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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꿉친구 지키기 프로젝트-39화 (39/52)

#39

곱게 자지를 못하고 여기저기 이불 밖으로 굴러 나오고 삐져나온 굵직한 다리들을 밟지 않으려 큰 보폭으로 뛰어넘으며 잠든 얼굴들을 살폈다. 구석 자리에 유독 입도 안 벌리고 천사 같은 표정으로 잠든 한준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 그 옆에 놓인 제 가방에서 얇은 잠바 하나를 꺼내 걸친 채 그대로 베란다로 선회해 나섰다.

한창 성장 호르몬을 분비할 시간에 깨워 버리면 안 되니까 머리는 수건으로 말려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지금은 1mm라도 아쉬울 성장기니까.

베란다 문을 열자 물기가 남은 피부 위로 차가운 밤공기가 훅 와닿았다. 읏추, 하고 어깨를 한번 움츠러뜨렸다가 찬바람이 안으로 스미기 전에 밖으로 나와 도로 문을 닫았다. 여기가 삼 층이었나. 버석버석하게 자란 키 큰 나무가 머리꼭지만 보이고 그 너머로 반딧불처럼 점점이 반짝거리는 야경이 보였다.

목에 걸친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꾹꾹 눌러 짜며 눈을 가늘게 뜨면, 어슴푸레하게 강 흐르는 모양새가 보였다. 낮에 몸을 던졌던 곳이 어느 곳인지까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저 굽이진 길을 따라서 정연이 벗어 던지고 온 진홍색 치마가 흐르고 또 흘러가겠지.

누가 억지로 건져 내기 전까지는.

그래도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지. 이화영의 감시자인지 보디가드인지 하는 놈들이 그 치마를 발견하고 이화영이 물에 빠졌다고 생각하고 찾는 걸 포기하든, 이런 얕은수에는 속지 않고 계속 쫓아가든. 이제 정연이 관여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세상 물정이라고는 하나도 모를 장래의 미친놈이 원하는 대로 가출해서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을지 말지, 그것까지 정연이 책임질 필요는 없지 않은가.

따뜻한 물로 씻은 보람도 없이 금세 차갑게 식어 목덜미에 들러붙는 머리칼을 문지르는데, 뒤에서 베란다 통창을 미는 드르륵, 소리가 들렸다. 졸린지 눈을 부비적거리는 한준이 열린 문 사이로 고개만 쏘옥 내밀었다.

“연아, 거기서 뭐 해?”

정연이 책임져야 할 건 이쪽에 있다.

“계속 자지, 뭐 하러 나와. 자다가 깼어?”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호다닥 맨발로 베란다의 차가운 타일을 밟으며 옆자리까지 당도한 한준의 좁다란 어깨에 점퍼를 벗어서 걸쳐 주었다. 정말로 추웠는지 한준이 말없이 꾸물거리며 점퍼에 팔을 꿰었다. 어쩌면 거절해도 정연이 고집스레 입혀 주리란 사실을 알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일어났는데 연이가 없어서, 어디 갔나 하고….”

“내가 가긴 어딜 가.”

박형우 같은 애나 여자애들 방에 희희낙락하면서 들어가지. 하고 부러 짓궂게 말했더니 한준이 동의의 뜻으로 추정되는 작은 웃음소리를 냈다. 별것 아닌 농담의 답례로 돌아오기에는 그 웃는 얼굴이 지나치게 귀여웠다. 불쑥 한마디가 더 붙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난 너 두고 아무 데도 안 가.”

아무튼, 어디 안 갈 테니 어서 들어가서 자라고 재촉해도, 한준은 연이랑 같이 들어가고 싶다며 미적거렸다. 낯선 곳에서 자는 게 불안하기라도 한 건지. 정연은 덜 마른 머리를 대강 털어 버리고는 한준의 등을 밀며 따뜻한 방 안으로 도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한준의 고집에 이겨 본 경험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혼자서 못 잔다니 어린애라느니, 집에서는 혼자서도 잘 자니까 문제없다느니 하는 말을 소곤거리며 주고받으면서 구석 자리로 향했다.

정리도 안 해 놓아서 이리저리 널브러진 이불이며 빈 과자 봉지들을 발로 대강 밀어 자리를 확보하고, 까는 이불을 탕탕 털어 한준의 옆자리에 곱게 놓았다. 한준이 제 자리에 눕는 걸 확인하고 저도 몸을 뉘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눕는다는 건 진짜 좋은 거구나. 서 있을 때는 욱신거리는 줄도 몰랐던 온몸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겠다 항의하며 바닥에 착 들러붙어 버리는 것만 같다.

누가 들으면 신체 나이 오십 세라도 되냐고 야유할지도 모르지만, 정신적 나이는 그 정도 되는 것 같으니 봐 줬으면 한다. 몸이 가장 편한 자리를 찾으려 잠시간 뒤척거리던 중, 아직 안 잤는지 한준의 자그마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러니까 우리 어릴 때 생각나.”

“어릴 때?”

어릴 때라고는 해도 정연과 한준이 함께 잔 날이 1000일은 훌쩍 넘어갈 텐데. 언제인지 감을 못 잡고 눈을 깜박이자니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이어진다.

“나랑, 연이랑, 엄마랑, 정이 고모랑 다 같이 있어서, 그때는 다시는 그때만큼 행복한 하루는 없을 것 같아서 조금 무서웠는데….”

이제 괜찮아. 졸린지 늘어지는 목소리로 괜찮다고 조잘거린다. 정연이 해묵은 습관처럼 손을 뻗어 한준의 여전히 조그만 몸을 도닥거렸다. 그게 또 좋다고 배실거리며 웃는지 손바닥 아래의 몸이 간지럽게 떨렸다.

“연이가 있으면, 매일 좋은 하루일 테니까….”

들릴락 말락 이어지던 목소리가 곧 고른 숨소리로 변했다. 잠들었다는 걸 알면서도 공연히 몇 번 더 도닥임을 이어 가다가, 반듯하게 돌아누웠다. 어두운 사위 속에서 낯선 천장이 유독 먼 것처럼 느껴져서 금방 눈을 감아버리고, 속으로만 대꾸했다.

그랬으면 좋겠다.

나 같은 게 있어서, 그래도 너한테 좋은 하루가 될 수 있다면,

나는….

***

“한준, 뭐 해?”

운동장을 느릿느릿 가로지르는 내내 제 손아귀만 뚫어져라 보느라 흰 이마밖에 보이지 않던 둥근 뺨의 아이가 금방 얼굴을 들었다. 마냥 반가운 얼굴로 반쯤 뛰듯 다가오느라 손안에 담겼던 물이 손 틈새로 죄 흘러 맥없이 땅을 적셨다. 땡볕 무더위에 운동장 저편에 있는 수돗가에서부터 그 조막만 한 손에 물을 닮아 옮기느라 한참을 조심조심 걸었을 텐데도.

다 흘렸잖아, 하는 지적에도 앗, 하고 작은 소리만 내고서는 어쩔 수 없다는 양 웃어 버리는, 더운 볕에도 조금도 타지 않은 채 함뿍 웃는 얼굴이 보얬다.

“더운데 그늘에 있지.”

“으응, 이거 하느라!”

제게 보여 줄 것이 있다며 손을 잡아 이끄는 아이를 따라 운동장 가에까지 종종걸음을 옮겼다. 발이 잘 닿지 않는 구석, 뒤집어엎었는지 주변과 다르게 축축한 갈색 흙 사이로 시들거리는 민들레 하나가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운동장 한가운데에 피어 있길래 밟히기 전에 파내서 여기로 옮겨 심었다는 것이 한준의 설명이었다.

왜 굳이 그런 짓을 하나 싶으면서도, 그걸 소리 내어 묻지 않을 정도의 분별은 있는 탓에 마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이거에 물 주고 있었던 거야?”

“응, 민들레도 목마를 테니까.”

어차피 비 올 텐데, 가벼운 심술처럼 내뱉은 말에도 그 애는 마냥 아이답게 양손을 펼쳐 손바닥을 하늘로 향해 보였다. 오늘은 안 오잖아. 그래서, 내일 비가 와서 민들레가 목이 안 마르더라도 오늘은 목마를 테니까, 그러니까 물 주는 거야. 조곤조곤한 속삭임이 동화마냥 선연히 다정했다.

어차피 민들레는 하루 이틀 목말라도 안 죽을 거라든가, 물을 줄 거면 물뿌리개로 주지 그러냐든가 하는 말이 혀끝까지 올라왔다가 결국 나오지 않았다. 같이 물 주자며 도로 운동장을 폴짝거리는 걸음으로 뛰어가는 그 애의 뒤를 ■■도 쫓아 뛰듯이 걸었다.

어쩔 수 없었다. 효율이라고는 전혀 없는 행동이, 이유도 없이 비죽비죽 솜털 같은 웃음이 뱃속을 간질이며 차오를 정도로 즐거워서, 이 애가 바보라면, 아무래도 바보도 지독한 열병이고 전염병이라 쉽게도 옮는 모양이라고, 제 손안 가득 청량한 물을 담아 옮기면서 그 여름의 ■■은 생각했다.

티셔츠가 땀으로 다 축축하게 젖을 때까지 작은 그림자 둘이서 분주하게 너른 운동장을 몇 번이고 가로질렀다. 떨어진 물 자국이 비행운처럼 점점이 길게 꼬리를 지어 남았다.

그런 시절의 꿈을 꿨다.

***

수학여행 이튿날은 밤의 추위가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화창했다. 더군다나 행선지가 조금 낡고 작기는 해도 어엿한 놀이공원이었던 터라, 손잡고 온 가족들이며 수학여행 온 학생들로 사람이 제법 많아서 그런지 땅에서 열기가 풀풀 다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여름이 아니라 다행이지. 부지런히 뛰어다니는 어린애들과 기다랗게 늘어진 줄들을 피해 걸으면서 괜히 맨투맨 목덜미를 팔랑거려 안으로 바람을 한 번 불어 넣은 정연이 한준을 돌아보았다.

얼음에 시럽만 뿌렸을 뿐인 밍밍한 슬러시를 꿀 먹는 아기곰마냥 야금야금 빨아 먹던 한준이 왜 그러냐는 듯 눈을 둥글게 떴다. 너무 아껴 먹으면 이빨 다 썩는다, 하는 잔소리가 혀뿌리까지 비집고 나온 것을, 수학여행 날까지 엄격해지고 싶지는 않아서 꿀꺽 삼키고 대신 물었다.

“슬러시 먹는 것도 좋은데, 뭐부터 탈래?”

“연이가 타고 싶은 거?”

내가 타고 싶은 걸 타려고 하면 지금 당장 버스 타고 집으로 돌아가야 한단다, 아기 깜찍아. 사람 버글버글한 곳에 낑긴 것만으로도 급속도로 방전되는 낡고 허접한 체력 - 물론 실제로 몸이 지쳤다기보다는 정신이 지친 것에 가까웠다 - 의 소유자인 정연이 떨떠름하게 입꼬리만 올려 웃으며 손을 올려 한 군데를 콕 집었다.

“애들은 롤러코스터… 같은 거 많이 타던데. 너도 그런 거 타 보고 싶지 않아?”

짜릿하다던데. 힐끔 시선을 올려 멀찍이 보이는, 꼬여 버린 이어폰 줄 뺨치게 구불구불한 롤러코스터 구간을 본 한준의 얼굴이 슬쩍 창백해졌다. 거절을 꺼리는 천성 탓인지 싫다고는 말하지 않았지만 대답 없이 입술만 오물거리는 모양새를 보면 무리인가 보다.

하기는, 한준이 저런 걸 탔다가는 인형처럼 팔랑거리며 날아갈지도 모르니까. 괜히 아무것도 묻지 않아 깨끗한 한준의 볼따구를 쿡 찔러 본 정연이 곧 손끝을 반대쪽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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