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소꿉친구 지키기 프로젝트-48화 (48/52)

#48

“그래서, 지난번에 한정연 씨에게 주워진 불운한 동물 친구는 어떻게 됐어? 보내 줬어?”

“어떻게 되긴…….”

우리 집에 있지. 정연이 말끝을 얼버무리자 대강 감을 잡았는지 반장이 정연의 옆구리를 손끝으로 타격했다. 이 우유부단한 녀석. 그 통렬한 타박에 반박할 수 없다는 것이 정연의 슬픈 점이었다.

“네가 기르게? 부모님한테 허락은 받았어?”

“기르는 건 아니고, 임시 보호.”

차마 사람을 임시 보호하겠다는 말을 부모님에게 꺼낼 수 없어서 허락은 받지 않았다. 그 부분까지는 말할 필요 없지. 자고로 비밀이란 건 자세히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다는 것이 정연의 지론이었다. 비록 멘탈이 흔들렸을 때 반장에게 이것저것 조금 말해 버리기는 했지만, 그 정도는 세이프라고 치자.

시치미 떼는 얼굴로 다시 우유를 홀짝 마시자니 해맑게도 폭탄 같은 질문이 날아왔다.

“한얼빠 씨가 데리고 있는 걸 보니까 귀여운가 본데. 얼마만큼 귀여워?”

정연은 이번에야말로 마시던 우유를 뿜고 말았다.

얀데레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의 공략 캐릭터 - 줄여서 미친놈 - 의 과거와 귀엽다라는 단어라니. 마다가스카르손가락원숭이와 봄 한정 스트로베리망고프라프치노라는 단어의 조합만큼이나 괴리가 깊다.

무슨 동물이냐느니, 귀엽냐느니, 사진을 보여 달라느니 들들 볶는 반장에게 이래저래 둘러대고, 얼빠가 아니라고 해명하고, 보낼 애에게 정들이기라도 하면 나중에 보내기 곤란하니 한준에게는 비밀로 해 달라는 약속까지 받아 내느라 기운이 쏙 빠졌다. 노트 정리도 덜 끝나서 집에서 마저 해야 하게 생겼다. 학교생활이라는 것이 이토록 곤란한 일이 많다.

옆집으로 쏙 들어가는 한준을 마중해 주고 뻐근한 목 주물럭거리며 집으로 들어선 정연이 숨은그림찾기를 해도 변한 부분을 못 찾을 만치 평소처럼 조용한 집안에 대고 다녀왔습니다, 하는 인사를 뱉었다. 답이 돌아오지 않는 것도 익숙한 일이라 기다리지 않고 방으로 향해 가방을 내려놓았다. 책상머리에 붙여 둔 메모들이 살랑 흔들리다 떨어질 것처럼 비뚤어져서, 가장 근래에 붙인 것부터 도로 눌러 붙였다.

가장 윗줄에 또박또박 적어 둔 [공동생활 규칙]이라는 글씨가 엄지손가락 아래에서 살짝 번졌다. 흑연이 묻은 손끝을 문지르며 한 발짝 떨어져 서서 새삼스레 며칠 전 이화영과 마주 앉아 정한 규칙들을 읽어 내렸다.

1. 밖에 나가고 싶거나 돌아가고 싶어지면 꼭 미리 상담한다.

2. 정연이 없을 때 누군가 집에 찾아오면 반드시 아무도 없는 척한다.

3. 서로의 방에 허락 없이 들어가지 않는다.

마주 앉은 보람 없게도 세 가지 사항은 전부 정연이 정한 것이었다. 이화영에게 더 추가하고 싶은 게 있냐고 물어도 고개를 젓길래 우선 생활 규칙은 그렇게 세 줄만이 정해져, 두 장을 똑같이 써서 한 장씩 나눠 가졌다. 생활의 전반을 총괄하기에는 턱없이 포괄적인 사항들이라 틀림없이 곧 수정하거나 추가해야 할 때가 오리라고 예상했건만, 규칙은 일주일가량이 지나도록 변하는 일이 없었다.

그야, 얼굴을 봐야 불편함이든 뭐든 느끼고, 불편해야 고치든 말든 하지.

수저도 제대로 들지 못해서 밥을 떠먹여 줘야 하던 것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감기가 전부 나은 이화영은 놀라울 정도로 손 갈 일이 없는 청소년이었다. 심심할까 봐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다 준 책을 읽는 건지, 정연이 고등학교 생활을 대비해 미리 사 두었던 참고서로 공부를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화영은 정연이 저녁 먹으라고 부르지 않는 이상 손님방에서 잘 나오지조차 않았다.

욕실 바닥에 붙어 있는 길고 긴 머리카락이나, 아침에 챙겨 두고 간 밥그릇이 어설프게 씻긴 채로 그릇 건조대에 뒤집어져 있는 것으로 정연이 없을 때의 생활 반경을 겨우 짐작해 볼 수 있을 따름이었다.

예비 또라이가 혹시나 옆집의 한준을 만나기라도 할까 봐 노심초사하며 이런저런 규칙을 정해 둔 정연이 머쓱할 정도로, 이화영은 방에 콕 박혀 있는 일명 방콕러였다. 며칠이 지나도 변함이 없어서, 바짝 긴장하고 있던 정연의 신경도 마침내 느슨해졌다. 그래서 살만해지기는 했는데…,

말라붙은 밥풀 하나가 제대로 떨어지지 않은 밥그릇을 세제를 묻힌 수세미로 박박 문질러 닦다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처럼 지내는 게 정연의 입장에서는 편했다. 굳이 슬슬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가는 게임 CG보다 아주 조금 앳될 뿐인 얼굴을 마주하면서 얘는 아직 미친놈이 아니다, 그냥 어린애다, 이상하게 대하지 말자 스스로를 세뇌하는 것도 퍽 피곤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정말 이대로 지내도 괜찮은 건가?

정연이 시키지 않아도 먹고 씻는 최소한의 활동은 하는 것 같지만, 먹고 싶으면 먹으라고 내버려 둔 간식에는 조금도 손을 대지 않았고 마음껏 보라고 한 TV 리모컨도 항상 미동 하나 없이 같은 자리에 놓여 있었다.

급한 대로 편의점에서라도 기본적인 속옷은 사다 줬다지만, 자기 옷 한 벌 없이 자기한테는 사이즈가 조금 클 정연의 옷을 입고 정연의 물건들을 사용하면서도 불평이나 요구 사항 하나가 없었다. 당사자가 만족하고 있다면 크게 문제는 없지만, 하루 종일 남이 주는 것만 받으며 집 안에만 갇혀 살면… 그 집에서의 생활과 다를 바가 뭔지.

이화영이 한준을 지독하게 괴롭히는 표면상의 이유는 한준이 이화영에게 책임질 수 없는 희망을 주었다 절망시켰다는 말도 안 되는 사유지만, 근본을 따지자면 그놈의 집구석이 사람을 완전히 미치게 한 것이 주된 원인 아닌가?

그런 점에서, 모처럼 가출했는데도 비슷한 환경에서 - 비록 정연은 무교고 이상한 종교 행사를 시키지도 않고 억지로 치마를 입히지도 않기는 하지만 - 시들시들하게 자라나면, 근본적인 문제는 전혀 해결이 안 되는 건 아닌지.

얼마나 이불 속에만 박혀 있었던 건지, 침대의 시트에 무슨 시체 주위에 그려놓는 하얀 보존선마냥 사람 모양으로 패인 자국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햇볕 좀 쐬지 않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산 사람 몸에 곰팡이 피겠다! 예언에 가까운 직감이었다.

“…우리 산책 좀 하죠.”

자고로 건강한 생활에 건강한 정신이 깃드는 법이다. 햇볕 한 번 쐬지 않고, 침대에 틀어박혀서 아무것도 안 하고 천장의 무늬나 세어 대는 건 어떻게 생각해도 건강한 정신은커녕 없던 병도 드글드글하게 불러일으킬 극악의 생활 패턴이었다.

우리 집에서 미래의 악이 자라나는 것을 두고 볼 수만은 없다. 정연은 두 주먹을 꾹 쥐며 결심했다. 이 자식의 생활 패턴을 조금이라도 고치고 말겠다고.

꼭 나가야 하냐고 쪼작쪼작 글씨로 미약하게 항변하는 이화영을 무시하고, 캡 모자를 하나 눌러씌워 준 채 현관에 버텨 선 채로 기다렸다. 자고로 의지의 싸움이란 목소리 큰 놈이 이기는 법인데, 이화영은 누가 들어도 십 대 소녀라고는 믿어 주지 않을 굵직한 목소리를 지닌 탓에 말이라고는 한마디도 할 수 없는 저주에 걸렸으므로 정연의 승리는 예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네가 나올 때까지 여기 서 있겠다는 의지가 가득한 정연의 포즈에 말랑이 시절의 한준 뺨치도록 대가 약한 어린 이화영은 울며 겨자 먹는 기색이 역력한 태도로 발을 질질 끌며 정연의 운동화에 발을 집어넣었다.

조금 헐렁한 신발이 벗겨지지 않도록 끈을 조여 매 주고 현관문을 열었다. 한준이 태권도 학원에 갔을 시간이기는 하지만, 괜히 옆집 문이 열리지는 않을지 미심쩍게 바라보다 미동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먼저 문밖으로 나섰다. 히키코모리 신데렐라 양도 주춤거리며 뒤를 따랐다.

오후 다섯 시가 다 된 시간이라 머리 위에서 어느 정도 내려온 태양 볕은 그리 밝지 않은데도 바깥이 눈부신 양 눈을 슬 찌푸리는 모양새가, 누가 봐도 어엿한 히키코모리의 그것이었다. 주말 내내 게임 실황 방송만 하다가 슬리퍼 신은 발을 직직 끌며 돌아다니던 과거의 내가 바로 이 꼬라지였던 건가. 문득 저를 보고 움찔했던 편의점 직원에게, 십몇 년쯤 늦은 사과의 말을 전하고 싶어졌다.

죄송합니다. 이번 생에는 얼굴값을 하기 위해 적당히 덜 폐인 같은 몰골로 다니도록 하겠습니다. 얼굴값이라는 단어를 이럴 때 쓰는 건 아닌 것 같지만.

몇 주간 하루에 열 걸음이나 걸을까 말까 한 이화영의 다리가 다 퇴화되었을 가능성을 고려하여 최대한 느린 속도로 계단을 내려와 주차장을 빠져나오려는데 빌라 초입으로부터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렸다. 학생들이 하교하기에는 늦고 직장인들이 퇴근하기에는 이른 시간이라 사람이 없을 줄 알았는데 어디서 놀다 들어오는지 근처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애들 한 무더기가 우르르 쏟아졌다.

걸쭉한 목소리로 이 새끼 저 새끼 골고루 찾으며 낄낄거리던 남학생 하나가 정연과 이화영을 스쳐 지나가다 말고 멈춰 섰다. 입이 떡 벌어지고 그을린 얼굴이 벌게졌다. 정연이 판별하기로는 침 흘리기 5초 정도 전의 얼굴이었다.

이 새끼 뭐야? 싶은 감상도 5초 정도 들었으나, 정연은 곧 상황을 이해하고 말았다. 남학생의 흐리멍덩한 시선이 이화영에게 직선으로 꽂혀 있으니 싫어도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이 예비 히키코모리, 외관만은 훌륭한 미소녀였지. 물론 한준만큼은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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