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당연하지만 드라이기도 사용할 줄 모르는 이화영에게 드라이기 사용법을 가르치고 뜨거운 바람에 화상 입는 일 없나 십몇 분가량을 봐 주느라 정연이 목욕을 마치고 침대에 누울 수 있었던 건 새벽 가까운 시간이 다 되어서였다.
푹신한 베개에 머리를 파묻으면 습관처럼 괜한 것이 떠올랐다. 이를테면 세면대 안에 얼룩처럼 붙어 있던 것. 흔하디흔하게 새까만 머리카락이었더라면 얼굴 한 번 찌푸리고 걷어다가 쓰레기통에 집어넣었을 텐데, 못 본 척도 어렵게 시뻘겋던 자국.
피겠지.
그리고 귀한 몸에 누가 상처 냈을 리도 없으니, 그 상처는 아마….
거기까지 생각하고는 끙, 소리 한 번 내며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남이 제 입으로 말하지 않은 사실까지 알고 있다는 것이 반칙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렇다고 머리를 내리쳐서 잊어버릴 수도 없고, 그 점을 이용해서 소소하게 이득이나 취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더럽고 치사한 어른의 표본 같은 행동이다. 스스로를 가볍게 구박한 정연이 이내 미간을 꾹꾹 문질러 깊게 진 주름을 지웠다. 그래, 땅 파고 있어 봤자 해결되는 일은 아무 것도 없지.
우선은 쟤를 어디로 보내야 할지나 생각하자. 이 근처에 관련 시설이 있던가? 기어코 누워 있지를 못하고 벌떡 일어나 컴퓨터 전원을 눌러 켰다. 파란 불빛이 얼굴 위를 창백하게 비추고, 손가락이 분주하게 키보드 위를 오갔다. 새벽이 다 지나가도록 밤비마냥 일정하게 타자 두드리는 소리가 딸각거리며 울렸다.
길게만 느껴지던 수학여행의 끝이었다.
***
방 안에 온통 고인 적막을 깨듯 초인종 누르는 소리가 울렸다. 컴퓨터 의자에 쪼그려 앉아 있다가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언제 졸았는지 기억도 안 나는데 창밖이 훤했다. 아침인가, 생각하며 뻐근한 목을 주물럭거리는 찰나 딩동- 하는 소리가 한 번을 더 귓전을 울린다.
아침부터 벨을 누르는 사람이야… 보나 마나 한준이겠지. 비밀번호도 알고 스마트 키도 있으면서 매번 굳이굳이 초인종을 울린다. 왜인지 물어봤더니 정연이 문 열어 주는 게 좋다던가 뭐라던가. 그런 성가신지 귀여운지 구분하기 어려운 습관이 들어 오늘은 특히 다행이었다. 안에 벌컥 들어왔다가 화영과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대참사도 그런 대참사가 따로 없다.
“어어, 지금 나갈게.”
닫힌 문밖으로도 들릴 정도로 조금 크게 대꾸하며 입가를 대강 훔치고 - 다행히 오늘도 침은 안 흘리고 잤다 - 다 떴을 머리를 북북 손으로 빗어 내렸다. 이화영을 재워 둔 방문이 곱게 닫혀 있는 것까지 체크한 후 그제야 문을 열고 고개만 빼꼼 내밀었다.
아니나 다를까 한준이 맨날 보는 얼굴 뭐 그리 반갑다고 밝은 얼굴로 서 있었다. 반질반질하게 빗어 내린 머리칼이 아침 햇살에 부스러질 것처럼 금빛이었다. 아. 눈이 씻긴다는 게 이런 기분인가. 괴상망측한 종교 시설에 가서 침범당한 정신이 복구되는 것만 같아 절로 느슨한 한숨이 샜다.
“연이 안녕!”
“응, 좋은 아침. 어제 집에 잘 들어갔어?”
“응, 연이도 정이 이모랑 같이 집에 잘 왔어?”
기다렸다가 나도 정이 이모 보고 싶었는데, 잠들어 버려서… 하며 헤헤 웃는 얼굴에 심장이 뜨끔했다. 미안하다. 아기 마시멜로야. 그거 거짓말이다. 네가 좋아하는 정이 이모는 집에도 못 들어오고 출장지에서 일하는 중이시란다.
“어, 근데 엄마는 일찍 일하러 가셔서. 다음에 오시면 준이가 많이 보고 싶대요, 하고 전해 줄게.”
건조한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늘어놓은 정연이 한준의 머리를 한번 슥 넘겨 쓰다듬었다. 실망시켜서 미안하지만 실망시킬 일이 하나 더 남은 것이 애석하다.
“그런데 있잖아, 혹시 오늘 택시 타고 혼자 학교 갈 수 있겠어?”
“응? 나 혼자?”
“응, 오늘만 혼자.”
왜? 하고 써 놓은 것 같은 얼굴로 한준이 정연을 올려다보았다. 정말정말 궁금하지만 네가 곤란하다면 묻지 않겠다는 티를 팍팍 내는 동그랗고 어린 얼굴에는 예나 지금이나 속수무책으로 약한 정연이 한준의 뺨을 살살 감싸 쓰다듬었다.
“그냥, 어제 늦게 들어오느라 짐 정리도 못 했고, 들를 곳도 있어서.”
조금 우물거리다가 하교는 같이 할 수 있는지를 확인한 한준이 씩씩하게 가방을 올려 멘 채로 계단을 내려갔다. 혹시나 넘어지지나 않을지 보는 데 더해 부족한 말랑이 성분을 조금이라도 더 섭취할 겸, 계단을 쫄랑쫄랑 내려가는 머리를 끝까지 눈으로 좇던 정연은 한준이 도로를 지나던 택시에 타는 걸 확인하고 차 뒤의 번호판까지 사진으로 찍고 나서야 도로 방 안으로 들어섰다. 학교 가기 전에 몇 가지 준비하고, 그 애도 만나러 가야겠지.
***
“한정연, 왜 수학여행 다녀오더니 십 년은 삭았냐? 어디 혼자 극기 훈련 다녀왔어?”
그렇게 밤을 새우고도 아침 일곱 시부터 짬을 내서 병문안을 왔더니 처음 듣는 말이 이런 내용일 일인가? 병실 문짝을 도로 닫을까 말까 5초 정도 고민하던 정연이 결국 안으로 들어섰다.
“그래… 너는 건강한 것 같아서 다행이다.”
수술은 잘되었냐고 물어보려고 했더니 그럴 필요도 없겠다. 건강하다 못해 쌩쌩한 얼굴로 설마 한준 얼굴도 이렇게 상했느냐니, 국보가 상하는 그런 사태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국민으로써 용납할 수 없다느니 하는 말을 종알거리는 반장을 바라보며 정연이 제 얼굴을 문질렀다.
저 한 치 잘못 내디디면 악성 팬으로 진화할 것 같은 반장은 얼굴에는 엄격한 면이 있어서, 정연을 싫어할지언정 딱히 정연의 이목구비를 부정한 적은 없었으므로 살짝 충격이었다. 그렇게 못 볼 꼴인가, 나?
“선물! 선물은 사 왔어?”
“맡겨 놨어?”
“안 맡겨 놓으면 안 사다 줄 정도로 정 없는 사람이야, 너?”
거참, 할 말 없게 하네. 충격에 빠질 시간도 주지 않고 몰아치는 몇 번의 공방 끝에 합죽이가 된 정연이 자신의 얼굴 꼬라지에 대한 고민을 마저 이어 가는 대신 주섬주섬 가방 안에 넣어 두었던 상자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이게 뭐야?”
“호두과자.”
“호두과자?”
응, 호두과자. 이게 무슨 멍청이 공방인가 싶어 하면서도 꼬박꼬박 답해 주는 정연에게 대고 반장이 켁, 소리를 냈다. 그러고는 뒤이어 친목 여행 다녀온 아저씨냐는 둥 - 이 지점에서 정연은 살짝 가슴이 찔렸다. - 선물 센스가 없다는 둥 정연을 향한 야유를 쏟아 냈다.
“…원래 먹는 게 남는 거야.”
“그러시겠죠.”
그럼 다시 주든가, 하고 뺏는 시늉을 했더니 얼른 포장을 까서는 입에 밀어 넣는다. 뺨이 둥글둥글해진 반장을 놀릴까 말까 고민하다 어른스럽게 못 본 척해 주기로 결정하고, 수술은 잘 됐냐느니, 학교는 언제부터 다시 오냐느니 하는 대화를 나누다 슬쩍 운을 뗐다.
“있지, 반장.”
“엉.”
“길에서 비 맞는 동물 같은 거 집에 데려와 본 적 있어?”
“아니? 나 털 알레르기 있잖아.”
“그래….”
간결하고 현실적인 대답에 아직 중학생밖에 안 된 애한테 조언을 구하려고 한 자기 자신에 대한 현타가 급격하게 밀려왔다. 정연이 그럼 됐어, 하고 말을 맺으려는 찰나 반장이 물었다.
“주웠어?”
“어?”
“너는 그런 거 눈 뜨고 못 보는 성격이니까 언젠가 그럴 것 같기는 했는데. 개야, 고양이야?”
따지자면 소리를 안 낸다는 점에서 토끼라고 생각하고, 미친놈은 인간과 분류하여 새로운 종으로 명명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일단은 사람이요.
…라고 대답할 수는 없지, 암. 정신 줄을 바짝 잡은 정연이 눈동자를 굴렸다.
“내 얘기는 아닌데,”
“그래, 한씨 성에 이름은 정연인 다른 사람 이야기라는 거지?”
아니, 막 이러네. 순간 욱한 - 찔리는 게 있어서 - 정연이 조금 눈을 흘겼다. 그래 봤자 네가 그렇게 봐서 어쩔 건데? 하는 마음을 얼굴 근육으로 표현하는 반장의 모습에 깨갱, 하고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지만.
“아무튼, 내 얘기는 아닌데… 동물을 집에 들인다는 건 굉장히 책임감이 필요한 행동이잖아.”
물론 사람도.
“그러니까 데리고 있을 자신이 없으면 전문 센터 같은 데로 보내는 게 맞는 일이지?”
“알면서 묻네.”
“근데 말이야….”
말끝을 흐리는 정연에게 얼른 말하라는 반장의 구박이 쏟아졌다. 아, 아직 무슨 말 할지 정리도 안 됐는데. 정연이 마지못해 정리 안 된 말을 주섬주섬 늘어놓았다.
“뭐 어떻게 내보내야 할지 모르겠어. 아무튼 걔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할 테고, 내쫓긴다고 생각하게 만들기는 싫은데, …. 상황이 어쨌든 내보내는 건 맞는 거니까 그렇게 생각하게 되어도 어쩔 수 없는 거지 싶기도 하고…. 알아보니까 센터 같은 데에서 또래 동물들이 괴롭히는 경우도 있다고 하는데 그런 곳에서 살아남기에는 너무 약해 보이기도 하고. 아, 진짜. 이런 일로 원한 사고 싶지는 않은데….”
“동물 상대로 너무 심오하게 고민하는 거 아냐?”
“<무서운 게 X 좋아> 같은 거 못 봤어? 동물한테 원한 사면 삼대가 평안치 않다….”
“그럼 그냥 고양이 말 번역기 같은 거 써서 설득해 보든가…?”
반장이 플X이 스토어에 있던데, 하면서 폰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지금 말이 안 통해서 문제인 게 아닌데. 상대방이 말이 안 통하는 인간(추정)일 것 같아서 문제인 건데.
차마 말할 수 없었던 정연이 입 안으로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침대 빈자리에 고개를 박았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반장이 툭툭, 뒤통수를 건드린다. 꿋꿋하게 고개를 박고 있자니 에휴, 하는 한숨과 함께 말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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