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소꿉친구 지키기 프로젝트-42화 (42/52)

#42

누군가 도와주기를 바라면서, 도와준다는 사람을 믿지도 못하는 그런 얼굴.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지만 기대하는 방법을 모르는 것 같은. 어딘가 익숙한 것도 같은 표정.

어지간히 성격 나쁜 인간이 아니고서야 어린애의 눈을 무시할 수 있겠냐고. 인간적으로, 미래에 납치 감금 상해 및 온갖 범죄를 저지를 예정인 미래의 미친놈이 이런 얼굴을 하는 건 반칙으로 규정해야 하는 것 아냐? 속으로 들어 줄 사람도 없는 불평을 늘어놓으면서 주변에 사람 없는 것을 확인한 정연이 몸을 낮춰 운동화의 신발 끈을 잡아당겨 풀어냈다.

차의 잠금을 푸는 일이 우선이겠지. 신형 차라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곤란했는데, 뭐든지 옛것을 선호하는 이화영네 조모님의 취향에 맞춘 것인지 차는 요즘 차량을 잘 모르는 정연도 이름을 알 정도의 구형이었다. 이 정도면 해 볼 만하다. 언젠가 배웠던 그대로 매듭지은 신발 끈을 차 문 틈새로 집어넣고 잠금장치에 걸어 당겼다.

달칵.

몇 분 지나지 않아 경쾌한 소리와 함께 잠금이 풀렸다. 이걸로 열리지 않으면 옷걸이나 락픽까지 사용해 볼 예정이었는데 의외로 시간이 적게 걸렸다. 실력이 녹슬지는 않은 모양인데. 마스크 안으로 휘파람이라도 불고 싶은 것을 슬쩍 눌러 참고 문을 당겨 열었다. 블랙박스가 있을지도 모르니 목소리를 내는 대신 휴대폰의 메모장에 다시 한번 글자를 입력해서 들이밀었다.

[도망칠 거라면 사람이 없는 지금 가야 해요. 먼저 갈 테니까 오고 싶으면 따라와요.]

인간의 도의상 문은 열어 줬다지만 억지로 잡아끌어 데려가는 것까지는 내 관할은 아니지. 뭐가 예쁘다고 억지로까지 구해 줘. 몇 번이고 속으로 되뇌면서 숲속으로 먼저 걸었다. 부러 느리게 걸음을 딛고 있으면, 곧 사부작거리는 인기척이 뒤로 따라붙었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 주차장 쪽으로 누군가 와서 둘러보더라도 나무에 가려져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나무 틈새로 깊숙이 들어와서야 몸을 돌렸다.

신발을 신지 않은 한쪽 발을 조금 끌면서 몇 걸음 뒤에서 따라 걷던 녀석을 잠시 멈춰 세우고서 그 앞에 제 운동화를 벗어 내려놓았다. 그걸 또 멀뚱히 바라보기만 하더니 정연이 등을 돌린 뒤에야 갈아신는 건지 바스락거렸다. 이건 무슨 어릴 적 학습 만화에서 봤던 명계에서 에우리디케를 데려가는 오르페우스도 아니고. 사람 시선을 뭐 그리 신경 쓰는지.

다 신었는지 꿈질거리는 소리가 멎은 걸 확인한 정연이 다시 숲길을 헤치고 산을 내려갔다. 오기 전에 반대 방향에 두고 온 알람 시계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고, 소란스러운 사람 소리가 섞였다. 저쪽을 먼저 확인할 테니 시간 여유가 있겠지만, 되도록 빨리 하산해서 이 자리를 뜨는 편이 좋겠지.

설정에 따르면 비밀을 숨기느라 야외 활동을 최소화해 왔을 녀석의 작고 연약한 체력으로 제대로 산을 탈 수 있을까 염려한 것이 무색하게, 소리 죽여 숨을 헐떡이면서도 산의 경사가 완만해지고 인적 드문 도로로 진입할 때까지도 뒤에서 들려오는 발소리는 끊기지 않고 미약하게나마 이어졌다.

산에 오를 때만 해도 아직 밝은 오후였는데, 벌써 하늘은 남청색을 넘어 어둑한 색으로 변해 있었다. 그나마 산을 내려오는 와중에 완전히 어두워지지 않은 게 다행이다. 바싹 몸을 조이던 긴장이 슬쩍 풀리는 대로 입을 열었다.

“혹시나 궁금할까 봐 말하는 거지만, 스토킹한 건 아니에요.”

굳이 구체적으로 따지자면 몰래 따라왔으니 스토킹의 분류에 속하는 건 맞겠지만. 그런 세세한 건 따지지 않기로 하자.

“지나가다가 끌려가는 걸 봐서. 혹시 납치인가 싶어서요.”

“…….”

“그쪽이 따라온 걸 보면 맞았던 모양이죠.”

다행이네요. 그런 말에도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정연도 딱히 답을 기대하지는 않았으므로 도로변의 노란 선 바깥쪽으로 걸었다. 이따금 도로의 균열이나 웃자란 풀들이 발밑에 밟혀 양말 한 겹으로만 싸인 발을 찔렀다. 아까는 나름대로 급한 상황이라 자각하지 못했다지만, 슬슬 발바닥이 욱신거려 온다. 신경 쓰지 않으려 의도적으로 시선을 돌리며 뒤늦게 땀이 고인 마스크를 끌어 내려 주머니에 욱여넣었다.

대화 하나 없는 수상한 행렬은 드문드문 줄지어 자리 잡은 가로등 불빛 사이로, 야밤에도 훤하게 켜진 건물의 빛이 섞여들 즈음 잠시 멈췄다. 슬슬 목적지를 정해야 할 때니까.

“그래서, 전에도 물어본 적 있지만 갈 곳 있어요?”

말하기 싫으면 전처럼 바닥에라도 적어요, 하는 말에도 이화영은 운동화 코로 아스팔트 바닥을 긁을 뿐 글씨를 적지 않았다. 적지 않는다기보다는 못 하는 것에 가까운 태도였다. 그래, 갈 곳이 있었으면 그런 곳에서 서성거리다가 잡히지는 않았을 거다.

“집에는, 못 가고요?”

“…….”

잠긴 차 안에 웅크리고 앉아 있던 몸뚱이의 크기는, 손바닥으로 가릴 수도 있을 만치 작아 보였다. 그 인상은 일어서 있을 때라고 다르지 않아서, 정연보다 작은 키와 어깨가 유독 눈에 밟혔다. 꼭 어린애처럼. 아니, 어린애처럼이 아니라… 이화영은 정말로 아직 어리다. 아직 어른의 보호가 필요한 나이다. 본디 덜 자란 아이를 보호하는 것은 가정의 의무였므로 정연이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집이랄 것이 집 같지 않고 가족이랄 것이 가족 같지 않다면.

그래서 생전 처음 보는 남자애한테 의지할 정도로 궁지에 몰린 어린애가 있다면.

“저기요.”

도로를 넘어 인도로 올라와 비뚤게 깔린 보도블록 위를 몇 걸음 더 밟다 뒤를 돌아보았다. 빌라 바깥쪽에 버려져 깨진 화분에서 천천히 말라 가는 이름 모를 식물처럼 비스듬히 기울어진 어깨를 따라 시선을 올리면, 눈이 아프리만치 광도가 높은 가로등 빛 탓에 짙게 진 머리칼 그림자 아래로도 언제 울었는지 벌건 눈가가 선명했다.

고상하리만치 갸름한 눈매는 한준의 동그란 눈매와 그리 닮지도 않았는데, 단지 빨간 눈 밑이, 모든 걸 놓은 것처럼 체념하는 기색이 속이 메슥거릴 만치 어느 게임의 주인공을 닮아서….

이발한 지 얼마 안 지나 바슬바슬한 목 뒤편을 몇 번 문지른 정연이 결국은 툭 던지듯 말했다.

“나랑 갈래요?”

그러니까, 얘는 어른의 보호가 필요하고, 나도, 어른이기는… 하잖아.

그렇지?

“갈 곳 없으면… 말이에요.”

뒤늦게 덧붙인 말에도 길가에는 적막이 내렸다. 수상해 보이려나. 하기는, 겉모습만 보자면 정연은 고작해야 열여섯 살 남자애고 저쪽은 열일곱 살 여자애다. 정연만 해도 웬 시꺼먼 남자애가 가출한 것 같은 여자애에게 같이 가겠느냐니 물어보는 현장을 제삼자의 입장에서 보았더라면 지금 제정신이냐며 기함했을 테니까. 어쩌면 유교의 신이 빙의해서 냅다 저 녀석 곤장을 치라며 윽박질렀을지도 모르겠다.

머쓱함과 쪽팔림과 미미한 자기혐오를 참지 못한 정연이 ‘막 이래’, 같은 철 지난 멘트를 치려는 찰나 이화영이 손을 뻗었다. 설마 개수작 부렸다고 때리려나? 게임에서는 그래도 정신력 반타작 나기 전까지는 직접적인 폭력은 안 쓰더니? 그 어중간해서 쓸모없는 자제심은 한준 한정인 건가?

그렇게 정연이 움찔하는 찰나, 가느다란 손가락들이 정연의 소맷자락을 쥐었다. 팔을 조금만 움직여도 떨쳐 낼 수 있을 만큼 미약하기 그지없는 힘이었다.

같이 가겠다는 거겠지, 이건.

그렇게 받아들인 정연이 제가 쓰고 있던 도수 없는 안경을 이화영의 얼굴에 임시방편처럼 씌워 주고, 대로변으로 나가 택시를 잡을 때까지도 옷소매를 잡은 손은 실밥처럼 떨어지지 않았으니 아마 맞는 해석일 테다.

야밤중에 택시에 보호자 없는 애 둘만 탄 것을 의아하다는 양 보는 기사님께 둘러대는 것이 소소한 곤란이었으나 병원에 입원한 조부모님을 뵈러 가는 남매 사이라는 설정으로 유야무야 넘어갔다.

차창 밖으로 불 켜진 건물들이 트리 위 알 작은 LED 전구줄 마냥 반짝거리며 스쳐 지나가다 간간이 켜진 가로등 외에는 불빛 없는 길로 들어섰다. 잎을 정돈하지 않은 가로수들이 차 안으로 우수수 흔들리는 그림자를 드리웠다. 음산한 귀갓길이었다. 말 한마디가 없어서 더욱 그랬다.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하고 옆자리 바닥에 얌전히 놓인 발을 힐끔거리면, 운동화가 온통 흙먼지로 엉망진창이었다. 신발이 저 모양이니 사람이라고 멀쩡할 리 없다. 퍽 피곤할 텐데도 어디 기대지조차 않고 반듯이 앉아서 앞을 노려보듯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기이했다. 설마 눈 뜨고 자나? 금붕어처럼? 살짝 악몽 꿀 것 같은 비주얼인데.

최대한 티 나지 않게 흘끗거리던 것도 잠시, 묘한 섬뜩함에 시선을 창밖으로 옮겼다. 모 공포 영화에 나오는, 버려도 계속 돌아오는 저주 인형을 집 안으로 옮기는 격이 되지만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런 생각이나 하다 조금 꾸벅 졸았나 싶었을 때, 도착했다며 깨우는 소리가 들렸다.

“늦은 시간에 감사합니다.”

지갑 안부터 가방 안주머니에 넣어 둔 비상금까지 싹싹 긁어 택시비로 내고 - 그 과정에서 조금 눈물을 머금고 - 차에서 내렸다. 집 떠난 지 이틀밖에 안 지났는데, 눈에 보이는 빌라의 모습이 십몇 년 만에 조우한 것마냥 반가웠다. 진짜, 집 떠나면 개고생이라니까… 옆에 가출한 애가 있어서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속으로만 한탄한 정연이 손짓했다.

“들어가요.”

시간이 늦은 만치 조용하기 그지없는 빌라 계단을 오르고, 마찬가지로 조용한 한준의 집 문을 지났다. 아까 도착했다는 문자가 도착했으니 한준은 저 안에서 자고 있겠지. 들어가서 무사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건 아니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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