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여하튼 정연이 메마른 피와 말라비틀어진 영혼을 가진 어른이라 하더라도 아픈 애한테 대고 대뜸 짐 싸서 나가라고 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내보내지 않을 거라면 최소한의 보살핌은 보장하는 것이 냥줍한 자의 의무이고, 따라서 정연은 며칠간 아침 일찍 등교해서 하교하자마자 집으로 뛰어들어 와 환자를 간병하는 투잡 생활을 이어 가야 했다. 그 말인즉슨, 죽여주게 피곤했다는 이야기다.
밤에 안 자고 뭐 하냐고 놀림받는 건 일상다반사에 짓궂은 몇몇 애들은 뼈 안 삭냐는 농담까지 던졌다. 덕분에 정연은 정연의 골다공증을 진심으로 염려한 한준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넘겨주는 급식용 팩 우유를 하루에 두 팩씩 원샷해야 하는 형벌에 처해졌다. 물론 귀여웠으니 오케이지만. 그래도 피곤한 건 피곤한 거다.
그 피곤한 인생에 한 방울, 아니, 한 바가지의 피곤함을 더한 사건은 금요일 아침 학교 가는 지하철 안에서 일어났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북적거리는 지하철 안에서 운 좋게도 구석 자리에 한준을 세워 두고 다른 사람이 닿지 못하게 그 옆에서 벽을 잡고 버티고 있자니 우웅,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누가 한 연락인지는 모르겠지만 애석하게도 정연은 기둥 구석에 어떻게든 머리를 기대고 쪽잠이라도 잘 수 있는 수단을 모색하느라 바빴다. 무시해야지.
“연아, 폰에 알림 왔어.”
정연이 못 들었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굳이 알려 주고서 눈을 반짝거리는 한준만 아니었어도 무시했을 텐데. 차마 한준의 앞에서 당당하게 읽기 귀찮으니까 씹을 거야, 하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억지로나마 입꼬리를 올렸다.
“아, 내 건 줄 몰랐네. 고마워.”
꺼내서 확인해 보니 모르는 번호로부터 온 문자였다.
<[뭐 해?] 오전 7:01
아니, ‘누구세요’도 안 하고 대뜸 뭐 하냐니. 정연은 잠시 이 문자가 구애인의 전화번호를 착각해서 구질구질하게 술에 취한 남자가 구애인의 전화번호를 착각해서 잘못 보낸 문자인지, 아니면 심심하다고 답하면 지금 바로 짜릿한 그녀(혹은 그)들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답장이 돌아오는 새로운 유형의 광고인지를 고민해야 했다.
메신저도 아니고 문자인 탓에 아는 얼굴인가 프로필 사진을 들여다보는 꼼수도 쓸 수 없었다. 정연이 읽기만 하고 답장할지 말지 고민하고 있자니, 다시 진동이 울렸다.
<[사진] 오전 7:03
이번에는 사진이었다. 지금이 쌍팔년도도 아니고 귀신 사진 같은 걸 보내는 유치하고 뻔한 수법은 아니겠지, 하고 화면을 보니 브이 자 한 손이 보인다. 피아노를 치면 딱 맞을 것 같은 길쭉한 생김새가 무색하게 잔 생채기가 많은 손. …이라고 해 봤자. 손에 이름이 써진 것도 아니고, 얻을 수 있는 정보값이야 다 거기서 거기다.
생각을 포기하려던 찰나 손에 포커싱이 맞춰져 있어서 보이지 않던 화려한 배경이 눈에 들어왔다. 형광 주황색으로 장대하게 물든 검은 프린트의 흰 티셔츠. 아, 그제서야 온갖 일들 속에서 잊고 있던 자신의 실수 - 모르는 사람에게 슬러시 엎어버리기 - 가 떠오른 정연이 빠르게 손가락을 놀렸다.
오전 7:05 [안녕하세요 ^^ 그 때는 제가 실례가 많았습니다.]>
오전 7:06 [급한 일이 있어 자리를 떠났던 점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오전 7:06 [어떻게 얼룩이 심해서 세탁이 잘 되었을지 모르겠네요.]>
오전 7:07 [가격을 알려주시면 변상하겠습니다. (이모티콘)]>
미안함을 표시하기 위해 우는 이모티콘 모양까지 끝에 덧붙인 정연이 손을 뗀 찰나, 또다시 폰이 울렸다.
<[ㅁㅎ?] 오전 7:08
오전 7:09 [가격이 무한대란 뜻인가요?]>
<[ㄴㄴ 뭐해?] 오전 7:09
<[뭐해?] 오전 7:09
<[뭐] 오전 7:09
<[하] 오전 7:09
<[냐] 오전 7:09
<[고] 오전 7:10
정연은 찰나 의심했다.
이거 또라인가?
[뭐]와 [해]와 [?]를 영원히 반복해서 보낼 것처럼 굴던 익명의 문자는 이 지난한 공방이 지루해진 정연이 한 번 져 준다는 마음으로 [학교 갑니다… ^^;;]라는 뻔하디뻔한 답장을 보낸 후에야 멈췄다.
정연은 에프킬라 세례를 맞고 마지막으로 발악하는 바퀴벌레처럼 쉴 새 없이 웅웅대던 폰이 마침내 잠잠해진 걸 보고 안도하며 도로 주머니로 밀어 넣었다. 그 괴상한 문자는 정연이 버스를 타고 학교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떨어진 정거장에 내린 다음 터벅터벅 걸어 등교를 마칠 때까지도 다시 오지 않다가, 교문을 통과할 즈음에야 제 존재를 잊지 말라는 양 한 번 울렸다.
<[그래? 나도 학생]
그래. 대한민국에 학생이 500만 명 정도 있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그것참 영양가 있는 일이다. 반사적으로 켁, 하고 표정을 구겼는지 옆에서 한준이 눈치를 봤다. 잽싸게 수업 중이니 문자에 답장하지 못한다는 말만 남기고 휴대 전화를 눌러 껐다.
학교에 일찍 도착해서 수업 시작하기 전까지 자리에 앉아 좀 졸겠다는 포부 가득한 정연의 계획은, 내내 무슨 일 있는지 걱정하는 애에게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말랑말랑한 볼을 주물러 가며 안심시키느라 실행할 수가 없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
학생이라는 말이 사실이기는 한 건지, 수업 시간이 끝나고 휴대 전화를 켰을 때에는 더는 문자가 와 있지 않았다. 핸드폰이 벌집처럼 웅웅대는 사태는 한 번 겪는 걸로 족하니 다행이기는 했지만, 되도록 빨리 자신이 저지른 사고를 수습하고 싶은 마음에 정연은 수업 끝나면 옷은 어떻게 되었는지 연락 남겨 달라는 문자를 한 손으로 남겼다. 요 며칠 간의 동태에 따르면 이 시간에 이화영은 자고 있을 테니까, 손 씻고, 오늘은 빨래 좀 하고….
할 일을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으며 욕실 문고리를 잡으려는데, 때맞게 욕실 문이 열리더니 피할 새도 없이 안면에 쿵, 부딪혔다. 세지는 않았지만 콧대를 제대로 맞았다.
“아야.”
모처럼 잘 세워진 코인데 다 무너지겠다. 반사적으로 코를 쥐다 열린 문 사이로 빼꼼히 고개를 내민 이화영과 눈이 맞았다. 시선이 맞았다고 생각한 순간 바로 상대가 눈을 내리깔았지만. 누가 보면, 아니, 우리 집이니까 누가 볼 일도 없겠지만 그래도 남들이 보면 내가 괴롭히기라도 한 줄 알겠다. 그래도 경계고 뭐고 할 기운도 없이 축 늘어져 있던 며칠 사이에 비해서는 건강해 보이니 됐나.
늘어진 채 물을 뚝뚝 흘리는 새까만 머리칼을 흘긋 살펴본 정연이 몇 발짝 비켜 주자 곧 이화영이 욕실에서 나왔다. 며칠간 정연이 땀 정도는 닦아 주긴 했어도 목욕은 못 했으니 꿉꿉했는지 씻은 모양이었다. 혹시나 해서 옷을 꺼내 두고 가길 잘했다. 정연은 짧게나마 스스로의 준비성을 칭찬해 주기로 했다.
“몸은 좀 어때요?”
“…….”
아. 이 사람 말 안 하지. 턱 하니 물어본 것이 조금 부끄러워져서 머리나 말리라며 손사래를 쳤다. 정확히는, 손을 흔들려다가 상대에게 불쑥 붙잡혔다. 정말 조금도 예측하지 못한 접촉에 벙찐 사이 손바닥 위를 뭉툭한 손끝이 찔렀다. 아프지는 않지만 간지럽다.
뭘 하려는 건가 싶어 꿈질거리는 걸 잠시 내버려 두다가, 참지 못한 웃음소리를 쿨럭이는 기침과 함께 뱉었다. ‘크흑’인지 ‘프흡’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소리에 그런 괴성은 처음 듣는다는 양 이화영은 반쯤 펄쩍 뛰어올라 정연에게서 멀어졌다. 영락없이 깜짝 놀란 덩치 작은 동물 같은 반응이다. 실례인 묘사지만.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간지러워서.”
“…….”
“뭔가 쓰려고 한 것 같은데. 질문에 대한 대답이에요?”
구석에 박히고 싶은 것처럼 어깨를 움츠리고서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이화영에게 괜찮으면 오케이 사인을, 아프면 엑스 사인을 보내라고 일러 주었다. 잠시 후에 돌아온 손동작은 어색하게나마 오케이였다. 전형적인 한국 미인의 고상한 생김새에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손동작이 재미있어서 속으로 좀 웃은 건 말할 필요도 없이 비밀이고.
질문에 대답도 했으니 머리를 말리러 가겠지 싶었는데. 방으로 쑥 들어가던 이화영은 머리 말릴 틈새도 없이 도로 튀어나와서는 정연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흰 봉투였다. 드라마에서 ‘이거 받고 내 아들과 헤어져 주렴’ 같은 대사를 읊는 시어머니 역할의 소품으로 딱 어울릴 법한 두툼한 봉투.
설마 진짜 그건가, 하고 미심쩍어하며 손톱 끄트머리로 봉투 아가리를 슬쩍 들춰 보았더니 녹색도 아니고 샛노란 지폐가 두둑하게 들어 있었다. 아니, 설날에 세뱃돈이랍시고 부모님도 이런 봉투를 건네주더니. 주변에 금전 감각이 기묘한 사람만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은 착각인가?
설렌 건지 놀란 건지 기묘하게 뛰는 가슴과 줄 때 슬쩍 챙기라는 자본주의의 욕망을 누르고 봉투를 잘 닫아 도로 이화영에게 내밀었다.
“…….”
“…이런 거 아무 데서나 내밀고 다니면 큰일 난다고 학교에서 못 배웠어요?”
아껴 둬요. 하고 으름장 놓듯 말하자 대가 약한 이화영은 머뭇거리면서도 도로 봉투를 받아 들었다. 그러고는 순서를 교체하듯 볼펜과 수첩을 꺼내서 끼적거리며 글씨를 적는다.
[도와줬으니까.]
“도와준 건 사실이기는 한데, 그렇게 큰돈 받을 만한 일은 안 했거든요. 그리고 보아하니 가진 돈은 그게 다인 것 같은데 저 다 주면 어쩌려고요?”
“…….”
차후의 일 같은 건 생각 안 한 듯이 침묵을 고수하면서 봉투의 너덜거리는 가장자리만 손끝으로 더듬어 대는 이화영을, 정연은 이걸 어째야 하나, 하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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