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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꿉친구 지키기 프로젝트-41화 (41/52)

#41

전통이니 국산이니 하는 것에 집착하는 집안 아니랄까 봐 돈도 많으면서 오래된 국산 차량을 고집하는 것마저 게임 내의 서술에 걸맞았다. 아니, 그럴 거면 가마 타고 다니지 왜. 흥선대원군의 애매한 열화판 환생 같으니.

속으로 투덜거려 봤자 전해질 리도 없는 불만을 늘어놓다가, 스읍, 하고 마른 숨을 내쉬며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시간을 확인하고, 이른 시간에 집에 가려는지 부모 손을 잡고 가다 잔디밭에 드러누운 정연을 신기한 양 바라보는 네댓 살짜리 아이에게 양손을 흔들어 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습관적으로 주머니에서 사탕 한 알을 꺼내 빨간 포장지를 벗기고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쓴맛이라고는 전혀 없이 들척지근할 뿐인 커피 맛이 천천히 혀를 적셨다. 곧 집합 시간이었다.

“선생님. 저 어머니가 출장 때문에 근처에 계신다고 해서, 같이 돌아갈게요.”

“오, 그러냐.”

조금 이르게 집합 장소로 돌아와 건넨 보고에 담임은 뒷머리를 벅벅 긁다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고작해야 중3짜리 남자애가, 그것도 행실이 얌전한 축에 끼는 정연이 거짓말까지 하면서 외딴곳에 혼자 남으려 하리라고는 상상도 못 하는 태평한 얼굴이었다.

뭐, 어머니가 출장을 가셨다는 건 사실이니까 정연도 그다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는 않았다. 출장지 위치가 정반대인 것 정도는 소소한 문제지.

그 정도 하고 보내 줄 줄 알았더니 질문이 하나 따라붙었다.

“준이는, 같이 안 가고?”

“한준이요?”

우리반에 준이가 하나지 둘인가. 하나니까 한 준이지. 하고 시덥잖은 아저씨 농담을 던져 댄다. 그러거나 말거나 정연은 조금 겸연쩍어졌다. 저런 물음 들을 정도로 우리가 붙어다녔… 다니긴 했지.

“준이는 버스 타고 갈 거예요. 그러니까 졸다가 차고지까지 안 가게 선생님이 한 번만 살펴봐 주세요.”

농담처럼 덧붙인 말에 담임이 알았다며 정연의 등을 내리쳤다. 한준도 다 컸는데 뭐가 걱정이냐는 놀림 같은 말과 함께. 다 크긴 무슨, 중학교 3학년이면 아직 앤데요. 했더니 덩치도 큰 녀석이 애는 무슨 애냐는 반박이 돌아왔다. 아니, 저는 빼고요. 저는 몸이든 정신이든 여러모로 규격 외라고요, 선생님. 그렇게 반박할 수 없으니 사회인의 미소로 자리를 마무리했다.

놀이공원 안을 돌아다니는 동안까지 메고 다닐 수는 없어서 중요한 것만 빼고 버스 안에 놔두었던 가방을 회수하고, 모이기 시작한 애들을 흘깃 바라보았다. 키가 그만그만한 애들 사이에서 혼자 움푹 꺼진 것처럼 작은 한준이 쉽게도 눈에 띄었다.

한준 입장에서는 주변에 사람으로 된 벽이 잔뜩 쳐진 셈이니 정연을 못 보겠지만, 정연은 굳이 손을 흔들어 주었다. 저는 어머니와 함께 돌아갈 테니 걱정하지 말고 버스 타고 집에 가라는 말은 문자로 보고해도 충분하겠지. 아무래도 한준의 얼굴 보고 거짓말하는 건 난이도가 높으니까.

정연이 중학교 3년 동안 봐 온 - 정확히는 관리해 온 - 바에 따르면 적어도 저 버스 안에 한준을 괴롭힐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반장 정도로 열성적이지는 않지만 한준에게 호감을 가진 사람이나 친구라 불러도 괜찮을 법한 사람도 몇몇 있으니 정연이 잠시 옆에 없다고 해도 큰 사고가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누군가가 갑작스럽게 특수한 성벽을 발현하지만 않는다면….

…협소한 가능성인데도 어쩐지 마음이 안정되지를 않는다. 한준의 곁에 있던 사람들이 멀쩡한 척하다가도 갑자기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꾸는 일이 지금까지 무수히도 많았던 탓인지. 그렇게 걱정되면 지금이라도 그냥 한준이랑 같이 돌아가지 그래, 하고 마음속에서 누군가 속삭이는 것만 같다. 이를테면 하얗게 맑은 한준을 제외한 세상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열여섯 살의 한정연 같은 녀석이.

너도 나랑 다를 바 없잖아. 한준 외의 것이 어떻게 되든, 지금까지 신경도 안 썼지? 맞는 말이었다. 정연은 그렇게 동정심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따지자면 제 일 외의 것에는 관심이라고는 없는, 메마르다 못해 삭막한 사람이었다. TV며 인터넷 너머로 보이는 무수한 타인의 불행에 몰두하기보다는 플레이하면 끝나는 게임에 시간을 할애하느라 나머지 것들은 외면하고는 하던. 하지만, 하지만, 준아.

지금의 내가 너보다 고작 한 살 많을 뿐인 어린애를 못 본 척하고 집에 돌아가서도 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너를 마주할 수 있는 걸까.

험한 일을 당한 네가 아니라, 험한 일을 가하는 세상이 잘못된 거라고 말해 줄 수 있는 걸까.

아닌 것 같다. 내가 아직 슬프게도 그 정도로 뻔뻔하지는 못한 것 같다. 그러니까 나는 너에게 조금도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

가방에서 마스크를 꺼내 귀에 걸고, 신발 뒤축을 다시 한번 빳빳하게 펴고, 바닥에 발을 한 번 구른 정연이 휴대 전화 화면을 켰다. 되도록이면 들여다볼 일 없기를 바랐던 어플을 누르면, 회색 지도 위로 빨간 불빛 두 개가 깜박였다. 제 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불빛 하나와 달리 흘러가듯이 빠른 속도로 멀어지는 불빛을 손끝으로 짚었다.

기다려. 미래의 미친놈 하나만 조기 구제하고 돌아갈게.

***

‘내 옷’을 남한테 빌려줬는데 ‘실수’로 거기에 위치 추적기가 붙어 있다는 사실을 까먹었을 - 물론 실수가 아니었다 - 뿐이면…. 블랙에 가까운 그레이존 아닌가?

이럴 때 한준이 있었으면 무슨 말을 해도 네가 맞다고 열심히 고개를 주억거렸을 거고, 반장이 있었으면 오히려 그레이는 한 방울도 없는 블랙이거든! 하고 야멸차게 반박했을 텐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곳에는 정연뿐이었다. 그러니 성공하든 실패하든 혼자만의 비밀로 조용히 묻어두기로 하자. …싶었지만,

시청자분들께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아직 게임이 시작하기도 전인데 모 캐릭터 루트의 배경 스테이지를 찾아 버렸을 때에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라고, 헤드셋 마이크를 살짝 당겨 음향을 조절하며 물어볼 수 없다는 것이 참 오랜만에 통탄스럽다. 물론 이런 질문을 하면 진지하게 대답해 주는 사람보다는 불을 지르라고 냅다 아우성치는 짓궂은 시청자들이 더 많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요한 건 필요한 거다. 특히 이런 광경을 눈앞에 두고서는 더더욱.

이화영네 집안이 사이비인 만큼, 이화영의 스토리에서 중심적인 고난으로 등장하는 것은 ‘제사’였다. 깊고 깊은 산속에 위치해서 찾기 어려운 오래된 절에서 진행되는. 어떻게 진행되는지는 자세히 나오지 않았지만, 대강 피가 터지고 사람 폐인 하나 만들기 딱 좋은 내용임이 틀림없었다. 제사를 몇 년 동안 겪은 이화영이 마침내 어떤 미친놈이 되는지만 생각해도 당연한 일이다.

그런 만큼 될 수 있다면 근처에도 다가가기 싫었는데.

정연은 불운하게도 이곳에 서 있었다. 산속을 한 시간은 꼬박 헤집어야 나오는 낡아 빠진 입구의 기둥, 다 벗겨져 가는 칠, 호랑이인지 용인지 사슴인지 분간도 안 되게 기괴하게 깎인 동물 머리 조각들, 우거진 수풀, 어디선가 풍기는 향냄새, 둥둥, 하고 울리는 희미한 북소리…. 누가 봐도 수상쩍은 종교 행사가 벌어질 것 같은 건물의 입구에.

[아… …입 조건… …족…… 않은 …테이… 입니….]

[돌… 가… 요.]

[…아가.]

[…….]

일러스트도 꽤나 음산하게 나왔었던 것 같은데, 실제로 보니 불쾌감은 더하다. 어쩐지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더뎌지는 걸음을, 곧 물이 코끝까지 차올라 익사할 걸 알면서도 걷는 사람처럼 꾸역꾸역 내디디며 수풀을 헤치고 걷자니 자갈이 빼곡하게 깔린 공터가 나왔다. 나무 뒤에서 훔쳐보자니 사람은 없고 시꺼먼 차들만 너덧 대 서 있었다.

몇 분을 더 기다려서 사람이 오나 안 오나 살피고 휴대폰 화면을 눌러 껐다. 얼굴을 덮은 마스크와 옅게 색이 입혀진 도수 없는 안경이 잘 위치해 있는지 한 번 확인하고 슬금슬금 기억해 뒀던 번호판이 붙은 차량으로 다가갔다. 벌써 행사가 시작해서 끌려간 건 아니겠지. 아무리 그래도 겁대가리 없이 한창 진행 중인 사이비 종교 행사에 난입하고 싶지는 않은데.

그렇게 차로 다가가자, 썬팅도 하지 않은 차창 너머로 무릎을 끌어안은 인영이 비쳤다. 구겨진 정연의 옷을 그대로 입고, 몸을 옹송그린 채 무릎 위로 머리를 푹 기댄 이화영이었다. 시트 위로 올린 발끝에는 신발이 한 짝만 걸려 있었다. 오래 걷고 뛰고 도망친 사람처럼 양말 바닥부터 발목까지가 온통 지저분했다. 갈아입으라고 둔 건지 옆자리에 놓인 개어진 한복이 손도 대지 않은 것처럼 가지런했다.

정연은 잠시 입술 달싹거리다 손마디 세워 똑똑, 유리를 두드렸다. 두들기는 소리에도 팔 안에 쑤욱 박혀 가려진 머리통은 미동이 없는 듯하다가, 뒤늦게 천천히 들렸다. 눈이 마주쳤다. 며칠 전에 마주한 것보다도 훨씬 더 어두컴컴한 눈이었다. 이게 무슨 어린애 얼굴이야. 정연은 속으로 혀를 차고 스마트폰을 눌러 켰다. 빠르게 타자를 치고 메모 어플 화면을 차창에 바짝 가져다 댔다.

[도와줄까요?]

물어본 것이 무색하게 상자에 박힌 고양이처럼 몸을 만 차 안의 인영은 꽤 오래 움직이질 않아서, 정연은 머쓱해졌다. 뭐, 필요 없다고 하면 시간 낭비한 셈 치고 그냥 가도 되니까. 젊은 몸뚱이 좋은 게 뭐겠어.

우선 휴대폰 화면을 끄고 다시 주변을 확인하려 창문에서 떨어졌더니 차 안에서 웅크리고 있던 이화영이 크게 튀어 오르듯 고개를 들어 한순간 시선이 마주쳤다. 어딘가 매달리는 듯한 눈동자가 그마저도 집요하지 못하게 어둑한 차 안에서 금방 가물어 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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