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그냥 눈 딱 감고 보내. 그렇게 어정쩡한 마음으로 데리고 있다가 나중에 네가 걔를 귀찮게 여기게 되는 편이 걔한테는 더 상처일걸.”
“그런가….”
“그럼. 동물이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아도 그런 건 기가 막히게 알아차린대.”
지난번에 봤던 다큐멘터리에서는 말이야, 하고 즐겁게 떠들기 시작한 반장에게 아슬아슬하게 지각할 것만 같은 시간까지 장단을 맞추어 주다가 한복을 입은 종이 인형이 달린 열쇠고리 하나를 넘겨주고 풀려놨다. 선물을 주고도 줄 거면 그냥 주지 장난질이냐는 야유가 쏟아진 건 새삼 놀랄 일도 아니었다.
***
“잘 들어가. 내일 보자.”
“응, 연이도 잘 자!”
아직 자려면 한창 남은 시간인데. 한준이 명랑하게 던진 한참이나 이른 인사를 손을 흔들어 받아 주며 한 손으로 휴대 전화를 쥐었다. 근처에 위치한 센터 목록, 오케이. 각 센터에서 지켜야 할 규칙, 오케이. 연락처, 교통수단, 오케이. 어제 밤을 새워서 모으고 쉬는 시간마다 짬짬이 정리해 둔 메모를 한 번 더 눈으로 훑어 내리면서 현관문을 열었다.
“다녀왔습니다.”
습관처럼 건넨 인사에도 답은 없었다. 그뿐이라면 딱히 놀랄 일은 아니지만.
‘지나치게 조용하지 않나?’
신발을 벗으며 집 안을 둘러보니 식탁 위에 올려 두고 나갔던 식사도 그대로였다. 랩이 씌워진 채로 차갑게 식은 그릇을 싱크대로 옮기면서 정연은 코끝을 찡그렸다. 그사이에 나갔나. 생판 모르는 사람 집에 눌러앉아 있을 정도로 경계심 없는 성격은 아니었던 모양이지.
아니, 그래도 좀 얘기라도 해 보고 나가지. 아는 게 뭐가 있다고 겁도 없이 나간담? 이미 떠났으니 정연이 신경 쓸 바는 아니고, 신경 쓸 일 없게 된 거라면 오히려 잘된 일이지만. 속으로 한참 꿍얼거리며 딱딱해진 밥을 버리고 그릇을 씻었다.
그래, 자고 나간 자리나 정리해야지, 하고 물 묻은 손을 탈탈 털며 손님방 안으로 들어서던 정연이 잠시 멈칫했다.
침대 위 이불이 둥그렇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자연스럽게 부풀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으니 아마 저건 이불을 머리끝까지 푹 뒤집어쓰고 있는 사람이겠지. 나갔나 했더니 여기 박혀 있었나 보다. 집 난방 짱짱한데 안 덥나? 하루 종일 이 상태로 있던 건가? 좀 뜨악해진 정연이 슬슬 다가갔다.
“저기.”
“…….”
말을 건네 봐도 답이 없다. 그렇다기보다도 반응 자체가 없었다. 말을 걸면 움찔이라도 좀 하지. 조금 기다리던 정연이 떠오르는 불길한 생각을, 예를 들면 어제 욕실에서 발견한 핏자국 따위를 애써 외면하며 말했다.
“이불 좀 걷을게요.”
그리고 한순간 확 이불을 당겨 걷었다. 공포 영화에서 이럴 때 좀 조심스레 안 걷고 확 걷는 이유를 이해할 것 같은 순간이었다. 그렇게 한순간에 하지 않고서야 용기가 안 나는 거지, 암.
저도 모르게 질끈 감았던 눈을 슬쩍 떠 보자 그렇게 걷어 낸 이불 아래에는 공포 영화에서처럼 피 흘리는 시체나 인형 대신 이화영이 몸을 웅크리고 누워 있었다. 두꺼운 이불을 걷어 내고 나니 숨 쉴 때마다 어깨가 얕게 흔들리는 것이 눈에 띄었다.
죽지는 않았군. 다행이다. 경찰 아저씨에게 너 이놈, 언젠가 이런 일로 올 줄 알았다고 이죽거림을 당하는 건 싫었던 정연이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리려던 찰나,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이 눈에 띄었다. 색색거리는 숨도, 아직까지도 뜨지 않고 감겨 있는 눈도.
이거 혹시, 하고 슬금 이마를 짚어 보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불덩이다. 열이 절절 끓었다.
아이고.
절로 나오는 탄식을 한 번 삼켜 낸 정연이 우선은 화려하게 걷어 냈던 이불을 다시 주섬주섬 주워서는 화영을 둘둘 말았다. 가끔 희한한 일로 슬퍼하는 한준을 이불로 김밥처럼 말아 주던 경험 탓에 말아 주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이 김밥을 어쩌냐는 거다. 병원부터 데리고 가야 하나. 근데 병원 가면 신분증이나, 보호자 필요하지 않나? 입원하려면? 머리를 쥐어뜯자니 귓가를 긁는 것처럼 콜록, 하고 작은 기침 소리가 들렸다.
“깼어요?”
마른기침을 몇 번 뱉던 이화영이 말라서 버석거리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입술 모양을 읽어 보려 해도 워낙 조그만 움직임이라 여의치가 않았다. 대충 아프단 말인가? 짐작해 보다가도, 이 와중에도 말 한마디를 소리 내어 안 꺼내는 걸 보면 참… 입 안이 슬쩍 썼다. 갓 고등학생이나 된 애가 이렇게까지 독해야 할 이유가 무언가.
“어지럽죠? 지금 열 나서 그래요. 약 사 올 테니까 조금 더 자요.”
혀를 한 번 찬 정연이 화영의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걷어 내고 이마를 토닥였다. 애 다루듯 굴 생각은 없었는데, 하면서도… 저도 모르게 나간 손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뺨이 벌겋게 달아오른 게 볼거리에 퉁퉁 불어 있던 어린 한준이 떠올라서였는지도 모르고, 열이 나 누워 있으면 정연이 또 아프냐, 하고 이마를 한번 쓸어 주고 가던 누군가의 투박한 손길이 문득 떠오른 탓일지도 모른다. 더 깊게 생각하지 않고 어색하게 손을 뗀 정연이 중얼거렸다.
‘다 괜찮다, 정연아.’
“다 괜찮아요.”
그러니까 자요. 한 번 더 어르듯 말했더니 곧 까무룩 잠들듯 눈이 감겼다. 열 때문인지 고여 있던 눈물이 슬쩍 떨어졌다. 그걸 손마디로 훔쳐 낸 정연이 괜히 이불을 한 번 더 끌어 올려 잘 덮어 주고 방을 나섰다.
그러면서 떠올린 건데. 자신은 원장님이 다 괜찮다고 말하면 ‘아니, 내가 지금 아파 죽겠는데 뭐가 괜찮다는 거예요’ 하고 싹바가지 없게 투정을 늘어놓는 어린애였던 것 같다. 정연은 어리던 자신의 유별난 싸가지를 금방 – 필사적으로 -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며 집을 나섰다. 우선은 약국부터 가자.
약국에 가서 해열제니 해열 시트니 진통제니 감기약이니 하는 것들을 바리바리 사 오고, 겸사겸사 마트에서 몇 가지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왔다. 열 떨어질 기미 없이 낑낑거리는 이화영의 미끈한 이마에 파란 이족 보행 펭귄 그림이 그려진 해열 시트를 붙여 두고서 정연은 심각하게 칼과 주걱을 들었다. 아픈 사이에 노란 싹을 슥삭, 제거하려는 수상한 용도는 아니고 죽이나 끓일까 싶어서.
객기 넘치는 시작이 무색하게 죽을 끓여 본 적은 없어서 휴대폰 화면에 요리 블로그의 글을 띄워 놓고 나는 이 블로거의 메타X이다, 하는 마음가짐으로 임했더니 모양새만은 그럭저럭 멀쩡한 죽이 나왔다. 작게 썰어 넣은 소고기며 야채들을 뒤적거려 잘 익었는지 확인하고 물 한 컵과 함께 방으로 들고 갔다.
슬슬 어두워질 시간이라 볕이 들지 않아 어둑어둑한 방 안의 불을 켜고 여전히 눈 감고 있는 이화영을 툭툭 건드려 깨웠다. 아파서 선잠을 잔 건지 아니면 원래 안 자고 있었는지 금방 눈을 떴다. 눈부신지 찌푸린 눈매 아래로 새까만 눈동자가 탁했다. 첫 만남의 임팩트와 달리 도저히 동화 속 신데렐라라고는 불렀다가는 어린이 동심 협회에서 즉각 고소가 들어올 법한 동태 눈깔 같은 눈이다.
“일어나서 죽이랑 약 먹고 자요.”
땀으로 축축한 데다가 축 늘어진 몸을 당겨 일으켜 세우고 - 와중에 필사적으로 어깨 이외의 곳을 잡지 않으려 애쓰고 - 접이식 책상을 침대 위에다 놓았다. 죽 그릇이며 물컵을 떡하니 올려놓고 손에 숟가락까지 쥐여 주었다. 그런데도 숟가락 하나를 제대로 들지 못하고 눈만 가물가물 뜨고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게 이러다 분명 흘리겠지 싶다.
이불 빨래야 세탁기랑 건조기가 알아서 하니 더럽히는 건 그리 큰일이 아니라지만, 안 그래도 땀범벅인 애한테 음식물까지 엎어지면 꽤나 참담한 사태가 될 거다. 사람은 북북 벗겨서 빨래할 수도 없는데.
이건… 어쩔 수 없다. 눈 딱 감고 뻔뻔하게 가자. 정연아. 스스로를 잠시 세뇌한 정연이 숟가락을 슬쩍 뺏어 들고 죽을 숟가락 반절쯤 차게 떴다. 그리고 한 번 후, 불어서 이화영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먹어요.”
차마 아~ 같은 말을 할 정도로 간이 튼튼하지는 않은 터라 필사적으로 시선을 벽지의 좁쌀만 한 꽃무늬 같은 것에 고정한 채로 중얼거렸다. 이건 적에게 소금 - 인지 설탕인지 분명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 을 보낸다던가 하던 속담과 비슷한 행동일 뿐이다. 수저를 든 손을 허공에 고정한 채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치아가 다각,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손끝이 살짝 흔들렸다.
얼굴을 안 보니 어린 시절 한준에게 밥을 떠먹여 주던 일과 그렇게 크게 다르지도 않다. 그제야 침착함을 되찾은 정연이 도로 빈 숟가락에 죽을 떠다 날랐다. 입 안에 뭘 숨겨 놓은 것도 아니면서 입술을 콩알만 하게만 벌리는 이화영에 맞춰서 죽을 조금씩만 뜨느라 음식이 아주 더디게 줄었다.
그렇게 그릇을 다 비우고 약까지 꼭꼭 챙겨 먹인 후에야 정연은 방을 나섰다. 저도 모르게 흘렸던 이마의 진땀을 손등으로 닦아 내고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이 짓도 두 번 할 건 못 되겠는데.
빨리 나았으면 좋겠다.
제발.
***
그러나 빨리 나으라는 정연의 기도가 무색하게 화영의 감기는 일주일이 지나도록 떨어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급할 때에만 하느님 부처님 알라신님 신령님 죄다 찾으며 싹싹 비는 정연을 괘씸하게 여긴 신들이 정연의 기도를 반려한 것이 분명했다.
근데 21세기의 신앙이란 대부분이 비즈니스 아냐? 군대 가서 성당 가면 초코파이 쥐여 주는 것처럼. 뭘 잘해 줘야 믿을 거 아냐. 이런 생각을 한 시점에서 이미 나는 신의 사랑 같은 것을 받기엔 그른 거겠지. 정연은 그 점은 인정하기로 했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