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제집 문에 비밀번호를 입력해 열고, 뒤에 화영을 세워 둔 정연이 현관문 안으로 고개를 빼꼼 들이밀었다. 현관의 센서 등이 깜박, 밝혀지고, 그 외에는 불 하나 켜지지 않은 집안이 마냥 파랗게 고요했다. 좋아. 출장에서 벌써 돌아오시진 않았군.
“아무도 없으니까 편하게 들어와요. 밥은 먹었어요?”
조금 큰 운동화를 가지런히 벗어 두고 정연이 먼저 걸은 자리만 좁은 보폭으로 주춤대며 따라오던 여윈 소년이 고개를 작게 저었다. 그 소심하기 짝이 없는 걸음을 따라 방바닥에 시꺼먼 발자국이 새겨진 것까지를 본 정연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뭐 좀 준비할 테니까 일단 좀… 씻을래요? 욕실은 저쪽이에요.”
욕실로 향하며 발자국을 조금이라도 덜 남기려는 양 발끝을 조금 세운 채로 걷는 얌전한 모양새를 예의상 슬쩍 외면할 때까지만 해도 정연은 몰랐다. 저 순종적인 얼굴을 한 녀석이 불러일으킬 참사를….
***
‘이화영’이라는 캐릭터의 배경 설정은 대기업 회장의 숨겨진 3세 같은 온갖 과도한 설정과 무리수가 난립하는 게임 내에서도 제법 독특한 축에 속했다. 일본 배경의 연애 시뮬레이션에 나오는 세상 물정 모르는 고상한 무녀 아가씨 캐릭터가 한국식으로 로컬라이징되면서 사회의 고질적인 병폐인 사이비를 다량 첨가하게 된 것이다.
그 말인즉슨, 이화영의 집안이라는 것은…. 21세기에 자연인 흉내를 내듯 낡아 빠진 관습과 기묘한 신앙의 조합으로 현대인의 생활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생활 양식을 고수했다. 우물에서 물을 길어 사용한다든가, 학교에 가느라 교복을 입어야 할 때를 제외하고는 개량 한복도 아닌 풀 세팅한 한복을 고수한다든가…. 게임 스크립트 속의 묘사를 보며 가볍게 뜨악하던 기억이 아직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다.
그러니까, 현대식 욕실 못 쓰는 것도 무리는 아닌가….
아니, 그래도 너무 과한 설정이라고.
씻으랬더니 옷 입은 채로 쫄딱 젖어서는 이리저리 야생마처럼 날뛰는 코브라 샤워기를 황망한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애를 보자니 거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결정하기가 참 쉽지 않다. 샤워기의 거센 물살에 맞아 떨어진 건지 욕실용품은 바닥에 이리저리 널브러져 있지를 않나, 와중에 쏟아져 나오는 것은 찬물이라, 바닥에서부터 한기가 오소소 올라온다.
찬물을 잔뜩 얻어맞은 이화영이 따닥거리며 이를 부딪혔다. 어쩐지 강물에 뛰어들었다 나온 직후의 추위가 떠올라서 저까지 추워지는 기분이다.
서늘한 감각에 어깨를 떨며 수도꼭지를 눌러 물을 잠근 정연이 밸브를 돌려 해바라기 샤워기로 물이 나오도록 조절했다. 그러니까, 위에서 물이 쏴아아 쏟아지는 그 UFO마냥 동그란 샤워기로.
손을 대어 가며 물 온도를 맞추고, 물 끄는 방법부터 뭐가 샴푸고 뭐가 바디 워시인지까지 일일히 일러 주고 나오자니 상황에 맞지 않게도 헛웃음이 났다. 한준한테 혼자 씻는 법을 막 가르쳤을 때가 떠오른 탓이다. 머리 감을 때마다 눈이며 귀에 거품이 들어갔다며 눈물을 찔끔찔끔 흘려 대는 한준의 얼굴을 박박 씻겨 주던 것도 벌써 몇 년 전 일인지.
때에 맞지 않게 떠오른 추억이 주마등은 아니기를 바라며 냉동 밥을 꺼내고, 대충 냉장고에서 야채 쪼가리를 긁어모으고, 추석 선물인가로 받았던 스팸을 쫑쫑 썰어 볶음밥을 만들었다. 두 알인가 남은 계란을 부쳐 이불까지 만들어 주고 나면 어느 정도 구색은 맞았다. 한준한테 만들어 줄 때처럼 캐릭터 얼굴까지 그릴 여유는 없었지만, 이 정도면 한 끼 식사로는 나쁘지… 않겠지?
비록 상대방이 엄청난 전통을 가진 부잣집에서 최고급 한정식만을 먹고 자랐을 - 적어도 그런 설정이기는 한 - 미친놈이기는 해도. 지금까지 하는 모양만 봐서는 밥이 좀 부실하다고 식탁을 뒤집어엎을 것 같지는 않았다.
음식 귀한 줄 모르고 그런 투정이나 부리면 그때는 정말 내쫓아야지. 자리에 없는 사람 상대로 괜히 혼자 툴툴댄 정연이 수저 젓가락 두 쌍까지 나란히 놓았을 즈음 욕실 문이 열렸다. 열린 문으로 김이 모락모락 쏟아지고 처녀 귀신처럼 머리를 축축하게 늘어뜨린 화영이 저벅저벅 걸어 나왔다.
솔직히 말하자면 오는 길에 애X벨을 떠올려서 그런지 유독 오싹한 나머지, 납량 특집인가 하고 좀 움찔했다. 좀 수건으로 돌돌 말고라도 나오지, 귀신도 아니고 왜 저래?
“저기, 머리 안 말리면 감기 걸릴 텐데. …드라이기 가져다줄게요. 일단은 먹고 있어요.”
화장실 안에 분명 드라이기가 있었을 텐데. 못 봤나, 아님 쓰는 법을 모르나. 아무래도 후자일 것 같다. 혼자 생각하고 혼자 결론을 내리며 욕실 안으로 들어섰다. 무더울 만큼 뜨거운 김이 훅 끼쳤다. 아. 환풍기 안 켰다. 뒤늦게 환풍기 스위치를 누르고 흐린 시야를 확보하려 손을 휙휙 저었다.
눈을 가늘게 뜨니 그제야 겨우 욕실 안의 풍경이 보였다. 이방인이 사용하고 나간 공간은 감내하려 예상했던 것만큼 엉망은 아니었다. 흘렸는지 바닥에 거품이 좀 남기야 했지만, 그 정도야 정연이 씻을 때에 함께 씻어 내면 그만이고.
미끄러지지 않으려 느릿느릿 세면대 위의 수납장으로 향하던 걸음이 문득 멈췄다. 세면대 안쪽에도 무언가가 남아 있었다. 거품이나 머리카락은 아니었다.
정연은 그것을 빤히 내려다보다가 곧 수도꼭지를 틀어 물에 흘려보내고서 드라이기를 챙겨 부엌으로 나갔다.
먼저 먹고 있으라고 했더니 먹을 생각 없이 멀뚱히 양손을 탁자 밑으로 널브러뜨리고 있는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머리 위에 덮어 놓기만 한 수건 아래로 물방울이 여전히 뚝뚝 떨어졌다. 정연은 왜 안 먹고 있냐 물음이라도 건네려다, 답이 돌아올 것 같지 않아 조용히 반대편 자리에 앉아 식탁 한가운데에 드라이기를 내려놓고 수저를 들었다.
그사이 조금 미지근해진 볶음밥을 숟가락 한가득 크게 떠 먼저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아주 옛날 자취하던 시절 반찬만 남으면 무조건 볶아 먹던 시절과는 비교도 안 되게 괜찮은 맛이었다. 하긴, 요새 하는 요리는 한준에게 해 준다고 햄도 야채도 꼭꼭 챙겨 넣는 버릇이 들었으니 맛이 없을 수가 없었다.
속으로 자화자찬을 조금 한 정연이 흘끔 시선만 앞에 두었다. 무슨 생각인지, 머리 위로 덮어 놓은 수건 그림자 때문에 얼굴이 푹 가려진 소녀, 아니 소년도 조금 늦게 수저를 집어 들었다. 밥알을 세기라도 하듯 숟가락 반의반도 안 되게 밥을 떠서는 조심스럽게 문다.
한참을 풀 뜯는 토끼마냥 우물거리나 싶더니 꼴깍 넘기고, 가만히 앉아 있더니 정연이 또 밥을 한 숟갈 떠먹은 후에야 그 행동을 따라하듯 수저를 놀렸다. 이번에는 그래도 숟가락에 올라가는 밥의 양이 조금 늘었다. 짜식, 조용히 있더니 배는 고팠던 모양이다.
그렇게 한참 동안 식탁에는 숟가락 달각거리는 소리만이 맴돌았다.
물어볼 것이야 많았지만 밥심이 국력이라 굳게 믿는 한국인으로서 밥 먹는 애를 건드릴 수는 없었던 정연이 그제야 가방을 뒤적거려 수첩과 펜을 꺼내 놓았다. 이화영의 코앞으로 밀어 주고 턱짓했다.
“일단 통성명부터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저는 한정연이에요. 중학교 3학년이고. 그쪽은요?”
물잔을 쥐고 자꾸 만지작거리던 손가락은 정연이 독촉처럼 한 번 더 수첩을 슬쩍 밀어붙이고 나서야 느릿하게 펜대를 쥐었다.
[이화영. 고등학교 1학년.]
이름부터 나이까지 완벽하게 ‘그’ 등장인물이 확실했다. 사실 수상쩍은 아저씨들에게 쫓기며 사극에서나 입을 법한 완벽히 차림 갖춘 한복을 입고 대로변을 뛰어다니는 데다가 말없이 글로만 소통하는 사람이 ‘이화영’ 말고 현실에 있을 리가 없지. 암.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은 심정으로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럼 일단 누나라고 부를게요. 그래도 괜찮아요?”
[상관 없어.]
저기요, 상관없는 거랑 괜찮은 건 다르다고요. 한준 맞춤으로 설정된 입바른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것을 대충 삼킨 정연이 알았어요, 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평생 얼굴 볼 사이도 아닌데 굳이 거기까지 간섭하기도 좀 그러니까.
그 뒤로는 의례적으로 어느 학교 다니느냐니, 어느 지역 사느냐니 하는 물음이 오갔다. 의외였던 점은 화영이 그 질문들에 짧을망정 솔직한 대답을 적어 냈다는 것이다. 학교의 이름 - 당연하게도 한결 고등학교 - 도 사는 지역이 이 근처라는 사실도 전부 정연이 노트에 적어 둔 내용과 일치했다.
“이 근처 사는데 어쩌다가 거기까지 왔어요?”
[행사.]
그래, 그렇고 그런 행사…. 솔직히 말하자면 이미 알고 있을뿐더러, 상대방이 곧이곧대로 답해준다고 하더라도 이 문제에 너무 깊게 파고들 생각은 없다. 남의 집 글러 먹은 종교관까지는 정연이 하룻밤 사이에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까.
해결할 수 없는 일에 골머리 썩는 취미는 없으므로, 정연은 비겁하고 흉악한 어른답게 당장 눈앞에 닥치지 않은 문제는 회피하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대충 하나 정도만 물어보고 그만할까, 생각하는 사이 가벼운 질문이 불쑥 튀어나왔다.
“…밥은 맛있었어요?”
“…….”
속을 읽기 어려운 맹한 낯으로 정연을 바라보던 이화영의 고개가 느리게 끄덕여졌다. 끄덕인 건지 조느라 꾸벅 떨어진 건지 구분하기 어려운 작은 동작이었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정연은 그 몸짓을 긍정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때때로 인생에는 정신 승리라는 것이 필요한 법이다.
“다행이네요. 그럼 이제 머리 말리고, 칫솔 줄 테니까 양치하고. 비어 있는 방이 하나 있으니까 오늘은 거기서 자고. 저 내일도 학교 가서 슬슬 자야 하니까,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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