 비밀 작전을 수행하는 스파이마냥 비밀스러운 태도였다.
“…모르겠어. 오는데 왠지 따라오길래, 연이한테 볼 일이 있나 싶어서 물어봤더니 아무런 말두 안 해서. 그럼 연이 올 때까지 여기 있자구 했지.”
물론 비장한 목소리에 비해 내용은 정말 영양가가 없었지만. 그래, 내가 모르는 사람 따라가지 말랬지 모르는 사람이 못 따라오게 하라고는 말 안 했지….
“그럼 저 사람이랑 아무 말도 안 했어?”
“응, 뭐라구 물어봐도 대답이 없어서.”
그래도 상황이 최악은 아니었다. 한준은 이화영이 도망치는 중인 줄 모르고, ‘누구에게서’ 도망치고 있는 줄도 모르고, 그러니 ‘그 대사’를 읊을 일도 없다. 이쪽에서 캐낸 정보는 그 정도면 충분했다.
“있잖아, 부탁이 있는데… 저기 앞에 편의점에서 따뜻한 음료수 아무거나 사다 줄 수 있어?”
“따뜻한 거 아무거나?”
“응, 머리카락이 젖었더니 좀 추워서.”
부탁할게, 했더니 전구에 불 들어오듯 한껏 밝아진 얼굴로 바로 앞의 편의점으로 뛰어갔다. 평소에 부탁 안 하던 놈이 부탁하는데도 따돌리려는 건가, 하는 의혹 조금도 없이 폴랑폴랑 뛰어가는 뒤꽁무니에 강아지 꼬리라도 달린 것 같은 환각이 보여서 정연은 잠시 눈을 비볐다.
아니, 아니. 지금은 그런 귀여운 거나 보고 있을 타이밍이 아니거든. 주먹을 한번 꽉 움키고 도무지 떨어지지 않는 시선을 한준에게서 억지로 떼어 낸 정연이 화영이 있는 쪽으로 한 발짝 다가섰다.
상대는 어린애다. 미래에 미친놈이 될 예정이기는 하지만, 어린애다. 한정연보다 한 살 연상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정연에 비해서는 한참 어린애다. 머릿속으로 세 번 정도 그 사실을 복창한 정연이 고개를 살짝 낮춰 시선을 맞췄다. 이화영이 움찔거리며 고개를 숙인 탓에 의도한 대로 눈을 맞출 수는 없었지만, 시도는 했다는 이야기다.
“어, 아까 쫓아오던 사람들은 따돌렸어요…. 그래서… 잘 도망쳤을 줄 알았는데, 왜 여기 있어요?”
질문에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있던 이화영이 곧 사부작거리며 걸치고 있던 두루마기를 벗었다. 아, 저거 빌려줬었지. 그보다 저거 한복 대여점에서 빌린 거였지! 까먹고 있다가 물어 줘야 할 뻔했네. 정연이 홀로 가슴을 쓸어내리는 사이 이화영은 그냥 건네줘도 될 것을 굳이 차곡차곡 접어서 건넸다.
그냥 모르는 척 갈 곳 찾아서 가면 될 걸, 굳이 돌려주겠다고 정연을 기다리고 있는 걸 보면, … 나쁜 애는 아닌가 싶다. 적어도 아직은.
“보니까 가출한 것 같은데… 갈 곳은 생각해 뒀어요?”
친척 집이라던가, 청소년 쉼터라던가. 덧붙이는 말에도 답이 없었다. 하기는, 아무리 얼굴이 곱상해도 고등학생 올라갈 나이니 슬슬 변성기 올 테고, 여장한 입장에야 말 꺼내기 껄끄러울 테다. 게임에서도 초반부에는 말 대신 글로 의사를 전달했었던 것 같고.
“일단 그런 차림으로 돌아다니면 눈에 띌 텐데. 제 옷이라도 괜찮으면 입고 가요.”
좀 크긴 하겠지만. 한준만큼 작지는 않지만 훤히 내려다보이는 화영의 머리꼭지를 한 번 흘끗 쳐다보고 체격 차이를 확인하면서 덧붙였다.
화영이 한 턴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지퍼 백에 든 옷가지를 받아 들었다. 화장실은 저쪽이에요, 하고 방향을 가르쳐 주자 느릿느릿 그리로 향한다. 어쩐지 안 내켜 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려는 찰나, 화장실 앞에서 머뭇거리다 한쪽으로 휙 몸을 돌려 들어간다.
여자 화장실로 들어가는구나.
여자처럼 행동하라고 배웠으니까 당연한 일인가. 근데 저래도 되나? 게임에서 보면 몸도 마음도 완전히 남자던데. 보면 안 될 광경을 본 것만 같은 미묘한 죄악감에 시선을 돌린 정연은 화장실 안에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를 빌어 주기로 했다. 그게 아마 정연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일 테니까.
“연아! 따뜻한 거 사 왔어!”
뭔가를 더 해 주기에는, 정연은 비닐봉지도 없이 맨손에 달랑달랑 병을 쥐고 뛰어오다 넘어질 것처럼 휘청거리는 소꿉친구를 잡아 주는 것만으로도 바빴다.
“아, 고마워. 음료수는 여기!”
“홍삼이네.”
“편의점 점장님이 여기서 제일 잘 팔리는 거라고 했어! 몸에도 좋대.”
아니, 아마 아닐걸.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브랜드의 홍삼 음료수병을 손안에서 굴린 정연이 쓰게 웃었다. 아마 잘 안 팔리니까 순진한 애 본 김에 적극적으로 팔아넘겼을 텐데, 너는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는 생각도 안 하겠지.
“응, 나 홍삼도 잘 먹어. 고마워.”
병을 따서 한 번에 내용물을 들이켜고, 근처 쓰레기통에 깔끔하게 던져놓은 정연이 한준의 손을 잡아끌었다.
“이제 곧 갈 시간 되니까 한복 반납하고 와서 미리 버스 타고 있을까?”
“응, 그런데 아까 그 사람은?”
“그 사람은, 그 사람이 가야 할 곳에 가겠지.”
신경 쓰지 마, 잊어버려. 하는 말에 한준이 졸졸 정연을 따라 걸음을 옮기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지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것 같은 천진한 낯이 유난히 눈을 멀게 할 것처럼 하얀 건, 직전에 대조될 만큼 우울한 얼굴을 실컷 눈에 담은 탓일까.
신경 쓰지 말라 말한 주제에, 막상 저는 뇌리에 들러붙은 듯한 새까만 얼룩을 바로는 잊어버리지 못하겠다고 생각하며 정연은 자리를 떴다.
***
자리를 피한 보람이 있었는지 정연과 한준이 대여했던 한복 반납을 마치고 버스가 있는 쪽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이화영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안도로 가슴을 백 번쯤 쓸어내리며 다시 버스에 탄 이후로는, 잠시의 비일상이 거짓말이었다는 것처럼 평범한 수학여행이 이어졌다.
숙소에 가서 짐을 풀고, 급식이랑 별다를 바 없는 저녁을 먹고, 인근의 강당에서 레크리에이션을 진행했다. 이 평범한 일정의 감상을 굳이 꼽자면, 우리가 애도 아닌데 그냥 쉬게 해 달라며 야유하던 어둠의 청소년들이 이긴 반 방에는 불시 점검을 안 하겠다는 선생님의 말에 태세를 전환해서는 숫자대로 모이는 게임이니 꼬리잡기니 하는 온갖 게임들에 몸을 불사르는 이 시대의 탈룰라가 흥미로웠다.
물론, 흥미로운 것과는 별개로 자유를 열망하는 십 대 청소년들의 열기 사이에서 버티기에는 정신이 피로했던 정연은 같은 반 학우들의 원성을 감수하고 일찌감치 탈락해 구석에 껌 뱉은 휴지처럼 구겨진 채 한준의 활약을 구경하는 쪽을 택했다.
키가 아깝다든가, 그러고도 네가 임시 반장이냐는 야유를 귓등으로도 안 듣고 꿋꿋하게 구겨 앉은 정연을 보고 한준이 제가 두 배로 더 힘내겠다는 양 웃으며 자꾸 손을 흔들고 브이 자를 그렸다.
그리 밝지 않고 알록달록하기만 한 조명 속에서도 흐려지는 일 없는 이목구비에, 정연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휴대 전화를 꺼내 사진을 마구 찍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고 마주 손을 흔들어 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왕이면 다음 생에는 한준의 법적인 보호자로 태어나서 합법적으로 촬영하고 싶다는 마음을 굳건히 다질 수 있는 유익한 시간이었다.
비록 정연 몫까지 해내겠다고 한 한준도 남을 밀어내야 할 상황이 오면 망설이는 탓에 중반쯤 탈락해서 정연의 옆에 앉기는 했지만. 귀여웠으니 오케이다.
그렇게 - 정연을 제외하고 - 청춘을 불태우는 시간이 끝나고, 고단했는지 씻지도 않고 이부자리에 처박히려고 드는 같은 방 학우들의 땀으로 축축한 엉덩이를 걷어차서 차례대로 욕실로 집어넣고, 한준이 목욕하는 동안에는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눈을 부라리며 문 앞을 서성거리다 보니 정연의 목욕 차례는 가장 마지막 순번으로 밀렸다.
정연이 젖은 머리를 북북 털며 나왔을 때에는 방이 이미 어두컴컴하니 조용했다. 아무리 선생님이 밤중에는 이동하지 말라 엄포를 놓았다고 해도, 눈치를 보며 몰래몰래 다른 방으로 놀러 가는 남자애들은 꼭 있기 마련인지 방 안에는 이미 곯아떨어진 애들만 남아 있었던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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