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소꿉친구 지키기 프로젝트-49화 (49/52)

#49

또래 여자애를 기준으로 하자면 머리 하나는 더 클 정도로 늘씬한 키, 한국인 중에서도 드물지 않을까 싶은 새까만 머리칼 사이로 우아하고 매끄럽게 내려오는 턱선이나 흠결 하나 없이 하얗고 고운 피부, 곧은 콧날, 늘 우울하게 다물고 있는 탓인지 끝이 살짝 처져 처연한 느낌을 주는 입술까지, 고작 모자 그늘로 가릴 수 있는 미모는 아니었다. 물론 한준만큼은 아니지만. 중요하므로 두 번 말했다.

제 동행인의 얼굴을 보고 넋 놓는 사람이 있는 건 숨 쉬는 것만큼이나 당연하고 빈번한 일이라 납득하고 그냥 스쳐 지나갔다. 남학생도 생전 처음 보는 미인에게 말 걸 용기까지는 없는지 끝까지 시선만을 보내고 따로 말을 걸지는 않았다. 그나마 귀찮은 일은 덜었군, 생각하고 인도로 나서려는데 몇 걸음 가지 못하고 뒤에서 따라오던 걸음이 멎었다.

“왜 그래….”

다리 아파요? 하고 물으려 뒤를 돌아보다 물음을 도로 꿀꺽 삼켰다. 아픈 사람마냥 새하얗다 못해 새파랗게 질린 이화영이 곧 토악질이라도 할 것처럼 손으로 입을 꾹 눌러 막고 있었다. 입가를 꽉 짓누른 하얗고 곧은 손가락 틈새로 가쁜 숨이 샜다.

얘 왜 이래. 좀처럼 당황하는 일이 없다고 자부하는 정연으로서도 영문을 모를 태세 변화였다. 동요한 기색을 보이지 않으려 입매를 굳힌 정연이 이화영의 옷소매를 잡고 슬슬 끌어당겼다.

잎을 죄 낙엽으로 떨군 탓에 앙상한 나무 그늘에라도 아쉬운 대로 숨듯이 붙고서 찬찬히 상대를 살폈다. 이화영은 여전히, 세상 사람들은 다 가을을 걷고 있는데 저 혼자 한겨울을 걷는 사람마냥 숨도 제대로 못 쉬고 꽁꽁 얼어 있었다.

“천천히 숨 쉬어요.”

이렇게요, 하고 정연이 부러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불규칙하던 이화영의 호흡이 비슷한 속도로 맞춰질 때까지 숨만 쉬었다. 가쁘던 것은 가라앉았는데도 여전히 불안정하게 끝소리가 흔들리는 숨을 뱉은 이화영이 주머니를 뒤져 수첩을 꺼내 거칠게 글씨를 휘갈겼다. 펜촉이 종이를 거칠게 할퀴어 금방 너덜거렸다.

[나 이상해?]

세상 사람들의 기준으로 따지자면 요상한 종교적 이유로 여장하고 지내며 묵언 수행하듯 말은 한마디도 안 하는 남자아이는 이상하기는 하다. 물론 정연은 미연시에 끼워 맞추기로 있는 웃기고 말도 안 되고 너무한 선택지를 골라서 게임을 던지는 타입의 플레이어는 아니었으므로 그렇게 대답하지는 않았다. 사실, 대답할 시간이 없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걷는 게 이상해? 숨 쉬는 법이 이상해? 얼굴이 이상해? 머리가 이상해? 이상한 게 티나?]

대꾸할 타이밍을 잡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글자들이 쏟아져 내렸다. 서 있는 자세 탓인지, 불안정한 심리의 문제인지 한껏 기울어져 넘어지기 직전처럼 쏠린 글씨들이 수첩에 손마디에 쓸려 번졌다.

정연은 그제야 문제의 원인을 어렴풋이 짐작했다. 아까의 남학생이 보낸 시선이 이화영의 안 좋은 부분을 스친 모양이다. 깊은 사정까지는 모르겠지만, 해 줄 말이야 정해져 있었다.

“안 이상하고, 안 이상해 보여요.”

“…….”

“아까 그 사람은 그쪽이 아니라 저 쳐다본 거예요. 잘생겨서.”

“…….”

이런, 필사의 자뻑에도 이 자식 무슨 소리 하는 거야, 하는 타박이 없는 것이 조금 쪽팔렸다. 휙 돌아선 정연이 마저 걷자고 손짓하자 이화영도 세 발짝쯤 뒤로 걸음을 뗐다. 사람이 누워만 있으면 신경 전달 물질인 세로토닌이 가로토닌으로 변해서 몸에 이상이 생긴다든가 하는 실없을뿐더러 이과가 들으면 대로할 농담을 주워섬기면서 지나다니는 사람이 드문 길만 골라서 걸었다. 채 쓸어 내지 않은 낙엽이 물에 젖어 걸음마다 절벅거리는 소리를 냈다.

하루에 30분은 걷는 게 좋다고 했었나, 여기까지 오는 데 십오 분쯤 걸렸으니 돌아가는 길까지 하면 딱 맞겠다. 여기저기 이가 빠진 콘크리트 담을 짚고서 돌아선 채, 뒤따라오던 이화영에게 힐끔 시선을 주었다.

“슬슬 아이스크림이라도 사서 돌아갈까요.”

날씨가 서늘하긴 한데, 원래 아이스크림은 추울 때 더 맛있는 거잖아요. 지줄대는 정연에게 대꾸하려는지, 표지를 덮지도 않고 꾹 쥐고 있던 수첩을 고쳐 든 이화영이 도로 펜을 끄적였다. 돌아온 답변은 아이스크림에 대한 것은 아니었다.

[너는 왜 나한테 잘 대해 줘?]

딱히 잘 대해 준 적은 없는데. 너스레를 떨려다 그런 걸로 넘어갈 것 같지 않아 그만뒀다. 정연의 무던한 시선 아래로 꾹꾹 눌러 쓴 정자가 줄을 이었다.

[나는 너한테 뭘 주면 돼?]

아직까지도 표정 없는 낯이 정연을 마주 올려다봤다. 정연이 바라보기라도 하면 곧장 시선을 바닥에 처박던 사람치고는 오랜 시간을 닿아 있던 눈동자가 도로 아래로 내리깔렸다. 까맣게 먹먹한 시선 끝에 초조함이나 난처함 같은 것이 슬쩍 묻어나는 것 같기도 했다.

갑작스러운 물음이었지만, 왜 물어봤는지 이유 정도는 짐작할 수 있다. 주어진 것에 무엇이라도 갚아 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부채감이 든 모양이라고. 촘촘한 나뭇잎 사이로 떨어지는 별꽃 모양의 볕처럼, 아무런 타산도 이유도 없이 당연한 것처럼 쏟아지는 한준의 애정에 무엇이라도 보답해 주고 싶어서 몸이 단 채 동동거리는 것이 정연의 두 번째 삶의 전부였으므로 마땅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물론 정연이 이화영에게 주는 것은 애정이라기보다는 어른이 어린애에게 해 줘야 할 최소한의 보호고, 이화영이 느끼는 건 아마 단순한 부담감일 거라는 점에서 정연의 사례와 완전히 같지는 않겠지만. 보호받아야 할 나이라서 보호받는다는 것을 당연하다고 못 느끼는 애가 있을 정도로, 이 세상에 당연한 일을 당연하게 해 주지 않는 보호자가 많다는 것은 애석한 점이다.

정연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에서도.

아무것도 안 해 줘도 된다고 말해도 이해할 수 없을 게 뻔한, 몸만 큰 어린애를 바라보던 정연이 제 목덜미를 벅벅 긁었다. 거슬거슬한 머리칼이 깎을 때가 되었는지 손가락을 간지럽게 스쳤다.

“그럼 집안일 좀 도와줘요. 빨래라거나….”

“…….”

“어떻게 하는지 모르면, 배우면 되니까. 그렇게 해 줄래요?”

태어나서 손에 물 묻히는 일은 한 번도 안 하고 규중처녀처럼 자랐을 이화영이 별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양새를 따라 차양처럼 길게 늘어져 있던 머리칼이 엷은 바람에 스르르 흩어져 날렸다. 그제야 창백한 얼굴 위로 다 져 가는 노을 색이 슬쩍 스치는데도, 분위기도 탈 줄 모르는지 조금도 웃지 않는 여전한 무표정에 대고 정연만 이 인간관계 초보자에게 견본을 보여 주듯 대신 슬쩍 웃었다.

그날부로 빨래는 이화영의 담당이 되었다. 물론 빨고 말리고 하는 일들은 세탁기와 건조기가 한다지만, 초등학생에게까지 필수로 컴퓨터 사용법을 가르치는 이 시대에 홀로 전자 기기를 접해 본 경험이 없는 기계치 아가씨가 세탁기 사용법을 익힌 것만 해도 제법 기특한 일이었다.

정연의 후드 집업이며 체육복을 헐렁하게 걸친 채로, 머리는 그 긴 머리카락이 빨래에 붙지 않도록 고무줄로 어설프게나마 올려 묶고,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무심한 듯한 표정으로 건조기에서 막 나온 따끈따끈한 수건을 개는 이화영의 모습은 생각했던 것만큼 어색하지는 않았다. 가부장 제도의 수혜자처럼 남에게 일 시키고서 배 긁으며 - 진짜로 긁지는 않았다 - 바라봐야 하는 정연의 양심만이 조금 찔렸을 뿐이다.

어쨌건,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종종 점령한 땅 위에 꽂히는 깃발마냥 거실 소파 위에 뒤집혀 놓여 있는 읽다 만 책이 눈에 띄게 된 걸 보면 방 안에 틀어박혀서 나오지 않던 장래의 곰팡이의 생활 반경이 조금은 넓어진 듯했다.

생쥐가 파먹은 치즈마냥 구덩이가 숭숭 팬 메마른 땅이 그려진 표지의 책을, 펼쳐져 있던 부분에 책갈피를 꽂아 곱게 닫아 주고 소파에 앉았다.

그렇게 삐뚤빼뚤하던 처음과 달리 네모반듯한 모양으로 개어진 채 놓여 있던 빨래들이 정연의 움직임에 따라 작게 풀썩이고, 익숙하기 그지없던 집의 적막한 공기에 섞인 희미한 섬유 유연제 냄새가 코끝을 간질여서, 손으로 눈을 덮고 그대로 늦은 오후의 짧은 낮잠에 빠지기가 어렵지 않은 날이 있었다.

느릿느릿 일정한 속도로 작게 들리는 숨소리에 조심스레 문고리 달각이다 여는 소리가 섞이고, 담요가 어디 있는지는 모르는 손님이 망설이다가 한 아름 이불을 안아다 잠든 정연의 위로 두껍게 덮어 두었다.

조금 더워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악몽을 꾸지 않고 오랜 피곤함을 조금이나마 덜어 낼 잠에 빠지는 소년과, 소파를 두고서 바닥에 쪼그려 앉아 덮인 책을 도로 펼쳐 가 본 적 없는 나라의 이야기에 소리 없이 빠지는 소년이 있는,

이상할 정도로 평온한 날이 있었다.

***

가을이 다 지나가는지 하루가 다르게 기온이 낮아졌다. 추위를 많이 타는 애들 몇은 벌써부터 파카를 꺼내 입었고, 점심시간마다 운동장 위를 세렝게티 평원의 사슴마냥 질주해 대는 슈퍼 어쌔신 몽키들 중에도 가오를 버리고 긴팔 체육복을 걸쳐 입는 배신자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두꺼워 지나갈 때마다 천 부대끼는 소리를 내는 옷들을 보며 정연은 떠올렸다. 벚꽃의 꽃말이 중간고사인 것처럼, 두꺼운 옷의 꽃말은 기말고사구나… 그 말인즉슨 공부에 뜻을 둔 학생이라면 하굣길의 만석 지하철에서까지 영단어 암기장에 코를 박고 있어야 할 시기가 되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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